소설 <거기서 페리를 만나> | 포르투 편 : 2 화
두로 강은 정직하게 도시의 가장 낮은 곳을 흘렀다. 어떤 골목에서 출발하더라도 강으로 가려면 그저 계단을 내려가거나, 기울어진 길을 따라가면 된다. 내리막 길을 걷다 보면 반드시 두로 강으로 난 골목 끝에 도착한다.
“이제 강을 벗어나죠.”
페리는 길안내 표지판을 보지 않고 골목을 따라 올라갔다. 아직 밤의 빛깔을 다 날려버리지 못한 파리한 동쪽 햇살을 받아 도시 전체에 아줄레주 물빛이 돌았다. 식당은 강변에서 서쪽으로 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횡단보도를 하나 건넌 후, 길 반대편 쪽으로 건널목 쪽으로 대문이 난 집이었다.
가게는 조금 전 문을 연 듯 분주했다. 예쁜 물고기 같은 눈을 가진 젊은 여자가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밝게 인사를 건넸다. 멀리 창가 쪽에 서서 테이블 쪽을 바라보던 페리가 코트를 벗어 들었다. 마땅한 옷걸이가 없는지 자리로 다가와 코트가 마구 구겨져도 상관없다는 듯 아무렇게나 의자에 걸었다. 그러고는 코트 위로 체중을 실어 기댔다. 감색 스웨터, 갈색 눈동자. 스웨터 밑으로 보드라운 질감의 시계가 눈에 띄었다.
“나무로 만든 겁니까?”
페리는 길가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 같다 가도,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생소한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차가운 금속이 아닌 무른 질감의 나무시계는 그에게 참 잘 어울렸다.
“새벽에 일어나 손목에 올려도 소름 끼치게 차갑지 않아 좋습니다.”
그 시계를 보고 있으니 따뜻함, 자상함, 성실함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잠깐만요. 죄송합니다.”
페리는 휴대폰을 꺼내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 확인했다.
“몇 년 동안 가지고 있던 책인데, 아직도 다 못 읽었습니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읽으려고 했는데 잘 안되네요.”
먼저 운을 뗐다. 페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가 싶더니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꼭 다 읽을 필요는 없죠. 모든 책이란 인간의 약점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니.”
그는 그게 별 대수로운 문제냐는 듯 답했다.
“약점이요?”
“오류는 도처에 일어나고 있잖아요. 믿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으니까요.”
오랫동안 아껴 읽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었다. 설사 오류가 있더라도 우리 같은 사람이 쉽게 단정 지을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표정을 숨기고 눈을 들자 페리는 정다운 표정으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잠깐 상했던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페리는 햇볕이 비치는 오전의 수영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페리처럼 여러 언어를 잘하면 굳이 이런 책을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여행을 하다 보면 책은 결국 짐이 되잖아요.”
“언어야 시간을 투자하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어요.”
“뭐 번역이 줄줄 되는 세상이니까. 곧 모든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겠죠.”
“그렇게 생각해요?”
페리의 눈에 밝은 빛이 돌았다.
“인간들은 언제가 되더라도 각각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기술의 발전이야, 짐작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사실 지금 번역 정도면 이미 훌륭하지만.”
나는 마침 울리는 메시지를 가리키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페리는 참을성 있는 미소를 지었다. 메시지를 몇 자 쓰다 결국 몇 마디를 더 했다.
“어디를 가나 말이 통하면 좋은 것 아닌가요? 우물쭈물 대다가 불이익을 당할 일도 없고, 오해를 하거나 서로를 깔보는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을 테니.”
“전 말이 안 통하길 바랍니다.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재미가 떨어지지 않습니까? 들려도 들리지 않고, 모든 것이 의미 없는 풍경이 되어야 여행이 비로소 더 홀가분하잖아요. 모든 걸 알아들으면, 고향에 있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을 겁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사실 어디나 똑같으니까요.”
“이국적인 느낌을 가장 많이 주는 건 역시 언어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도 믿어질 때가 있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가 언젠가 영영 헤어져야 할 사람이라 느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어떤 인사를 해야 할지 생각하며 메뉴판을 읽어내려갔다. 포르투갈 어로 적힌 메뉴판을 심각하게 노려보며 쉬이 메뉴를 정하지 못하자 페리가 부드럽게 물었다.
“전채로 템푸라나 칼데이다라 그리고 메인으로는 프란체시나나 로조스 어때요?”
페리는 종업원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나는 벌써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몇 번이나 들었지만 참았다. 페리는 차근차근 친절하게 주문했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부드럽고 유연한 대화가 분명했다. 종업원은 활짝 웃으며 주문지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맥주를 한 잔 하려고 하는데, 페리도 할래요?”
나는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주문을 해야 하는데 자연스럽게 말이 통하지 않는 포르투갈 종업원에게 묻지 않고 페리에게 묻고 있다.
“혹시 어떤 맥주가 맛있나요?”
페리는 잠깐의 뜸도 들이지 않고 필스너를 추천했다.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와 시원한 맥주, 갓 튀긴 바삭한 튀김이 나왔다.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포르투에 자주 오나 봐요.”
“여긴 처음 왔습니다만 잘 알고 있는 곳인 건 맞습니다. 오리너구리에도 후기가 꽤 있거든요.”
페리가 여행 앱 ‘오리너구리’에 대해 말했다. 사실 페리와 내가 만나게 된 것도 그 앱의 ‘여행 동반자 찾기’ 기능 덕이었다.
“이 앱은 좋긴 한데…. 주관적인 후기들이 많아서 객관적이진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그런 가요? 그런 평가도 있군요….”
나는 맥주를 들이켜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리너구리가 아니었으면 페리를 못 만났을 겁니다. 이 식당에 올 생각도 못 했을 거고요.”
고수가 올라간 토마토 생선 수프를 가볍게 비웠다. 얇은 튀김옷을 입힌 오징어 역시 만족스러웠다. 전채 요리 접시가 거의 비자 메인 요리가 나왔다. 프란체시나는 흘러내리는 치즈 아래로 얇은 감자칩과 소스가 소박한 붉은 토기에 가득 담겨있는 요리였다. 통 식빵을 3분의 1로 자른 높이로 무언가 그득 쌓고 치즈를 덮어 소스를 듬뿍 부은 모양이었다. 엄청나게 뜨거운 탕요리처럼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탑처럼 생긴 샌드위치를 잘랐다.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후끈한 김이 와락 올랐다. 프란체시나란 다양한 식감의 여러 부위 고기와 소시지들을 쌓고 빵으로 덮고 그 위에 치즈를 올린 뒤, 심심한 간을 한 묽은 소스를 듬뿍 부은 엄청 커다랗고 뜨거운 샌드위치다.
“다양한 부위가 들었어요. 내장도 있을 거예요.”
페리는 거의 내가 다 먹은 마지막 오징어 템푸라를 집어 접시로 가져갔다. 마침 로조스를 들고 온 점원이 빈 접시를 가져갔다. 페리는 잊지 않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를 안 지 이제 막 반나절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만난 친구처럼 편안했다. 나는 조금 전까지 생각했던 이별의 아쉬움을 잊어버렸다.
페리는 인생의 황혼에 들어선 중년의 신사 같았다. 가끔은 그가 나이에 비해 매우 젊어 보이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떨 땐 아직 세상의 가차 없는 차별과 불평등의 쓴 맛을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페리의 눈동자는 보통보다 밝은 갈색 빛으로, 그 속에는 그림자라고는 전혀 드리워지지 않은 것처럼 밝은 윤이 났다. 해는 그쪽이 아니라 오히려 내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 밝아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이번 여행 동안 혼자 다녔어요. 포르투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이기도 해서 앱을 통해 동행을 찾았거든요. 마침, 이렇게 연락이 잘 됐습니다.”
굳이 그의 나이를 묻고 싶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이에 굳이 나이 몇 살 때문에 어색해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페리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혼자 하는 식사는 사자나 늑대의 식사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같이 먹으니 좋긴 좋네요.”
“지난 여행 동안 동행이 없었나요?”
페리가 물었다.
“네. 혼자 여행하고 싶었거든요."
“혼자 식사를 하는 게 지겨워질 때가 있죠. 확실히 사자나 늑대 같은 식사는 외롭습니다. 그래도 누구나 가끔은 혼자 별로 맛이 없어도 배를 채우기 위해 아무거나 입에 넣기도 하고, 별로 달갑지 않은 상대와 정말 맛있는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페리도 달갑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불친절한 페리를 상상할 수 없다.
“가끔은…. 그렇죠.”
페리가 있어 여행이 외롭지 않았다. 물론 함께 여도 외롭게 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그냥 함께라는 느낌만으로 좋은 사람도 있다. 페리는 계산을 하고 다시 돌아와 코트를 집어 들었다. 나는 오리너구리를 이용해 페리에게 음식 값의 반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 돼 몇몇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았다. 그는 회색 코트를 집어 입구 쪽으로 가서 조용히 입고,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서야 먼지를 털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포르투 정오의 강인한 햇볕이 페리의 회색 코트에 반사됐다. 우리는 다시 조금 언덕을 걸어 내려와 오른쪽으로 볼사 성을 바라보았다. 페리는 잔디 공원 한편에 심긴 풀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단정한 화단이나, 멋진 동상, 위풍당당한 성을 보지 않고 꽃도 피지 않은 겨울 풀 떼기 앞에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조심스레 만져 보기까지 했다. 관광객 무리가 아름다운 정원과 청동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 다가왔다. 그들은 페리 뒤에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페리, 잠깐만요.”
그제야 관광객들의 시선을 알아차린 페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중한 눈빛으로 인사를 건네고 길을 건너왔다. 세상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듯 화단의 풀을 바라보며 감탄하던 모습과 어른스러운 눈인사를 하는 모습이 영 딴판이었다.
“도대체 뭘 보고 있었어요?”
“이 풀 꼭 미역 같지 않아요? 해초 같이 생겼어요. 봐요. 물속에 있어야 더 어울릴 것 같은데.”
페리는 엉망진창인 구도로 풀 사진을 찍더니 손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저 동상이 항해왕자 엔리케예요. 유럽 어디든 동상이 너무 많으니까 누가 누군지 신경 쓰지 않게 되죠. 100년을 산 사람도 자기 동네에 어떤 동상이 몇 개나 있는지 모를 걸요? 여기서 널찍한 구도로 잡으면 야자수가 쭉 늘어선 성이 시원하게 잘 찍힙니다.”
사진 명당까지 꾀고 있는 사람이 그토록 불안정한 구도의 사진을 찍다니. 나는 페리가 바라보던 풀을 완벽한 구도로 찍었다. 페리에게 보여 주려는 데 벌써 길을 건너 가게 안 한 구석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따라 길을 건너 오자 페리가 중얼댔다.
“저 꿀벌 타일을…. 지난번에도 고민만 하다가 못 샀거든요. 이번에도 그럴 것 같은데. 집에 걸어 둘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요. 뭐 조금 더 생각해 보죠.”
“꿀벌? 저걸 어디 걸게요? 거실? 화장실? 귀엽긴 한데 포르투 느낌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더니 금세 미련 하나 없는 얼굴로 돌아섰다.
“사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가게로 들어갔다.
“가방에 넣어 드리죠. 나중에 까먹지 말고 얘기해요. 제가 가져가면 안 되니까요. 나중에 부쳐드려도 되긴 하지만.”
“저 쪽으로 갈까요?”
페리는 관광객들이 가는 쪽과 정 반대쪽으로 난 길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단정하고 소박한 아줄레주 성당이 있었다. 포르투의 어느 골목에나 관광객이 가득했지만 페리가 안내하는 골목은 한적하고 여유롭다.
“이런 길을 어떻게 다 아는 겁니까?”
페리는 별 것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고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