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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스트할레 (A)

소설 : 북쪽의 도시들 Northern cities | 7

by 성게 Mar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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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찬찬히 둘러보자고요.”


미술관은 커다란 중앙계단을 따라 2층으로 이어지고 거기서부터 화살표를 따라 숫자가 붙은 방 번호를 따라가며 관람하는 구조다. 그림자에 대해 빨리 알고 싶었다. 어떤 방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로키는 몇 개의 방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로키, 로키! 어디 가요? 이야기가 더 있는 거 아닌가? 그 그림 말이에요.”


로키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찾아봐요. 직접 단서를 찾았을 때 느끼는 전율, 그런 걸 제가 뺏을 순 없으니까요. 한 3시간 뒤에 밑에 카페에서 볼까요?”


로키가 아침부터 쓰고 있던 니트모자를 벗어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 넓은 미술관의 어떤 그림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전시실의 구조? 역사? 영어로 된 안내문을 다 읽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 귀찮다. 로키는 내게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추리할 시간을 주었지만, 사실 빠르고 간편하게 답을 알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포르토의 분홍돌고래 빛 빌라 정원에서 페리를 찾아 숨바꼭질을 한 것처럼 서서히 간격을 두면서 로키를 따라가는 방법도 있다. 유칼립투스 나무 밑에서 발견한 페리. 그렇다면 로키는 어느 그림 앞에 서 있을까? 나를 떼어놓으려는 로키를 몰래 따라가 손쉽게 ‘그림자 이야기’를 알아낼 생각에 금방 태연한 얼굴이 됐다. 


“로키는 어디로 갑니까?” 


“글쎄요. 먼저 가시죠. 그러면 저는 어느 방이든 다른 곳으로 들어가죠.” 


내 속셈이야 훤하다는 얼굴로 여유를 부리고 섰다.


“그런 식이면. 좋아요…. 3시간. 3시간 뒤에 보자고.” 


로키가 다시 대칭의 입꼬리를 쭉 밀어 올렸다. 






처음 보는 사람과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관심이 없는 쪽에겐 열정에 찬 상세한 설명일수록 곤욕이다. 이틀 간의 파리 여행에서 하루를 오롯이 루브르에 쏟거나, 구시가지 구경을 포기하면서 교외의 미술관을 방문하는 일이 이유 없이 어떻게 가능한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오래된 도서관의 고대 장서들을 소개하며 흥분하는 일과 똑같다. 읽을 수도 없는 글자들은 처음의 몇 분의 호기심을 끝으로 운명을 다할 것이다. 차라리 누구나 맛있다고 하는 레스토랑에 줄을 서 식사를 하고, 멋진 석양이 떨어지는 곳에서 사진 한 장을 남기는 편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공정했다. 어떤 때에는 함께 바라보고 있기 껄끄러운 장면 앞에 멈춰 있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나는 첫 번 째 방, 첫 번 째 작품을 시작으로 ‘그림자를 읽어버린 사람’의 실마리를 찾아갔다.


<단서>

함부르크

여행자

회색코트를 입은 사람

잃어버린 그림자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수첩을 꺼내 앞으로 이 미술관에 걸린 이 많은 작품을 어떤 관점으로 살펴볼 것인지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함부르크 -> 독일 작가들을 중점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어느 시대인가? 

(*시대는 상관없음. 하지만 이런 말이 더욱 의심스러움.)

여행자 -> 제목에‘여행’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여행객 차림? 너무 광범위함.

회색코트를 입은 사람 -> 악역인 듯 보이지만 함정일 수도 있다. (적어도 페리는…)

잃어버린 그림자 -> 그림자를 그린 그림이 있을까? 그림자가 없다. 있다?


첫 번 째 방을 지나갔다. 두 번째 방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코앞에 있는 그림이었다면 3시간이나 필요하지 않지.


‘로키도 허술해. 3시간이라는 건, 여기서부터 어느 정도 둘러봐야 한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이 전체 규모를 봤을 때, 적어도 중간 즈음일까? 아니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작품들을 스쳐 지나갔다. 로키는 어디에 있을까. 헤어질 때 지었던 미소를 보았을 때 녀석은 내가 따라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바로 그 그림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어디선가 전혀 상관없는 그림을 감상하는 척하다가 그리로 가겠지. 아니면 내가 발견할 때까지, 3시간 동안 줄곧 어딘가 다른 방을 돌아다닐 것이다.






미술관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 사방에는 창이 없고, 문이 없이 여러 갈래 방과 방으로 방향이 이어져 있다. 벽은 모두 비슷한 색깔이고 그림이 배치된 방을 기억하더라도 처음 관람이라면 어떤 방을 넘어서 또 다른 방에 왔는지 까지 자세히 기억하기 힘들다. 나는 되도록 그것들을 기억하면서 방을 넘어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워낙 작품 수가 많은 데다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넘어가는 통로가 여러 갈래여서 잠깐만 다른 생각을 하면 어디로 넘어오게 된 건 지 헷갈리기 일쑤였다. 다행히 작품들은 커다란 틀 안에서 시대와 연대별로 정리가 되어있는 고전적인 방식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듯 휘몰아쳐 만든 폭풍 같은 작품들도 결국에는 시간순으로 색인된다. 영원할 것 같은 현재를 풍미하던 작가들의 작품들도 이제는 미술관에 쌓여 연도별로 정리되어 점점 앞 쪽 방으로 옮겨진다. 공간을 무한히 확장할 수 없는 만큼 지금이야 비교적 끝 방에서 만날 수 있는 앤디 워홀도 몇 백 년 후엔 이 미술관의 중간 어디쯤의 방에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거대한 미술관에서는 가장 끝 방 즈음에 다다르면 왠지 발걸음이 빨라지고 이 방만 끝나면 저 좋은 바깥 하늘 아래로 햇살을 받으러 나갈 생각에 설렌다. 이 작품이 과연 얼마큼 오래 기억될지 나도 모르게 의심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현대미술 작품 앞에서는 왠지 냉랭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닐까. 그것은 오늘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의 수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사라져 버린 이름 모를 그림들의 수에 비하면 현저히 적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몇 백몇 천년의 경쟁률에 비하면 오늘의 경쟁자 수는 가소롭다. 


아등바등 살고 있는 오늘의 나를 몇 백 년이 지났음에도 살아있는 저 그림들이 거만한 포즈로 바라보았다. 이런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의 가치는 오늘 살아있는 대부분의 인생들보다 크게 매겨진다. 평생 일해도 저 그림 하나를 살 수 없다. 우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들 앞에서도 예의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지나다닌다. 행여 너풀거리는 옷에 걸려 그림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아찔했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들은 모두 죽었는데 도대체 그림에 걸린 돈은 누가 가져가는 거야.‘


보다 꼼꼼한 관람을 하기 위해 미술관 지도를 펼쳐 지하 쪽 방으로 내려갔다. 2층으로 올라오는 중심 계단에서 시작하는 방들을 몇 개 둘러보다가 허를 찌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하얀색으로 칠해진 통로를 지나 역시 사방이 흰색으로 칠해진 계단을 따라 끝까지 내려갔다. 몇 분이나 온통 흰색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지났더니 시간과 공간감각이 사라져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간에 띄엄띄엄 걸린 그림들. 그 사치스러운 공간감. 앞에 서기만 해도 눈물이 차오르는 감동을 주는 작품도 있지만, 마음이 건강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약효가 있으려면 이만큼의 거대한 공간감이 필요하다. 마음 편히 머리 하나 누일 곳 없는 사람들에게 이 거대한 건물은 그 자체만으로 감동이다.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넓은 공간을 마음껏 누볐다. 희고 검은 무늬로 놓인 대리석과 그리스 식 신전 기둥이 세워진 동그란 홀이 나왔다. 생생한 조각들 조용한 홀에 부딪히는 발소리를 의식하듯 지그시 눈을 내리 깔고 각각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지중해의 봄 볕을 받는 기분이다. 문득 혼자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있는 거대한 조각상의 얼굴이 보였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허공에 손을 내 젓는 그는 커다란 소리로 울부짖었으나 진공의 적막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나는 그림자가 없는 그 조각상을 보고 뒷걸음쳤다. 관리인이 다가와 주의를 주었다. 그는 손을 뻗어 동판화가 가득한 방으로 안내했다. 


복도 끝까지 3개 정도의 방이 남았을 때, 나는 어딘가를 향해달려 나가는 그림자가 선명하게 찍힌 그림 앞에 멈추어 섰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그림자를 그린 초현실주의 작품이었다. 왼쪽하단에는 서명이 매우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수첩에 g. di. Chirico를 써넣고 그림 옆에 붙은 작품 해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돌연 다른 작가의 이름이 걸려있다. 결과적으로 그 그림은 유명한 ‘모작’이었다. 왜 남의 그림을 모작했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적의 없이‘그의 모작’을 바라보았다. 분명 금전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그림은 거대한 미술관의 한 방을 하지하고 있다. 필멸의 시간이 이 그림을 여기에 불러들였다.


만약 우리가 늙지 않고 영원히 아름다운 시절에 멈춰 불멸한다면, 초상화나 사진, 조각은 모두 불필요해질 것이다. 나는 영원히 시간이 멈춘 그림들을 지나다녔다. 황금빛 꿀 색의 맥주잔에는 방금 누군가 들이켜 부드러운 거품아 타고 흘러내렸다. 햇살이 통과하는 얇은 유리 화병엔 방금 만든 하늘하늘한 꽃다발이 담겨 있고, 하얀 도자기에는 오늘 아침까지 걸려있던 훈제한 돼지 넓적다리 덩어리에서 막 썰어낸 붉은 햄이 먹음직스레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는 깔끔하게 손질한 탱글탱글한 굴이 껍질 채 쌓여 있는 정물이 걸려 있었다. 플랑드르 풍의 화랑이었다. 그 방들은 로키 말 대로 문이 없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길었다. 


1시간 반 즈음 지났을까 수첩에는 빽빽이 그림과 작가의 이름이 적혔다. 미술관에 있는 그림을 모두 다 외워버리려는 열성적인 예술학도로 보였는지 한 할아버지 한 분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수첩을 지긋이 보더니 빙긋 웃으며 손에 걸치고 있던 간이의자를 흔들며 말했다.


 “이걸 가져오면 더 좋을 텐데. 아래층 로비에 가면 빌릴 수 있어요.”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마음을 여는 노인에게 왠지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사실 어느 방에서 인가 중국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 앞에서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괜히 기분이 이상하던 참이었다. 


“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괜찮습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자를 들고 구부정한 걸음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르누아르의 커다란 그림 앞에 천천히 의자를 펼치고 앉아 고요히 그림 속 미인을 바라보았다. 레몬색 스웨터를 입은 노인과 햇살에 반짝이는 초 여름날의 부드러운 그림자가 방을 채웠다. 


너무나 빠르게 여러 그림을 보며 집중했기 때문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약속한 3시간 까지는 겨우 3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구석 소파에 앉아 수첩 속 리스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냉정한 관점으로 작품들을 지워 나갔는데도 여전히 속 시원한 답이 보이지 않았다.


Munch – 세 여인 모두 그림자가 없음.

Rembrandt – 명암이 너무 확실함. 그림자 진함.

Franz Nölken – 위협적으로 그림 앞에 나온 사내. 그림자 유무 알 수 없음.

Jean-Baptiste Regnault – 천사. 그림자 x. 회색 옷 악마.

Alfred Rethel – 남자 그림자 x.

Jens Juel – 함부르크를 그림. Binnenalster in Hamburg?

Jacob Gensler – 회색 옷, 모자. 선한 눈망울.

Carl Rodeck – 함부르크 미술관 로비. 수상함.

Oskar KoKoschka – 회색 옷 남자.

Herbert Spngenberg – 어두운 함부르크 운하.

Ferdinand Hodler – 무한을 바라보며, 벌거벗은 남자. 그림자 x.

Ferdinand Georg Waldmüller – 지나치게 영리해 보이는 얼굴. 빛. 명암.

Adolph Menzel – 벽에 걸린 신체부위, 죽은 말의 머리

Friedrich Wasmann – 어딘지 낯익은 얼굴. 누구지?






“로키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창밖으로 앳된 얼굴을 한 자유분방한 무리가 건너편 유리건물로 몰려갔다. 어차피 세 시간 만에 모든 방을 다 돌아볼 수 없다. 다리도 아프고 목이 마르다. 마침 벌거벗은 몸으로 상어를 탄 남자가 해변의 파도를 가로지르는 그림 앞에서 심한 갈증이 일었다.


“저기 건너편에 보이는 유리건물은 뭡니까?” 


“저긴 가장 최근의 작품을 모아둔 가장 컨템퍼러리 전시관입니다.” 


고전 작품 전시실보다 훨씬 북적거렸다. 설치 작품과 영상 작품이 많아 소란스럽다. 전시실 사방으로 해가 들어 역시 방향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이 방 저 방 보이는 대로 로키를 찾아다니다 붉은 커튼을 배경으로 빅밴드와 피아니스트 사이에 선 남자가 끊임없이 노래하는 방에 들어섰다.

 

‘Sorrow conquers happiness.’ 


‘슬픔이 결국 모든 것을 삼킬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슬픔이 그 모든 것을 삼키기 전에 세상에서 사라지겠다.'

 

다음 방의 커튼을 열고 들어가니 커다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기차가 달려갔다. 푸른색 하늘이란 처연한 희망인가. 붉은 커튼 방보다는 어느 정도 낙천적이었으나 그 푸른 색깔처럼 깊숙한 슬픔을 간직한 희망이란 게 이루어져도 과연 행복할지 답할 수 없어 슬펐다. 


작품을 보는 쪽에서 무슨 생각을 하든 던진 자는 과연 책임이 없어야 했다. 해석에 따라 자유와 절망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작품들과 불순한 의도를 담은 생각이 사물이 된 것들은 어디에나 넘쳐난다. 장트파울리의 외설적인 포스터는 금지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자유 란 그 정도의 것이 아니다. 해로운 메시지이기 때문에 차단되어야 한다면, 모든 사람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누구의 입을 막음으로 해결책을 찾는 어리석음이여. 세세한 내면을 파고들면,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단 하나도 남지 않는다. 마음속을 문지르면, 누구의 것에서나 더러운 때들이 득실득실 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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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아슬아슬하게 목요일 연재 시간에 맞췄습니다. 휴우-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에 도착했군요. 

임은의 여행은 계속됩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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