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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ka's Eck 에리카의 모퉁이

소설 : 북쪽의 도시들 Northern cities | 9

by 성게를 이로부숴

로키와 두 시간 뒤 다시 도시 운하 쪽 시내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급히 센트럴 역으로 향하는 S철도에 올랐다. 알스터호수를 지나는 동안 어딘 지 우울하고도 담담하게 서 있는 남자의 허전한 등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 머릿속은 언제부터 그림자에 뒤덮여 있었을까.

그는 왜 뮌스터로 갔을까.

애초에 나는….

페리는 왜.’


여러 가지 생각이 순서 없이 뒤엉켰다. 혼자서는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었다. 다이히토어 미술관에서 우연히 알게 된 로키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페리와 로키 둘 중 누구를 믿어야 한다면.’


혹시 로키가 사기꾼 이거나 나를 이용해 어떤 범죄라도 저지르려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둘 다 어떤 사람인 지 명확히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키 말마따나 내 그림자는 안전했고, 정말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림자를 빼앗기는 것 외에 더 큰일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그림자를 빼앗기는 일은 좀체 두렵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겨우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무엇을 얻을 수 있지?’






독일 겨울 해는 상상보다 일찍 기울었다. 오후 세시, 벌써 뉘엿뉘엿 굽어져 밤이 섞인 바람을 내뿜는 하늘은 분 단위로 온도를 내렸다. 축축하게 달라붙는 차가운 물속으로 서서히 잠기듯 안개비가 내렸다. 가로등 빛이 뿌옇게 번졌다. 가루 같은 물방울. 우산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기에 가득 섞인 물 알갱이들은 조금이라도 건조한 표면에 닿으려 이리저리 손을 뻗어 달려들었다. 검은 구름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 비 입자들이 도시를 감쌌다. 호텔에서 레인코트로 갈아입고 노트북에도 방수케이스를 덧 씌웠다. 사방에서 스며드는 안개비에 젖기라도 해서 사진이 날아가 버리는 일 같은 건 없어야 했다. 로키는 무슨 요원이라도 되는 걸까. 다부진 체격과 능청스러운 말솜씨, 주변을 살피는 날카로운 시선, 지금껏 보인 태연함을 보아 비밀요원 이어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겨우 그림자를 좇는 조직이라니 우스웠다.


‘Sternstraße 98.’


로키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북적이는 퇴근길 전차 속으로 올라탔다. 전차 옆으로 자동차와 자전거가 지나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많았다. 건강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시각, 페리도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새하얀 전등을 밝힌 전차역에서 내려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비는 레인 코트 모자 속 얼굴로 파고들 만큼 가로로 내렸다. 속눈썹이 젖어들었다. 노트북이 든 가방을 소중히 쥐고 휴대폰 액정을 훔쳐가며 몇 번 골목을 꺾었다. 갑자기 탁 트인 사거리에 붉은색 네온사인이 떠올랐다.


‘Erika’s Eck’


가죽 재킷을 입은 덩치 좋은 사내가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큰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다.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한 듯 얼굴과 목이 붉었다. 우락부락한 사내가 친절하게 옆으로 비켜섰다.


“bitte schön 비테 쉔!”


홀 중앙은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각양각색의 병으로 빼곡히 채워진 바가 차지하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 진열대가 소시지와 치즈, 계란 등이 올라간 수수한 빵들로 가득했다. 취한 사람들의 가열찬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축제 날처럼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잔뜩 흥이 오른 사람들 사이에서 바깥에서 젖었던 옷이 벌써 말라가고 있었다. 로키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 고민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붙잡았다.


로키는 정말 비밀요원처럼 보였다. 젊은 여자들이 로키를 쳐다보았다. 로키를 따라 홀 적당히 밝으면서 또 이 공간에서 적당히 동떨어진 깊숙한 모서리 벽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여긴 지금부터 내일 오후 두 시까지 영업을 합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해도 아무도 쫓아내지 않아요.”


로키는 겉옷을 벗어 구김을 정리하고 벽 등 옆에 있는 옷걸이에 말끔히 걸었다.


“자 그럼 뭘 좀 마시죠. 저녁도 먹어야 하고요. 여기 음식은 정말 다 맛있어요.”


후회 없이 천진한 그 미소가 부러웠다.


“사실 뭐든 맛있었던 것도 당연하지요. 여기에 올 정도면 이미 만취해 배가 무지 고픈 상태였거든요.”


사람들은 서 있거나 걸터앉아 있거나, 바에 기대어 있거나 내키는 대로 아무 자리에나 앉아 먹고 마셨다. 울고 웃는 사람들이 뒤엉킨 모습은 어느 책 속에서 보았던 중세 시대의 어느 축제 한 장면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탁자들이 줄 지은 거대한 광장에서 몇 천몇 명의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뿐인 수프 축제를 즐긴다. 냄비 속에 처박힌 사람, 만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수프 그릇 속에 머리를 처박은 사람, 기울어질 정도로 높이 쌓은 수프 그릇을 옆에 두고 또 수프를 먹고 있는 사람, 그 수프를 만드느라 지친 사람, 수프를 먹고 있는 사람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웃는 사람, 강아지와 함께 수프를 먹고 있는 사람, 울면서 수프를 던지는 사람, 수프를 얼굴에 뒤집어쓴 사람. 그 책 속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찾고 또 찾아도 새로운 표정을 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렸을지 상상이 안 됐다. 작가는 혹시 여기에 와 보았던 것은 아닐까. 밤새 이 바에 앉아 얼굴을 그린다면 어느 정도 채울 수 있다.


“여기 분위기는 정말 자유롭군요. 여기서는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게 볼 것 같지 않은데요.”


“클래식이 나오다가 카니발 주제가가 나오고, 또 그러다 하드록이 나오고 느릿한 쿨재즈가 나옵니다. 정신만 잘 차리면 하루 밤에 모든 장르의 클럽에 다녀온 듯 한 기분이 들 겁니다. 뭐 정신을 놓아도 그렇죠.”


우리는 진지하게 메뉴를 살펴보았다. 로키는 애피타이저로 화이트 포르토와 문어다리 샐러드, 나는 따뜻한 맑은 비프 수프와 맥주를 시켰다.

“그러니까 페리 때문에 이 여행을 결심한 거란 말이죠?”


로키가 화이트 포르토를 한 모금 마시고 손을 들어 탄산수 한 병을 시키며 말했다. 로키는 검은색의 얇은 스웨터 속에 시간 속의 분, 분 속의 초, 초 속의 초를 셀 수 있는 가볍고 실용적인 스포츠시계를 차고 있었다. 나무 시계를 차는 페리와는 전혀 딴판의 사람이다.


“맞아요. 그렇지만 꼭 페리 때문은 아닙니다. 그냥 여행을 하고 싶었던 거죠. 사실 누구 때문에 이런 긴 여행을 결심하겠습니까.”


로키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누구의 탓으로 돌린다면, 페리라는 사람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자기 결정에 대해선 언제나 자기 자신을 원망해야죠.”


“로키는 왜, 또 언제부터 그림자를 쫓아다닌 겁니까? 나야 이런 일이 생겼다 치더라도. 아, 혹시 로키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내가 깨달은 듯 스스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로키가 코웃음을 쳤다. “


“아니요. 전 그림자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누구나 경험하기 전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림자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어요. 아시겠습니까?”


“죽어요? 그림자를 빼앗길 뿐 아닙니까?”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림자와 죽음의 교환이라니 억울했다.


“걱정 마세요. 때가 되면 모두 유예 없이 죽으니까.”


로키의 말에는 단호한 경고가 서려 있었다. 기분이 나빴다.


“로키,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맞습니다. 의외로 제대로 알고 있군요.”


로키는 건방진 데가 있었다. 마침 격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저녁의 술집이었다.


“자기 입장을 이야기할 때는 조금 더 조심할 필요도 있어요.”


“미안합니다.”


로키가 너무 순순히 사과를 했다.


“내가 사과를 받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말을 편하게 할까요? 먼저 이렇게 말해서 좀 실례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정말 인연이고.”


“좋아요.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여기선 다 이름을 부르는데요. 저기 할아버지에게도 그렇죠. Ach Walter! Wie geht’s!”


로키가 느닷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섰다. 수염까지 하얗게 물든 백발노인이 다가왔다. 나는 어쩔 줄 몰라 일어섰다. 노인이 오랜 친구를 반기듯 손을 내밀어 로키의 손을 잡았다. 몸짓으로만 보았을 땐 꼭 20대 청년들 같았다. 로키가 나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여기는 한국에서 온 임은, 여기는 내 친구 발터!”


“안녕하세요. 미스터 발터.”


그는 감히 미스터란 호칭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죄송스러울 정도로 연세가 많은 노인이었다. 그가 노인 특유의 거칠고 몽실몽실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쥐고 흔들었다. 미스터 발터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술 한 잔 사지. 여기!”


익명조차 숨긴 채 유명 관광지만을 돌아다니는 관광객이 아닌 이 도시에 오래 산 사람들처럼 이 홀에 녹아들고 있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뜨뜻한 비프수프와 함께 위스키가 잘도 넘어갔다. 로키는 이번에도 아름다운 솜씨로 문어다리를 잘랐다.


“이건 도미와 비슷한 맛이 납니다. 가자미 구이도 맛있고, 장어 수프도 괜찮아요.” 여기 청어 절임이 맛있어요. 그리고 저건 고등어를 갈아서….”


“랍스카우? 그건 이제 안 먹어. 청어도.”


주 요리를 기다리며 음악을 듣고 있는데 시계 알람 소리가 울렸다. 로키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버튼을 눌러 껐다.


“무슨 알람인가? 로키는 바쁜가 봐…?”


로키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운동할 시간이에요.”


“무슨 운동?”


“뛰어요.”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에도?”


“그럼요. 비 내리는 날 안 하면 운동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을걸요.”


“부지런하네. 그런데 말이야. 회색코트를 만나면 어떻게 할 거야? 아니지, 잃어버린 그림자를 찾는다면?”


“잃어버린 사람들이 문제가 되겠죠? 애초에 일부러 줘버린 사람들이니까. 어느 날 미술관에서 그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해봤어요. 혹시 원래 그림 속에는 그림자가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로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이 그림자 이야기가 재미있어. 그렇지만 이제 장난은 그만해.”


나는 밀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로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손에 부러 질 듯 가냘픈 유리잔과 레드 와인을 병 째 가지고 돌아왔다. 로키는 커다란 손으로 그 가느다란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 노려보듯 눈을 부릅뜨고 입으로 기울였다. 나는 그런 모습을 어디선 가 본 적 있었다. 나와 페리를 따라 겨울 테라스에 앉았던 그 낙엽색 코트였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전 그 사진이 궁금할 뿐이니까요. 임은 씨가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하지 않아요.”


로키가 나이프를 대자 흰 접시에 붉은 살코기 육즙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시간은 아직 초저녁일 테 였지만 이 모퉁이 바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 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미 새벽녘 같은 홀은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로키는 진지하게 메뉴를 넘기더니 아이스크림 디저트를 주문했다.


“단 걸 좋아하는 건 둘 다 비슷해.”


나는 가방을 열고 두 겹으로 싼 노트북을 꺼냈다. 믿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거짓말이었다. 나는 회색코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금세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림자의 기운을 느끼며 서서히 온몸이 마비되는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몸의 장기가 그런 식으로 서서히 멈춰 죽음에 이른다면 죽는 것도 그렇게 무서운 일이 아닐 거라고. 모든 사람이 원하는 평온한 죽음이란 그런 것일 거라고. 어쩌면 그림자의 얘기 란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여행을 계속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답은 간단했다.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


그것도 이렇게 환대받는 여행을. 어디를 찾아가도 외롭지 않은 여행. 내게 고향이라는 말은 필요 없었다. 고향에서도 모두가 환대를 받는 것은 아니니.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향이라는 것이 있긴 할까. 어느 산부인과에서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태어나 부모의 직장에 따라 한 두 번 이사를 하고 나면, 고향은 사라지고 몇 년인가 더 오래 산 동네만 남을 뿐이다. 모두 서울로 올라가려고 아등바등하다 이내 뿌리내린 경기도 어느 지방에서 중년을 맞이할 것이다. 내게 돌아갈 고향이 있나. 태어난 곳은 별 힘이 없다. 그 동네로 돌아간 들 누가 반겨줄까. 그럴 사람이 남아 있긴 할까.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나를 기억할까. 당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이가 아직 그 동네에 남아 있는가.






로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로키는 어느 나라 사람인 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70년대 록음악이 나왔는데 로키 말 대로 세련된 쿨재즈가 흘렀다. 로키의 얼굴에는 나와 닮은 사람들과 미스터 발터를 닮은 사람과,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곳의 사람과 닮은 얼굴이 있었다.


“사진을 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어?”


“아, 이 사람이 페리군요.”


로키는 페리의 얼굴을 가리켰다.


“아닌데?”


일부러 태연한 척 거짓말을 했다.


“아니에요? 계속 페리라는 사람이야기를 하니까요. 이 사람이 페리 란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아쉽군요.”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여자 둘이 우리 쪽에 인사를 건넸다. 로키가 몇 마디를 하니 곧 테이블을 건너올 태세였다. 로키가 이야기를 끝내는 동안 나는 노트북을 켜고 괜히 이 사진 저 사진을 열어보며 집중한 척 잠자코 있었다. 진이 떠올랐다.


“그림자는 어떤 물질이 반드시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신이 있다면, 그에게는 그림자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내 물음은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다시 로키의 시계 알람이 울렸다. 내가 시계를 쳐다보자 로키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소매를 걷어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흥겨운 홀에서 시간을 재는 시계 알람은 꺼. 난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 시계 때문에 휴가가 한 시간 한 시간 사라져 가는 걸 알고 싶지 않아.”


로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매를 걷어 순순히 버튼을 눌렀다. 알람을 끄는 모양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 영혼 같은 걸까? 영혼에게 그림자는 없겠지. 하지만 내 사진엔 그림자 같은 것이 있어. 그렇다면 거기에는 만질 수 있는 무언가 가 있었단 말 아닐까?”


로키가 와인을 마셨다. 잔에 따른 와인이 금방 줄었다. 젊은 로키는 부러울 정도로 맛있게 와인을 마셨다.





“자 이 사진을 봐.”


로키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물을 마셨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로키를 두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로키는 화장실에 가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생각에 잠겨 홀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불현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 사진은 확실히 흥미롭습니다. 처음 봤을 때 어떤…. 흐물거리면서도 움직이는 듯 한 인상을 주는군요. 하지만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그 느낌이 점점 흐려집니다. 하지만, 역시 잃어버린 쪽을 찾아가는 게 낫겠습니다. 칠칠치 못하게 자기의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니 상대가 더 쉽지 않겠어요? 단서를 많이 남겼을 겁니다. 무섭거나 두렵거나 억울해서라도. 어쩌면 과시욕일 수도 있고요.”


“난 내일이라도 뮌스터로 출발할 수 있어.”


“내일 좀 곤란합니다.”


로키가 일정을 좀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로키는 이 도시에서 일상을 사는 사람이었다. 여행자는 일상을 사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된다.


“목요일쯤 뮌스터로 갈 수 있을 거예요. 먼저 출발하시죠.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고요.”


로키가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소책자를 꺼내 건넸다.


“이건 독일어잖아. 난 전혀 못 읽는데.”


“여기서 구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에요.”


“이건 놀리는 거야. 그렇지?”


로키가 크게 웃었다.


“오래 여행할 거라면 독일어를 배워 보는 건 어떻겠어요? 어차피 시간이 많잖아요.”


“그것도 놀리는 거야. 난 실컷 놀려고 온 거라니까.”


“놀고 만 살 수는 없잖아요. 모름지기 탐정은 다재다능한 편이 좋은 겁니다.”


사람들은 울고 웃던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러 에리카의 홀로 밀려들었다. 여행자에게 하루 란 그저, 내 오감에 감상을 전하는 일정 밖에 없다. 피곤하지도 얽매이지도 않는 단신의 시간, 생각할수록 열 뻗치는 지겨운 일도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일도 없다. 멀리서 관조하는 여행자로서 바라보는 낯선 일상은 아름답다. 누군가에게는 나의 일상도 이토록 이국적인 낭만이었을까.





홀에 바이올린 푸가가 흐르던 즈음, 나는 깊은 밤에 담가진 에리카의 모퉁이 앞에서 로키와 헤어졌다. 관능적으로 벌어진 바 앞에 서서 로키는 다짐시키듯 말했다.


“이 세상에는 빛과 어둠을 곧장 이분법으로 나누어 하나는 아름답고 하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단 그림자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건 어떤 사람들 그대로의 자신이고 제 생각엔 그것은 스스로 떼어내든 타의로 그렇게 되든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가 된다고 확신합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들을 되는대로 많이 알아보면 좋을 겁니다. 예를 들면 도펠갱어 이야기라든가,”


“도펠, 뭐?”


“도펠갱어, 독일어죠. 복제되어 걸어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한 사람의 또 다른 분신 같은 존재입니다. 마주치면 죽는다는 이야기는 아마 사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림자란 것은 불멸 또는 죽음의 유예에 가깝다고도 생각하거든요. 두 번째 사람, 즉 그림자를 떼어 내고 온 세상을 자유롭게 다니는 일은 신과 똑같은 영원을 향한 인간들의 오래된 갈망이니까.”


나는 그제야 내가 왜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는지, 그것에 대해 생각할수록 오히려 더 깊은 잠 속에 빠져 드는지 알았다. 나는 불멸로 가는 그림자 의식을 본능적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림자를 떼어내는 일은 내 안의 한 부분, 훼손할 수 없는 한 부분을 반드시 갈라 쪼개 내는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을 불완전한 존재로 격하시키고, 무한한 찰나의 영원 속으로 합류하는 거죠. 그 세계에 대해 저는 아직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세계가 있다고 믿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비에 젖은 로키의 반듯한 이마가 에리카의 모퉁이 조명에 빛났다. 로키는 강하고도 간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으슬으슬하게 젖은 옷을 벗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정돈된 침대 시트와 매일 새것으로 교체되는 수건, 첫 장이 세모로 접혀 있는 화장지 같은 것이 주는 감각은 한 곳에 오래 머물수록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낯선 향수를 느끼며 영영 이 신선함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윤이 나게 닦인 세면대 거울을 바라보았다.


‘영영 이 신선한 상태로.’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보다 영원에 가까운 상태인가. 침대에 누워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를 찾으려 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찾지 못했다. 불멸의 정보가 그렇게 공공연하게 게시되어 있을 리 없었다. 앞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안개 같은 단서들이 아른댔다. 결국 탐정소설을 몇 권 샀다. 책 앞 뒷면을 스캔한 표지에 어릴 적 좋아했던 유 탐정의 명대사가 있었다.


“탐정의 혈관에는 피가 순환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깨달은 때문입니다. 탐정의 혈관에는 강철이 돌아야 합니다!”


단단하고 반듯한 로키가 떠올랐다.


‘이 밤 그 녀석은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을까.’


금강산 도승 해월이 서해안 어딘가 에서 생굴을 까먹는 장면을 보다 잠들었다.



‘유 탐정은 손탁선생[1]의 아이스커피를 한숨에 쭈욱 들이키고….’


꿈속에서 나는 유 탐정과 나란히 그의 정원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한 여름날 쏟아지는 햇볕에 정원의 꽃대들이 대차게 솟아 형형색색의 빛깔로 피어 있다. 유 탐정은 시원한 리넨 양복을 재킷을 문 앞 옷걸이에 걸어 둔 채 흰 셔츠에 베이지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섬세한 듯 강한 손으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파이프를 물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악마인가, 인간인가?”


“네? 무엇이.”


“그것은.”


유 탐정이 나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냉정한 근심이 서려 있었다.


“해월은 절대로 은몽 씨를 해하지 않으리다! 그러나…….”


“네? 선생님 당최 무슨 말씀이신 지….”


“그것은 검붉은….”


유 탐정이 오후의 정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으려는 데, 문이 부서지고 나무 마루를 쿵쿵거리며 밟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코트를 입은 키가 후리후리한 남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 얼굴 없는 인형처럼 늘어진 인영을 서재 안으로 던져 밀었다. 로키의 깨진 머리와 진흙탕에서 구른 듯 한껏 더러워진 코트에서 항구의 비 냄새가 났다.


“로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로키는 유 탐정을 노려보았다. 유 탐정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떠올랐다. 그의 얼굴 속 반짝이는 눈에 지금껏 단지 의문만을 품었던 사건의 전말이 불현듯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유 탐정과 로키, 나는 정원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커피에서 여름 꽃 향기가 났다.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마신 로키가 일어나 여름 정원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로키를 따라갈지 유 탐정과 함께 서재 마루에 앉아 있을지 고민했다.


“가시오. 이 사건에 당신이 빠져선 안되지.”


유 탐정이 새하얀 파나마 모를 벗어서 부채질하며 스틱으로 구두코를 툭툭 쳤다. [2]


‘로키의 자동차는 마치 총소리에 놀란 참새처럼 후닥닥하고 한번 커다란 엉덩이를 들썩하더니 저릿저릿한 속력을 내어 점점 깊어 가는 밤공기를 칼로 베듯이 날아간다.’


이윽고 유 탐정이 실크햇에 모노클을 쓴 신사의 모습으로 말했다.


“ ‘탐정은 어떤 인물이라도 의혹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탐정학 제 1과의 교훈을 잊지 마십시오. 자 그럼.”


그에게 악수를 청했지만 그는 내 악수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네퀸처럼 생각에 잠겨 정원을 바라보며 아이스커피를 들이켰다. 유리잔 속 얼음이 커피에 녹으며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반복되는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름 정원의 키 높은 꽃들을 헤치고 로키가 사라진 정원으로 들어갔다.










[1]

Marie Antoinette Sontag,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 고종황제에게 커피를 소개한 사람.

독일인 손탁은 고종이 재위하던 시기 황실전례관 (Hofzeremonienmeisterin)으로 일했다.


[2]

김내성 소설 <마인> 중.






작가의 말 :

아이쿠. 죄송합니다. 금요일입니다. 목요일 연재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원고를 완성해 놓고 다른데 정신이 팔려있다 깜빡 놓쳤습니다.

모두 안녕하시길 늘 기도합니다.

저는 임은의 여행에 계속 동행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그럼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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