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북쪽의 도시들 Northern cities | 11
전날 달무리가 지더니 북풍이 몰아쳐 눈이 내렸다.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마치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역사에서 기차 시간을 확인 하고 카페로 들어가 몸을 녹였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기운이 돌았다.
플랫폼으로 오르는 계단 밑에 한 사람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피하면 좋을 지 망설이는 데 바로 앞의 사람 까지만 해도 간절한 표정으로 울상을 짓던 사람이 내게는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지나치고는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가 다시 울상을 지었다.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바지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확인하고 있던 차였다.
그 자리에 서서 그가 혹시 돌아오지는 않을까 기다렸지만 전혀 상관 없다는 듯 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내가 느끼는 기분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플랫폼 아래의 빵집에서 프란츠브뢰첸을 샀다. 어젯밤, 로키는 잘 들어 갔을 것이다. 만약 자전거를 타다 얼음 바닥에서 미끄러지더라도 상처 없이 벌떡 일어날 녀석이니. 함부르크식 안녕을 잘 하지 않았나.
“목요일에 만날 텐데 뭐.”
기차 위에 포슬포슬한 하얀 눈에 쌓여 있었다. 찬 공기를 들이 마셨다.
‘함부르크에서 그림자를 잃어버린 남자는 뮌스터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어떠한 단서를 남겼는데….’
칙.칙.칙.칙. 바퀴가 돌았다.
눈발이 거세 졌다.
기차는 철길을 달렸다.
백발의 차장이 표 검사를 했다. 그는 경쾌한 리듬으로 차표에 구멍을 뚫으며 승객들에게 기분 좋은 아침 인사를 건넨다. 오래된 이정표를 덮어버리는 큰 눈이 끝이 없는 평원으로 내렸다.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한 차례 안내방송이 울렸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커다란 나무가 철도로 쓰러졌습니다. 부득이 앞으로 도착하는 역에서 쉬어 가야 하니 모쪼록 승객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몇몇의 승객들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모두 휴대전화를 꺼내 연락하는 통에 객실이 다소 소란했지만 금방 고요를 되찾았다. 급할 것이 없는 여행자는 이런 일 즈음은 낭만적인 감상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눈으로 덮여 먼 지평선이 둥그렇게 떠올랐다.
기차는 점점 속력을 줄였다. 곧 눈에 파묻힐 것 같은 작은 역사가 나타났다. 문이 열리며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승무원이 이동하며 차가운 바깥 공기가 객실에 스며들었다. 미세한 엔진의 진동에 잠이 몰려 왔다. 몸이 허물어져 내리는 몽롱한 수면, 객차안에서 꾸벅꾸벅 조는 여행의 기쁨. 소곤대는 소리가 멀어져 어둠의 바다로.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것은 막연한 세상살이가 주는 피로감을 피할 수 있는 잠시의 환각이다. 쏟아지는 졸음을 내버려 두고 그림자에 대해 생각했다.
눈을 떴다. 창밖에 쌓인 하늘이 더욱 짙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혼자 하는 겨울 여행이 외롭진 않고?’
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뮌스터로 가고 있어. 눈 때문에 기차가 멈췄는데, 몇시간 동안 잔 것 같아. 여기가 어딘 지 잘 모르겠어.’
‘재미있는 일이 많았을 거 같은데, 다음에 꼭 자세히 얘기 해 줘. 참 사진은 생각해 봤어? 좋은 말로 할 때 하는 게 좋아. 여행 경비를 벌면서 놀란 말야.’
‘여행은 바쁜 일이란 말이지. 너무 바빠. 사진을 찍을 겨를이 없어.’
‘통장 잔고 확인해 가며 놀아.’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일단 내 이름은 올리지 마. 기한에 못 맞추면 곤란하잖아.’
‘어떤 사진이든 좋으니 보내줘 봐. 내가 고를게.’
‘기대는 하지 말고.’
‘기대 할거야.’
진은 그렇게 말하고 휴대폰을 덮어 버린 모양인 지 아무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직성이 풀릴 때까지 돌파하는 그녀의 성격상 나의 뜨뜻미지근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을 리 없다. 나의 인생의 의미를 걱정하는 사람은 어쩌면 그녀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페리를 만났다. 그리고 나는 긴긴 여행이 내게 어울리는 일임을 깨닫았는 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눈에 파묻힌 겨울 기차 속에 있었다. 독일 겨울이란 하늘을 보고는 시간을 알 수 없다. 그저 낮과 밤이 존재할 뿐이었다. 하루 종일 개와 늑대를 구분 할 수 없는 불안한 시간을 보내다 결국 늑대의 시간 뿐인 밤을 맞아야 하는 곳에 있다.
그림자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영혼에 대해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도 같았다. 영혼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감각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것이 그림자라면… 영원히 잃어 버린다면….’
‘애초에 영혼이란 게 뭔 지 그 누구도 정의를 내릴 수 없지 않은가.’
움직일 기색 없는 기차를 벗어난 몇몇 승객들이 눈 내리는 역사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코트를 챙겨 객실을 나섰다. 복도에서 솔솔 풍겨 오는 버터 냄새가 식욕을 돋웠다. 점심이나 먹기 위해 식당칸으로 갔다. 젊은이처럼 낭랑한 총기가 가득한 노인과 부딪혔다. 그는 내가 오는 줄 모르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연 모양이었다.
“이런, 미안합니다.”
일본식 억양이 섞인 말투로 그는 친근하게 내게 악수를 건넸다.
“사진작가 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런 계절에 그런 사진기 가방을 둘러메고 이른 아침부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란 대부분 그렇지요.”
“아, 네.”
“식사하러 가십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그는 매우 친근하게 물었다.
“생각보다 오래 멈춰 섰군요. 도이체반이란 늘 이렇지요. 늦거나 없어지거나. 둘 다 아니면 그건 이제 도이체 반이 아니지요.”
내가 알아 듣지 못하자 그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저먼엑스프레스 말입니다.”
그는 인상이 매우 맑고 호쾌한 노인이었다. 표정엔 결코 노인이라 할 수 없는 쾌활함이 있었다. 꼭 몇 백 년을 산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시종일관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신사처럼 행동했는데, 굳이 출입문 앞에 서서 내가 먼저 들어가길 권했다.
“아뇨아뇨. 먼저 들어가시죠.”
그는 친절과 겸손이 몸에 벤 듯 내가 몇 번이나 극진이 사양을 하자 문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칸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빈 자리가 없어 둘러보고 나가려는 데 그 노 신사가 다가왔다.
“같이 앉으시지요. 여기 자리 하나가 있는데요.”
그는 내게 친절히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내가 아무리 둘러보며 기다려도 종업원이 오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노 신사가 손을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종업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무언가 더 필요하십니까?”
“메뉴를 보고 싶습니다.”
종업원들은 매우 깍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슈니쩰이 맛있습니다. 기차 안이지만 먹을 만 합니다.”
그는 숫자들이 가득 들어 차 있는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꽤 큰 돈을 굴리는 사업가인 것 같았다. 오늘 안에 출발 할 수 있을 지 가늠할 수 없이 기차와 역사 위로 눈이 그득 내렸다.
“요즘에도 눈 때문에 기차 운행이 중단 되는 일이 있군요.”
그는 서류를 옆으로 밀며 말했다. 이야기 상대를 만나 좋아하는 노인들 특유의 불그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게요.”
“한국에서 왔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시아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지요. 여기 사람들은 눈치를 못 채지만.”
그가 동감하지 않느냐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사진은 좀 찍었습니까? 눈이 많이 와서 겨울 풍경을 찍기 좋았겠군요. 눈을 좋아 하지 않는다면 유감이고요. 올해는 대설이니까.”
“사실….”
그는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전 사진작가는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취미도 좋지요.”
“네. 뭐…. 사진은 제 직업입니다.”
“그러면 사진 작가가 맞군요. 사진으로 돈을 벌면, 작가가 맞습니다.”
그가 점잖게 웃었다.
“아, 전 류노스케 입니다. 퀸스틀러입니다.”
내가 못 알아 듣자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영어로는 아티스트라고 하죠.”
그가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쪽에서 더 묻지 않는 것을 흡족히 여기는 것 같았다. 대표작을 묻는 것이 실례라 생각하는 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떤 작품을 좋아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궁금하다면 그의 일생을 찾아 보면 된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이루 말 할 수 없는 여러가지 순간으로 매우 밀도 있게 이어지고, 누구나 그 수많은 시기들을 제각각 좋아할 자유가 있다. 만약 내가 로키나 페리의 이야기를 쓴다면 그것은 내가 말하고 싶은, 그리고 말 할 수 있는 사건의 편린일 뿐이다.
“함부르크는 어땠습니까? 마음에 들던 가요?”
그는 내 의견을 묻는 듯 하면서도 그런 것은 사실 아무 상관도 없다는 투였다.
“좋았습니다.”
“겨울 항구는 쓸쓸한 법인데 함부르크는 그렇지가 않지요. 사시사철 거대하고 화려한 크루즈 선들이 들어오니까.”
그는 화려한 함부르크를 잘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오페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함부르크에는 공연장이 많더군요.”
그의 마음에 들었는 지 노 신사는 서류를 더욱 창가 쪽으로 밀었다. 그렇게 밀려난 종이들이 차창 밖으로 밀려나 바람에 나리는 마술쇼가 떠올랐다.
“그렇죠. 테아터! 독일 여행이란 여러 버전의 오페라는 보는 재미가 있지요.”
그는 할 말이 매우 많아 보였다.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소스 없이 레몬과 감자 샐러드만을 곁들인 빵가루를 입혀 튀긴 돼지고기 요리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중년 여자가 레몬 즙을 뿌리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했다. 류노스케 씨는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그래, 어떤 오페라를 봤습니까?”
그가 아주 관심있게 물었다. 그는 내가 식사하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지켜보았다.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나 혼자 무언가 먹는 것이 조금 미안했다.
“식사 하셨습니까?”
“그럼요. 먹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제 뭘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맥주만으로도 그렇고. 걱정 말고 맛있게 먹어요.”
바삭한 슈니쩰을 잘랐다. 상큼한 감자샐러드와 레몬 즙 만을 끼얹은 고기가 아주 담백하게 어울렸다.
“돈 죠반니를 봤습니다. 인상깊었어요. 그 도입부가….”
“서곡은 최고지요.”
그가 묵직한 목소리로 확신에 차 말했다. 더 이상의 평가가 부질 없다는 듯.
“모차르트의 돈 죠반니는 영원히 연주되어야 하는 오페라입니다. 영원히 사라지는 일도 없겠지마는.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되죠. 그건 마스터피스니까. 영원 영원히.”
나는 잠자코 식사에 열중했다. 이미 돈 죠반니에 대해 그만한 열정을 가진 사람 앞에서 오페라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입장으로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이 없었다.
“돈 죠반니는 늘 승리자지요. 살아있는 승리의 상징이랄까.”
그는 내게 돈 죠반니를 더욱 확실히 각인 시키려는 것처럼 눈 속 깊은 곳을 보며 말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확실히 돈 죠반니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이 끝이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심코 한 대답에 류노스케 씨는 번쩍이는 시계가 옷 속에서 빠져나올 만큼 손을 들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요. 제대로 봤군요. 그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시작, 아니 지속이지요. 당신은 매우 똑똑한 젊은이구만!”
그는 나를 ‘영맨’이라 불렀다.
“이렇게 만나니 또 정말 반갑군요.”
“돈 죠반니 오페라는 유럽에서 더 인기가 많은가 봅니다.”
그가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알아 보는 사람만 보면 되는 겁니다.”
“매니아들 말입니까?”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니요. 매니아가 아니라,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 말입니다.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류노스케 씨의 말에서 묘한 비밀스러움이 풍겼다. 그것은 그는 돈 죠반니에 대해 사실은 더 말할 것이 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같은 우월감이었다.
“함부르크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던데 혹시 아십니까?”
나는 용감하게 운을 뗐다. 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에 걸린 그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매우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에는 조금 특이한 그림이 있더군요.”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예술가로서의 그의 자부심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속으로는 자신만의 높은 나무 꼭대기가 있다. 거기는 세상 모두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무풍지대다. 어떤 태풍이 오더라도 그 나무 꼭대기는 반드시 안전하다. 그것이 베어지는 날이 그 예술가의 마지막 날이다. 예술가란 죽음 이후에 어떤 평가를 받든 지 죽을 때 까지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다 가는 것이다. 예술가의 마음속에서 그 나무는 끝없이 자란다. 숲의 다른 나무들이 쑥쑥 자란다고 해도 결코 그 나무처럼 높이 솟아 오를 수 없다. 내가 스스로를 작가라 부를 수 없는 것은 그 나무 꼭대기와 관련이 있었다. 내 나무는 어느 순간 키 크기를 멈추어 주변의 숲 속에 파 묻혀 버렸다.
“그런 그림이 있습니까? 처음 듣는 군요.”
그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나는 그가 입에 돈 군침을 삼키기 위해 일부러 맥주를 집어 드는 것을 알아챘다.
“처음이요? 함부르크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로컬 바에서 만난 현지인에게 들었습니다.”
“그래 그게 뭡니까?”
그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함부르크 항구에 내린 그림자가 없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순간 아무 말 없이 돌처럼 멈추었다. 그러더니 별 것도 아닌 얘기를 심각하게 한다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까? 처음 들었군요.”
“아실 거라 생각했는데, 모르시는군요. 전 그 이야기가 왠지 돈 죠반니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쭐한 마음에 결정적 힌트를 준 것 같아 황급히 마지막 남은 고기조각을 먹고 부산스럽게 그릇을 옆으로 밀었다. 류노스케 씨는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누구죠?”
“친구입니다.”
“로컬 바에서 들었다고 했는데.”
그가 말꼬리를 잡아 캐물었다.
“아, 친구가 되었습니다.”
“혹시 이런 것 아나요? 젊은 친구니까 나보다 잘 알 수도 있겠군.”
그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젊게 보이던 모습이 간데 없이 눈을 아래로 지긋이 눌러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네오피디아 라고 하는데.”
그는 내게 한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보여주었다. 언뜻 프로필로 보이는 여러 사람들의 초상들과 이름, 연대 같은 것이 표시되어 있었다.
“아니요, 처음 봅니다. 이게 뭐죠?”
그저 목록처럼 나열된 초상과 이름 등이 나열 된 형식이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없었다.
“오, 처음이라고요. 그렇군요.”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휴대폰을 집어 넣었다. 다시 여유를 되 찾은 그는 매우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래, 그 이야기가 재미있던가요?”
로키가 해준 C.D.F의 그림과 어느 여행자의 이야기에 대해 더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이미 그것을 다 안다는 듯한 자세로 물었다.
“그림자 이야기는 매우 많지요. 그림자가 가르쳐주는 대로 했더니 수레 가득 금과 보석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는 옛날을 회상하듯 꿈꾸는 듯한 얼굴로 눈보라가 치는 차창 밖을 보았다.
“도펠갱어를 만나면 죽는다고 하지요? 그것은 떨어진 그림자를 다시 만나는 것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꼼짝 없이 죽는 것이죠.”
도펠갱어에 대해서는 로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하나도 놀라지 않자 그가 더욱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네오페디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가, 도펠갱어와 그림자에 대해서는 잘 아는 군.”
그는 다소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혼잣말 인 지 내게 대화를 걸고 있는 것인 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똑똑한 젊은이 인 것 같으니까….”
그는 가방을 뒤집어 작은 명함을 찾아냈다.
“내 아뜰리에지. 관심이 있으면 찾아오고.”
그의 모든 말이 반말이 되어 들렸다. 왜 그런 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은 이제 그렇게 밖에 들리지 않았다. 방금 전의 공손하고 겸손하며, 총기 가득한 신사적인 노인은 사라지고 자부심이 강한 늙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다시 혼잣말인 듯 말을 걸었다.
“그래 자네는 도펠갱어가 있나?”
“도펠갱어를 믿느냐는 말입니까?”
“그래 그래. 그 말이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본 적이 없으니까요. 보면 죽는다면서요.”
그가 탐욕스럽게 웃었다.
“그렇지. 그렇지. 만나면 안되지. 안전한 여행 하시게.”
지금껏 옆 테이블에 앉은 승객인 줄로만 알았던 젊은 여자가 일어나 류노스케 씨의 짐을 챙겨 일어났다. 무엇인가 속은 기분이었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 다음 칸으로 넘어가 보았다. 아무도 없이 통째로 텅 비어 있는 칸 뒤로는 특등석이 이어졌다. 자리로 돌아와 류노스케를 검색했다. 그는 근 십 수년 간 세계 무대를 휩쓴 수상경력이 화려한 조각가였다. 수많은 인터뷰와 작품리뷰가 있었지만 어디에도 그의 사진은 실려 있지 않았다.
그에게서 받은 명함을 안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래도 그림자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을 찾은 지도 몰랐다. 명함 속 아뜰리에의 주소를 살펴 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아뜰리에는 뮌스터에 있었다. 곧장 로키에게 류노스케 씨가 말 한 ‘네오피디아’에 대해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갈 때까지 그 아뜰리에게 가지 마세요. 그리고 네오피디아도 더 찾지 말아요.’
곧 전화가 걸려왔다. 로키가 이러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제대로 된 것을 찾은 게 분명했다.
“타고 났어. 탐정을 해볼까.”
일부러 뜸을 들이고 전화를 받았다. 로키는 다시 한 번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몇가지를 확인시키고 그러지 않겠다는 대답을 받고 서야 전화를 끊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여행을 떠났음에 쾌재를 불렀다.
떠나기 전엔 몰랐다. 나의 인생에 이토록 흥미로운 일들로 가득 차 있었음을.
작가의 말 :
여행... 어쨌든 돌아오는 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자, 이제 우리는 '거기서 페리를 만나 3편- 뮌스터.' 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