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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극장Ⅰa

소설 : 북쪽의 도시들 Northern cities | 10

by 성게를 이로부숴

일요일 아침, 밤 새 켜져 있던 태블릿이 뜨거웠다. 커튼을 열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상쾌한 겨울 공기와 함께 온 시내의 교회의 종소리가 들렸다. 나는 함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종탑에 올랐다.


교회 근처 작은 카페에서 햄과 달걀이 들어간 베이글을 먹고 필터 커피를 마셨다. 그 후에는 시내로 돌아와 시청사를 둘러보고 전쟁과 화재로 무너진 성당을 구경했다. 유럽 여행이란 아마도 오래된 교회를 둘러보는 일이다. 석조 뼈대만 남은 무너진 교회에는 여느 성화와는 다른 현대적인 예수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거대한 종탑에 매달린 종들을 직접 연주하는 라이브 공연이 시작 됐다. 언젠가 제단이었을 돌계단에 앉아 눈을 감으니 꿈속 여름 정원에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미술관에서 본 C.D.F의 그림이 떠올랐다. 사람이 별로 없어 무너진 터는 제법 분위기가 있었다. 무너진 교회는 뚜렷한 입구가 없어 사방이 입구이자 출구였다.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들으며 북해의 바람을 맞았다. 북쪽의 바람은 바이올린의 찢어지는 화음과 오케스트라의 북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로키가 말했던 거대한 엘프필하모니 호텔 바에서 맥주를 마셨다. 잔잔한 항구의 물결이 닿은 거대한 크레인과 아파트 만 한 크루즈들이 들어선 거대 독 풍경을 보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유 탐정이 아이스커피를 들이켜듯.


‘유 탐정이라면 불멸을 거부할까?’


그는 이미 영원의 찰나, 그 여름 정원 속에 있었다. 로키가 끌고 온 인영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꿈에 불과한 장면들이 의미를 가질 만큼 나는 이 사건에 깊숙이 몰입해 있었다. 아침 일찍 뮌스터로 출발하기로 정했다. 오리너구리 앱을 열어 페리의 추천 코스를 살폈다. 함부르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을 잘 보내고 싶었다.


‘Brücke 10, 최고의 노르트제크라벤 버거! 석양이 지는 시간 추천, 시간이 있다면 근처 선착장에서 배 투어를 하는 것도 좋음.’


겨울바람이 불었다. 작은 다리를 건너 물 위에 떠 있는 운하도로를 걸었다. 단 며칠이었지만 이 도시에 꽤 오래 산 것 같았다. 북쪽 도시의 겨울, 벌써 하늘이 뉘엿뉘엿한 색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심심하구나.”






제각각 인 교회의 종소리들이 섞여 들렸다. 프루스트가 말한 ‘마차 위의 종탑이 멀어졌다 교차한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영영 잃어버린 시간. 그것을 추억할 수밖에 없다면 분명 슬플 것이다.


‘오페라 좋아해요? 벌써 뮌스터로 가고 있는 건 아니죠?’


반가운 로키의 문자.


‘나 시간 많아. 마침 저녁 시간이 비었네.’


‘좋아요. Don Giovanni Premiere, 7시, 함부르크 슈타트오퍼.’


‘다른 공연은 없어?’


‘오늘 볼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요.’


사실 작품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볼 수 있는 공연이 있는 것이 중요했다.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사실 별로 없다. 여행이란 우연과 타이밍이 주는 순간을 기꺼이 누리는 일. 커다란 의미에서 인생이란 것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항구의 크레인들에 여러 색의 불이 들어왔다. 미색으로 반짝이는 별들이 시시하게 보였다. 만약 조물주가 된다면 하늘에 총 천연색으로 빛나는 별들을 띄울 것이다.


오리너구리에 올라온 가게를 찾아가 페리의 추천 사진대로 주문했다. 연어를 주사위 모양으로 커다랗게 썰어 빵 사이에 잔뜩 쌓아 올린 북해의 버거와 빵을 바가지 삼아 북해에서만 잡힌다는 작은 새우들을 가든 퍼 올린 버거 두 개를 받았다. 빵가루가 떨어지는 것 정도는 신경 쓰지 않게 되는 맛이었다. 적당히 달달한 함부르크 맥주를 마셨다.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것이 억울할 정도로 맛있는 북해의 새우는 이 도시의 사는 사람들이 몽땅 소비한 것이 분명하다.


한 겨울밤의 하얀 파라솔, 전 세계의 컨테이너가 쌓인 항구, 운치 있는 크레인 불빛, 잔잔하게 흐르는 북쪽의 바닷물. 홀로 앉아 스스로를 위로하기 좋은 풍경이었다.


‘극장 앞에서 볼까?’


메시지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어 로키 안녕, 난 지금 슬슬 그쪽으로 가려는 데.”


밖을 걷고 있는지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해서요, 지금 트레이닝 복 차림 이라든가 그렇진 않죠? 별로 상관없긴 한데.”


나는 고개를 숙여 차림새를 확인해 보았다. 지난밤 로키의 모습과 비교하면 현저히 추레한 모습이긴 했다.


“어, 일단 트레이닝 복은 아니야. 호텔에 들렀다 가기엔 시간이 빠듯해.”


로키는 말을 꺼내 놓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혹시나 잠옷 같은 트레이닝 복이면 아무래도 좀 주목을 받을 테니까요.”


“그래 너도 노랑 트레이닝 복은 입지 말고 와.”


로키가 소년처럼 웃었다. 로키는 알면 알수록 사회생활의 떼가 덜 묻은 천진한 녀석이란 느낌이었다.


“극장 앞. 알겠어.”





여행객들이 쓸쓸한 선착장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 혼자 항구를 걷는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삼삼오오 모여 먹고 마시는 우쭐한 얼굴들. 사람은 혼자이기 때문에 위축된다. 페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추천한 식당에서 새우버거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습니다. 페리 아니었으면 몰랐겠죠. 참, 뮌스터에 곧 방문하려고 합니다. 맛있는 곳 있으면 또 알려줘요. 그럼 좋은 저녁 보내요.’


모르는 소리들이 주는 이국적인 감상에 젖어 전차를 타고 내렸다. 곧 비가 내릴 것이다. 독일 겨울 하늘은 개어 있다 가도 눈 깜짝할 새 복숭아 털 같은 빗방울을 날렸다. 신선 코너의 매끈한 콜라비가 된 것 같았다.


황금색 기둥사이로 호박색 불빛이 가득 켜진 오페라 극장의 커다란 창으로 턱시도를 입은 들뜬 표정의 남자들과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차분한 표정을 한 여자들이 걸어 다니는 것이 보였다. 유리를 반듯하게 엮고 황금색 장식을 곁들인 모던한 오페라 극장은 클림트의 그림에 조명을 비춘 듯 회색의 도시에서 빛을 발했다. 마네퀸처럼 창가에 늘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벌써 오페라 공연이 시작된 무대처럼 보였다. 유리 글라스를 천천히 여 닫는 소리, 은 쟁반에 담긴 정갈한 스낵, 머리를 매만진 중년 신사들, 처녀 적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와 자랑스럽게 장성한 자녀들. 나는 풍요로운 도시의 세계로 건너갔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말끔한 로키가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로키를 흘끔 보고 지나쳤다. 전혀 모른다는 태연한 얼굴이 얄미울 정도로 반듯하다. 로키를 따라 봄처럼 포근한 극장의 로비로 들어갔다.


샴페인을 마시며 안부를 묻는 사람들과 자못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논의하는 사람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 껴안으며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서있었지만 아무도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옷을 맡기고 돌아오니 헐벗은 채로 동떨어져 서운한 느낌이 들 때쯤 로키가 샴페인 잔을 건넸다. 옆에 있던 노 신사가 함께 축배를 들어주었다. 지금껏 옆에 서 있었음에도 내게는 한 마디도 걸지 않던 그는 로키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냈다.


노 신사와 로키를 따라 몇 개의 층을 올랐다. 복도를 걷던 사람들이 각자의 좌석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로키가 어느 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여깁니다.”





무대와 오케스트라가 한눈에 보이는 3층, 무대를 향해 돌출한 테라스에 앉으니 매우 중요한 관객이 된 것 같았다. 옆 테라스에는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작은 공연용 망원경으로 무대를 보고 있었다. 곧 극장은 밀물 때의 해변처럼 가득 찼다. 사람들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각오를 다진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등장했다. 이윽고 오페라 서곡이 울려 퍼졌다. 서서히 밝은 조명이 무대를 비췄다. 나는 내 속 깊은 무엇인가가 왕성한 호기심에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떤 빛에도 끄덕 없이 검은 그림자의 한계를 끊어낸 우뚝 선 인간.’


찬란히 빛나는 저 조명 가운데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인간은 과연 신에 가까울 지도 몰랐다. 모든 것을 비추고 가감 없이 드러내 눈을 멀게 만드는 빛.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 흥분되어 몸 어딘가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유로운 봄 나비처럼 주인공이 등장했다. 나는 그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로키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백발의 남자가 칼에 찔려 죽었다. 운명적 타의로 죽임을 당한 남자[1]는 너무나 거대해 옮길 수 없는 고목처럼 무대 귀퉁이에 쓰러져 누워 있었다. 돈 조반니의 시간은 서곡과 함께 흐르고 있었지만 죽은 남자의 시간은 영원처럼 멈추었다. 레포렐로는 카탈로그[2]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1003명의 이름을 모두 머릿속에 외운 비상함으로 관객을 내려다보았다. 간드러진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옥타비오[3]는 본능적 유혹자인 돈 조반니를 절대 따라갈 인물이 안 되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화음을 맞춰 노래하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8월의 하루만큼[4]도 싱그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사랑스러운 꽃에 내려앉아도 꿀을 빨아내는 데 성공하는 봄의 계절만을 사는 나비. 그 승리의 화신인 돈 조반니의 몸짓에는 태초의 인간이 마음껏 누리던 그 청포도 같은 신선한 자유가 있었다. 시간은 영원한 봄에 멈추었고 극장의 관객들은 한 겨울 매서운 항구의 바닷바람을 잊고 꽃이 만발한 쾌적한 대기를 만끽했다. 관객들은 돈 조반니가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저 우울한 여인에게서 도망치기를 바랐다. 이 따스한 유혹의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우아함을 상징하는 엘비라[5]는 이미 완벽한 사랑의 패배자였다. 그녀가 영원한 유혹과 한 순간의 복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무엇을 고를지 분명했다. 모두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쌍한 그녀가 도덕이라는 고리타분한 띠를 띠고 구슬픈 얼굴로 겨우겨우 무대를 돌아다니도록 둘 뿐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돈 조반니를 멈춘다면, 관객 중 누구라도 무대로 뛰어올라 그녀를 끌어내릴 것이었다.


돈 조반니는 죽은 남자의 묘지에 세워진 석상의 엄포[6]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감정과 도덕을 내세워 그를 벌하는 힘은 천하의 유혹자에게는 겨우 우스운 협박에 불과했다. 그러한 터무니없는 죄명을 볼모 삼아 장엄한 목소리로 아무리 꾸짖은 들 돈 조반니는 굴하지 않는다. 어느 때고 돌아오는 봄날의 승리를 확신할 뿐, 죽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거센 돌이 돈 조반니의 유연한 허리를 꺾는다 하더라도 그는 기꺼이 그러도록 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경고 따위에 아랑곳없이 수천번이나 승리했으니까.


돈 조반니는 마침내 석상이 내민 손을 잡고 무대 중앙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나는 그의 그림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걸어서 무대를 나갔다. 돈 조반니는 다시 향기로운 꽃 사이를 마음대로 누빌 것이다.


“배우들 인사를 보러 갈까요? 공연을 기념하는 자리가 있거든요. 무대를 정리하고 배우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뭐라도 더 마시러 가죠.”


열렬한 환호 속에 막 막이 내린 극장의 황홀경이 젖은 내게 로키가 물었다.






로키를 따라 중앙 홀로 나왔다. 첫 공연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관객들 사이에서 무대의상을 채 갈아입지 않은 배우들이 공연을 축하하고 있었다. 돈 조반니의 홀에서 벌어진 축제는 역시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브닝드레스와 턱시도 사이를 걸어 바에서 맥주를 시켰다. 로키는 극장 관계자들 사이에 서서, 여러 사람들과 포옹을 나누며 반가운 인사를 했다. 내 쪽을 보며 그 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대 위의 사람들이 허물없이 다가와 왁자지껄한 인사를 하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르는 것 같았다. 별안간 사람들이 계단 쪽을 향해 외쳤다.


“Bravo! Brava!”


돈 조반니와 도냐 안나, 옥타비오, 그리고 가장 거만한 몸짓으로 레포렐로가 등장했다. 나는 돈 조반니의 발끝을 찾았다. 홀의 샹들리에가 워낙 여러 방향에서 비추었기 때문에 그의 발끝에 매달린 움직임을 찾지 못해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로키가 나를 끈질기게 보고 있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돈 조반니의 움직임에 집중한 나는 서서히 그에게 다가가기에 이르렀다.


“Ach, Mann, Bitte?”


하인의 얼굴로 관객 앞에서 돈 조반니에게 연신 굽신거리던 레포렐로의 얼굴에 절대 참지 못하겠다는 불쾌함을 띈 노기 등등 한 표정이 올랐다. 로키가 다가왔다. 나는 돈 조반니의 발끝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 앞에 서 있던 레포렐로에게 그만 부딪혀 버리고 만 것이다. 로키가 싹싹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만…. 공연 정말 좋았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그에게 사과했다. 레포렐로는 이 무례를 용서할 수 없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이번만은 넘어가겠다는 표정으로 홀에 마련된 작은 무대로 올라갔다. 순간 얼굴이 붉어졌지만 돈 조반니의 움직임을 좇느라 잊어버렸다.


“로키, 출연진들을 잘 아나 봐. 극장에 자주 오는 정도로 알게 된 사람들 같진 않던데.”


“살면서 음악가 몇 명을 알게 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잖아요.”


로키에게 손을 흔들던 어떤 성악가는 매우 자부심이 강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방금 전의 실수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노골적으로 로키에게만 작별을 고하고 간이무대 뒷줄로 물러갔다.


“확실히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지요. 타고난 재능이 그런 걸 어떡하겠어요. 왜냐면.”


로키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미 로키의 잔은 거의 비어 있다.


“아시다시피. 음악 쪽 예술인들이란 파우스트 적이라기보다, 돈 후완 적인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니까요. 절대 나쁜 뜻이 아니고,”


로키가 잠깐 멈추더니 내가 잘 이해할 것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돈 주앙[7]과 같다고 합시다. 누구나 한 번쯤 돈 후안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 테니까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마음으로 일생을 보내겠다 이미 결심한 사람들. 그야말로 감성의 화신이자. [8] 순간의 최후를 재현하는 데 온 삶을 헌신적으로 바치는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숨 한번 쉬지 않고 이어 물었다.


“오늘의 돈 조반니에게 특이 사항이라도?”


나를 안심시키는 척 의중을 뜨려는 듯 말끝을 얼버무렸다.


“혹시….”


환호 속에서 막 공연 소감을 밝힌 돈 조반니의 얼굴에 플래시가 터지며 그림자가 졌다 사라졌다. 막 자른 레몬 색의 샹들리에 불빛 각도가 원인인 것 같았다. 돈 조반니가 무대 뒤로 물러서자 그의 그림자가 언뜻 레포렐로의 얼굴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나는 실망과 안도로 한숨을 내 쉬었다. 돈 조반니의 불멸은 죄인을 부르는 마지막 아리아 앞에 그토록 힘없이 무너져 내린 것인가. 그런 허망한 심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난 내일 뮌스터로 갈 거야.”


로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빈 잔을 받았다.


“이거 가져다주고 올 게요.”


잔을 건네고 옷을 맡겼던 1층으로 내려갔다. 샹들리에 빛이 붉은 카펫 위에 싱싱한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극장 문을 나서자 차갑고 습한 겨울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방금 전까지 봄날의 꽃밭을 거닐 듯 따스하던 극장 안과 실제 계절의 차이를 실감했다. 겨울인 것이다. 그것도 북쪽 바닷가의 겨울. 파도를 얼려버리는 바람이 부는 겨울. 흘러내린 용암이 바다 앞에 굳듯,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가 아우성치며 굳었다.


“로키, 나에게 꼬박꼬박 형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존댓말도 그렇고 말이야. 편하게 해 편하게.”


로키는 그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내일 출발한다는 거죠? 마지막 일지도 모르니까 함부르크식으로 인사를 할까요?”


“마지막이라니. 목요일에 뮌스터로 온다며. 아니야?”


“목요일에 제가 뮌스터에 도착하는 것은 맞지만, 그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그림자는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고, 형도 나도 그 그림자를 따라다니고 있으니까요.”


“그림자가 무슨 짓이라도 한다는 거야? 또 이상한 소리를. 혹시 저번에 준 책 장르가 스릴러야? 범죄?”


“자, 함부르크식 안녕을 합시다!”


로키가 팔을 어깨로 툭 치며 앞장섰다.






호박색 램프를 켠 작은 바의 오래된 원목가구들이 반들거렸다. 마법사처럼 구불구불한 회색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가 반갑게 맞았다. 그는 눈에 띄는 멋진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북쪽 바다 식 보드카로!”


그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로키 나는 맥주로.”


“맥주도 좋죠. 맥주도 한 잔!”


로키 녀석은 보기에도 강골이지만 술을 마시는 데는 더 그런 모양인 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가까이 앉은 중년 남자가 어디서 왔느냐 물었다.


“코리아? 사우스 노르스?”


그리곤 커다랗게 웃어 젖혔다.


“농담이야 농담. 아니지. 그래도 우리 쪽에선 궁금하니까.”


나는 로키에게 작게 속삭였다.


“독일 인들에게 동쪽, 서쪽 출신 인 지 묻는 건 실례인가?”


“남한과 북한은 아직 하나가 아니고, 독일은 이제 하나니까. 그건 이제 여기서는 국적의 문제가 아니죠.”


“그렇군. 여기서 되물으면 민감한 문제가 될 수도 있겠어.”


내가 대꾸를 않자 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잠수함 같은 주방 문이 열리고 멋진 스웨터의 남자가 나왔다. 손에는 작고 투명한 잔 2개가 있었다. 잔 위에는 무언가로 덮은 듯 뚜껑처럼 생긴 것이 걸쳐져 있다. 보드카 잔에 뚜껑이 있을 리 만무했다.


‘불을 붙이는 건가?’


옆에 있던 사람들이 잔을 보더니 앞다투어 같은 것을 주문했다. 회색 수염을 기른 남자는 호쾌하게 웃더니 다시 주방문을 밀고 들어갔다. 오래된 작은 바란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부터 찾아들어 한데 뭉쳐 좁은 시간을 보낸다. 바에서 마시는 동안은 바의 시간이 흐른다. 오후 열 시에 찾아오든 오후 세시에 찾아오든 그 바의 시간대로 흘러가게 두면 그만이다. 장소 란 시간을 움켜쥐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이 함께 잔을 들었다. 얼떨결에 그 작은 유리잔을 들었다. 로키가 뚜껑을 덥석 집어 입에 넣고 씹더니 보드카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손에 잡힌 뚜껑은 축축하고 물컹거렸다. 그것은 축축한 물고기 살이었다.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청어를 삼키려 애썼다. 도저히 넘어가지 않아 보드카를 들어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로키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등을 치며 격려했다.


“좋아요. 그거예요!”


도저히 안 될 것 같던 청어 덩어리를 보드카 속에 담가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어 삼켰다. 부끄러운 꼴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꾹꾹 눌렀다. 일단 위 속으로 집어넣으면 그다음 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엄지를 치켜 세우며 맛있느냐 물었다.


“네. 네. 맛있어요.”


주방 문이 밀리더니 커다란 쟁반에 청어뚜껑을 닫은 작은 유리잔들이 다시 서빙 됐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잔을 집어 들고 청어를 마셨다. 로키가 재빨리 잔을 낚아채 내밀었다.


“한 잔 더?”


“내려놔.”


방금 짠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입을 깔끔히 헹궈내고 싶었다. 청어의 기운은 맥주 한 잔을 거의 다 마실 때쯤 에야 잊혔다. 위와 장에 별다른 감각세포가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지 참 잘 만들어진 우리 몸의 구조에 새삼 감탄하며 고소한 맥주 맛을 즐겼다.






바깥은 겨울밤에 잠겨 상쾌했다. 바의 시간을 넘어 다시 도시로 넘어온 것이다. 골목에서 찬 바람이 불었다. 뜨뜻한 술기운에 덥혀진 얼굴에 닿아 사우나에서 나왔을 때처럼 개운했다. 로키가 자전거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해서 극장 쪽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지금 자전거 타면 안 돼. 그냥 두고 가는 게 어때? 내일 찾으러 오면 되잖아.”


“안 돼요. 이 쪽으로 올 일이 없거든요. 출근할 때 타고 가야 해요.”


“내일 그냥 전차를 타. 자전거 두고 가.”


녀석은 한사코 자전거를 가져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로키, 절대 타면 안 돼. 그건 음주운전이야. 그러다 큰일 나. 혹시 다른 사람을 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제법 근엄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로키가 뒤돌아 서더니 해죽 웃었다.


“절대 안 타요. 이거 끌고 전차 탈거에요.”


“전차에서 내리면 타려고?”


로키는‘뭘 그렇게 걱정을 하냐. 절대 안 탄다. 그리고 안 취했다.’는 뻔한 소리를 하며 극장 맞은편에 세워 둔 자전거 자물쇠를 풀었다.


“절대 타지마. 방심하면 안 되는 거야. 그림자가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데. 지금.”


로키와 나는 전차 정거장 앞에 섰다. 로키는 자전거를 자신의 몸에 기대 세웠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저씨가 있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잠자코 있었다.


“그 사람은 늘 돈 조반니를 보러 옵니다. 주변 극장에서 돈 조반니 공연이 있으면 반드시 오죠. 그리고 누구보다 만족한 얼굴로 극장 문을 나갑니다. 그렇다고 그가 연극을 보러 오는 것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내내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거든요. 어느 날 그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는 어떤 책 구절을 써 주었습니다. ‘영원한 찰나’에 대한 구절이었는데, 그는 ‘욕망과 욕망의 대상은 함께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또 그들 탄생의 의의는 그들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이 분리되었다는 데 있다.’고 하더군요.”


기분이 좋았기 때문인지 아리송한 로키의 말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 말은 아주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욕망과 욕망의 대상은 같이 태어난다는 말은 맞는 말로 들려. 그 사람 잘 들리는 거 아냐? 말을 걸었다며, 그건 어떻게 들었겠어? 로키, 너무 허술했어.”


정거장에서 차를 기다리는 동안 몸이 식었는지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나는 옷깃을 세우고 탐정처럼 매서운 눈으로 로키를 쳐다보았다. 로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이 맞아요. 그는 내가 말을 걸었을 때 단번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다시 말을 걸었을 때는 입 모양을 보더군요. 그가 뒤돌아 갈 때 다시 한번 불렀는데 낌새를 느끼지 못하고 길을 건너가 버렸습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지도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 그를 귀머거리라 했습니다. 극장 관계자들도 십 수년간 돈 조반니 첫 공연을 반드시 보러 오는 그를 알고 있었지요.”


나는 헛수 작은 됐다고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오늘도 봤어?”


로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안 왔다고? 로키, 진짜 그만해.”


정거장 불이 깜빡였다.


“오늘 새로운 관객이 왔으니까요.”


전차가 들어왔다. 일 순간 주변이 고요한 정적에 휩싸인 듯 사위가 잦아들었다. 심장이 뛰었다. 마치 고대하던 일을 바로 눈앞에 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반드시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그림자에 집중하면 반드시 쓸모없는 속임수에 속아 넘어갈 겁니다. 그림자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국 당신의 인생을 허황된 순간에 멈춰버릴 겁니다. ‘찰나의 영원’이 과연 행복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결론 밖에는 내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만 썩어가는 몸뚱이에 속임수 같은 즐거움을 끼얹을 뿐 아닙니까. 거기에서 불멸을 얻은 들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럼 안녕히. 좋은 여행 되십시오.”


로키는 작별을 고하듯 전차에 올라탔다.







[1] 도냐 안나의 아버지. 돈 조반니와 결투 중 죽음을 맞음.

[2] 돈 조반니 오페라 중 레포렐로가 부르는 곡 이름 참고.

[3] 오페라에서 옥타비오는 테너. 돈 조반니는 바리톤.

[4] 옥타비아누스 황제는 8월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며, 30일이었던 8월을 31일로 늘였다. 참고로 7월은 카이사르의 달이다.

[5] 돈 조반니에게 유혹을 당한 후 그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귀족여인, 속으로는 돈 조반니를 잊지 못하고 있다.

[6] 도냐 안나의 아버지가 묻힌 묘지에 세워진 석상. 그는 석상이 되어 돈 조반니에게 복수를 하러 찾아온다.

[7] Don Juan은 돈 주앙(영미식)/ 돈 후안(스페인식)으로 발음할 수 있다.

[8] 쇠렌 키에르케고르 ‘이것이냐 저것이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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