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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

소설 : 북쪽의 도시들 Northern cities | 6

by 성게 Mar 13. 2025

아침에 일어나 보니 로키에게 메시지기 와 있다. 오리너구리 앱을 열어보니 거기에도 로키의 메시지가 있었다. 


‘10시쯤, 라테 마일에서 만납시다.’ 


로키의 메시지는 딱딱하고 간결했지만 그의 얼굴처럼 반듯한 대칭이 주는 의심 없는 안정감 같은 것이 있었다. 간밤에 현란한 꿈을 꾸었는지 몸이 개운치 않았다. 습관의 상처가 없는 방이 주는 편안함은 겨우 이틀뿐인 모양이었다. 


느긋한 아침을 맞을 생각이었지만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니, 여행을 시작한 날부터 원하는 만큼 느긋한 휴가를 즐긴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착하자마자 밤을 새웠고, 그 뒤로도 계속 일찍 일어나 호텔방을 나섰다. 나가서는 누군가와 약속을 만들고 해가 저물도록 바깥을 돌아다니다 피곤한 몸으로 호텔에 돌아와 잠들었다. 나는 긴긴 여행을 홀로 하는 법을 몰랐다. 처음부터 혼자 있는 법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았는 지도 모르겠다. 


검색창에 Latte Meile를 복사해 넣으니 온통 독일어 페이지로 가득 찼다. 아무리 좋은 번역기라고 해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법이다. 인간의 언어를 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상을 맺어 그림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뇌에 거꾸로 찍힌 상은 옛날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자극을 한데 섞어내는 여러 가지 작용을 거친 후에야‘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로 번역된다. 아무리 해도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내버려 두고 결론을 도출해 내지 못한다. 새로운 냄새와 난생처음 보는 색이라도 이전의 사건과 반드시 연관해 낸다. 그 아무것 과도 연결되지 않은 ‘현(재의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어떤 인간을 탐구하려면 그 인간에 전체 생애를 조사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사소한 추억’은 죽음과 함께 노쇠해 사라진다. 


현재는 끊임없이 분화하고, 과거는 영원처럼 쪼개져 발산한다. 미래 란 그것들이 아무 경계 없이 합쳐진 무수한 벡터 속 무한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이다. 그러므로 현재에게 미래는 무한한 카오스로 그것은 어딘가 결론할 수 없는 곳으로 마음껏 향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래는 단지 관념이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과거 속에서는 살아있었을 내면의 사소한 취향 같은 것을 금방 까먹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또 문득,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몇십 년 후의 현재에 새삼스레 발견하기도 한다. 미래는 이토록 우연적이고 또한 운명적이다. 뇌를 카탈로그화 하면 그 어떤 환상소설보다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날씨가 매우 상쾌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청명한 겨울날이었다. 항구의 바닷바람 소리가 났다. 슈파이혀슈타트로 가는 녹색 철교에 좋은 날씨를 예고하는 웃는 얼굴이 걸려있다. 버스와 전철역을 찾느라 애를 먹었지만 이 도시가 훨씬 친숙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포르토의 태양이 그렇게 했든 모든 것의 정수리를 그득히 비추었다. 도시는 그림자 없이 깨어나고 있었다.


자유분방한 젊은 거리에 도착했다. 꽃을 잔뜩 안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전거 바구니마다 한아름 씩 실린 튤립과 장미,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다발들. 하늘은 파란색으로 점점 짙어졌다.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어 활짝 피어난 것들로 거리는 다채롭고 싱싱했다. 거리의 벽마다 여러 손으로 그린 그라피티가 가득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헤비메탈 락스타부터 힙합, 비즈니스 슈트 등 온갖 종류 것이 섞여 있었다. 지금 당장 사진을 찍어 보여주고 사진 속 그날이 어떤 시대인 지 말해 보라고 하면, 누구라도 정확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로키는 전날보다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푸르스름한 젊음. 내게도 로키처럼 어떤 젊음 다운 것이 뿜어져 나오고 있을까. 


“여기로 하죠.”


로키는 파리한 아침햇살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헤비메탈 사나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사나운 차림과 다르게 푸근한 미소로 우리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운이 좋네요. 여기 옆자리는 비었답니다. 이 라테 마일은 인기가 많거든요.”


“함부르크에는 무슨 마일이라고 불리는 데가 몇 군데 있어요. 예를 들면 ‘죄의 1마일’ 이라든가. 하지만 실제로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아요. 그렇게 부르려면 죄의 1마일이 아니라 몇 백 몇 천 마일 아니겠어요? 여기 전부.”


로키는 결 대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다린 것 같은 반듯한 이마. 로키는 어디 하나 구겨진 데가 없는 녀석이다.


평온한 거리를 향해 사진기를 들었다. 


“사진을 좀 봐도 될까요?”


“별 건 없지만.”


사진기를 든 로키의 손이 큼지막했다. 소년 같은 인상에 큰 손이 대조되어 더욱 막을 수 없는 패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사진을 하나하나 넘기는 모습이 진지했다. 쉴 새 없이 사진을 넘기더니 고개를 들었다.


“함부르크에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난 모양입니다.”


로키가 너털웃음을 짓고 있는 요한을 가리켰다.


“아, 어제 함부르크를 같이 둘러봤거든요.”


“오리너구리에서 만나셨나요?”


“그렇죠. 로키도 써요? 취향이 잘 맞는 동행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인데, 그 앱은 참 잘 만들어졌어요. 제작자가 사려 깊은 사람이라 그런지.”


로키가 개구쟁이 같이 웃었다.


“전 그 앱이 싫습니다. 제 머리로 생각해서 길을 고를 겁니다. 누군가 만든 기계가 추천하는 방식은 싫거든요. 우리에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잖아요.”


로키는 나이프를 들어 빵을 갈랐다. 부드럽게 버터를 발랐지만 그 동작이 너무 능숙해 오히려 위협적인 데가 있었다.


“그리고 선택이란 책임을 질 각오가 없으면 안 되는 겁니다. 누군가 아무렇게나 선택하게 뒀다가 바보 같은 결말이 났을 때는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사소한 것까지 항상 옳은 선택만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여행 중에 일어나는 모든 우연이 다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없다는 건 나이가 좀 차면 누구나 압니다. 그 앱엔 누군가 이미 가 본 길이 있어 더 좋은 선택을 하기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의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주, 정말 아-주 많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연과 우연 사이에 자잘한 일들을 직접 하는 건 스스로라는 걸 알아야죠.”


로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어딘가 분명한 과녁을 향해 사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런 사람은 중력이 센 별처럼 작은 별들을 끌어 모아 군림하며 주변의 별들을 보호하며 별자리를 지탱한다. 


“어제 엘프필 안 가봤 댔죠? 그리고 또….”


로키는 낙서가 뒤덮인 붉은 건물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서도 눈동자에는 힘이 있어서 시야에 닿는 여러 가지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함부르크 미술관도 좋아요. 발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 그런 곳이라고 할까. 스스로 건강상태를 체크하기 좋은 곳이에요.”


“건강상태요?”


로키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서서 몸 어딘가 떨리진 않는지, 어느 쪽으로 쏠린 건 아닌 지, 맥박은 올바른 리듬으로 뛰고 있는지, 심장은 잘 뛰는지, 또 얼마나 오래 서 있어야 다리가 아픈 지를 가늠할 수 있죠. 또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위치를 얼마나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지. 회랑 끝의 그림이 아직도 잘 보이는지….”


로키는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도전적으로 말했다.


“어떤 그림 앞에서 공포와 희열을 느끼는지.”


“로키는 겁이 많군요?”


“그래요? 겁이 많은 줄 알았는데요. 포르토의 그 다리 말입니다. 정말로 사람이 떨어진 적도 있어요.”


“거기 난간이 낮더라고요. 그나저나 그 미술관에 가고 싶은 거죠?”


로키가 목소리를 줄였다.


“거기는 좀 이상한 얘기가 많습니다. 그림에서 그림으로 뭔가 옮겨 갔다든가, 멀쩡히 걸려 있던 그림들이 아침마다 한쪽 귀퉁이만 같은 각도로 기울어져 있다든가. 또 막 복원한 그림 빛이 하루 만에 다시 바랬다든가.”


흥미롭다.


“정말? 그래서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그 미술관은 꽤 큰데, 한쪽엔 화랑과 화랑 사이에 문을 터서 연결한 긴 전시실이 있습니다. 한쪽 끝에서 보면 저기 멀리…. 한 백 미터쯤 될까? 처음부터 마지막 방까지 문이 쭉 트여 있는 거죠. 플랑드르 풍의 그림이 많이 걸려 있는 회랑인데, 혼자 있으면 난데없이 누군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린 단 말입니다. 전속력으로.”


“전속력으로?” 


팔에서 어깨로 소름이 올라왔다. 


“일어날 이유가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느껴지는 기묘함. 어때요. 재밌겠죠?”


“음…. 항구 쪽 엘프필, 보타닉 가든에 가볼까요?” 


로키가 눈치를 살폈다.


“보타닉 가든은 겨울이라 볼 건 아예 없어요. 시내구경? 아니면 수영장?”


느닷없이 수영장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커피는 방금 마셨고. 겨울 식물원은 황량할 테고. 수영은 하고 싶지만 당장 수영복이 없고. 시내구경은….”


 로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능글맞게 웃었다.


“시내에는 사람이 엄청 많을 겁니다. 관광지라 주말에는 주변 작은 도시에서도 꽤 사람들이 오거든요.”


“역시 미술관 가자는 얘기죠?”


로키의 눈이 하얀 새벽녘 달처럼 은은히 반짝였다. 






“사실은 더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그는 비밀얘기라도 시작하려는 듯 팔을 모으고 어깨를 숙였다. 커다란 덩치를 둥그렇게 말고 입을 작게 벌려 이야기를 시작하자 시선이 쏠렸다. 로키는 작은 목소리로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그림자를 잃어버린 남자의 얘기죠. 처음부터 편견을 가지면 안 되니까, 그냥 사람이라고 합시다.”


포르토에서 꾼 꿈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메모.’


로키 말 대로 고요한 미술관에서는 스스로 맥박체크가 가능하다. 붉은 꽃[1]을 마주한 인파로 북적이는 라테마일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음에도 귓가의 맥이 뛰었다. 냅킨에 묻은 커피자국이 검붉은 잉크처럼 파리한 겨울 햇살에 말라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긴 여행을 마치고 함부르크 항구에 도착했답니다. 그때도 프란츠브뢰첸[2]이 있었으면 아침식사로 그런 걸 먹었겠죠? 커피도 한 잔 했을 거고.”


“그런데 프란츠? 뭡니까 그건?”


“함부르크 식 시나몬 롤인데, 덴마크가 유래라는 얘기도 있고, 비엔나가 유래라는 얘기가 있죠. 어쨌든 지금은 함부르크 것이 가장 맛있어요. 하나 시킬까요?”


“이따가 미술관에 들렀다 먹죠.” 


“좋아요. 시대 상황은 지금으로부터 한 200년 전쯤으로….”


로키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함부르크라는 도시는 한자 동맹, 길드 알죠? 함부르크는 내내 북쪽 도시들과 남쪽 도시를 잇는 거점이었으니 어느 시대에나 주변 사람들에겐 이야기의 중심이 될 만한 도시니까…. 그냥 정확한 시대도 잊어버려요. 옛날 얘기는 정확한 시점이 없으니까.”


한참을 설명하더니 역사도 잊어버리라 덧붙였다. 


“알겠어요. 그런데, 방금 200년 전이라면 서요?”


“그게 이야기가 묘하단 말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이야기가 꼭 200년 전 일 필요는 없거든요.”


로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포르토에서 보았던 그 검붉은 잉크만큼은 선명히 떠올랐다.


“긴 여행을 마쳤으니 돈이 떨어졌을 거 아닙니까. 마침 전해야 할 편지도 있고 해서 이 도시 한 부자를 찾아갔답니다. 그 여행자에게는 찾아가는 사람이 부자인 지 아닌 지가 중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편지를 전해야 하는 게 가장 큰 이유였겠죠.”


“편지요?”


“네.”


“무슨 편지였는데요?” 


로키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커피 더 시킬까요? 기왕이면 프란츠브뢰첸이 있는지도 물어보고?”


“그래요. 있으면 먹읍시다. 그래서요.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편지도 잊어버려요.”


로키는 태연한 얼굴로 내 물음을 막고, 발표하는 사람처럼 점원을 향해 손을 들어 독일어로 무언가를 주문했다. 편지도 잊어버리라고 하고 시대도 잊어버리라고 하는 로키의 말을 되뇌며 미술관과 연결된 그림자, 그리고 포르토에서 본 페리의 노트를 이리저리 엮어보았다. 아무 연결고리가 없었다. 페리는 그것이 친구의 장난이라고 했고, 점과 선으로 만든 메모 귀퉁이의 토마토를 보여주었다. 그런 것들은 포르토의 햇살처럼 레몬 빛으로 가득한 유쾌하고 밝은 기억이었지만 그 잉크 색 만은 여전히 짙고 오묘하게 남아있다. 


“로키, 혹시.” 


로키의 눈썹이 꿈틀댔다.


“혹시, 그림자 색깔 같은 것도 있습니까?” 


“그림자 색깔?” 


로키의 눈썹산이 번쩍 올라갔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닫았다. 


“그림자가 검은색이겠죠 뭐. 편지랑 시대는 됐고, 부자를 찾아가서 어떻게 됐는데요?”


“이야기 속에는 붉은 장미와 보라 빛이 돌 정도로 진한 피 그리고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나옵니다.”





찬 바람이 뒤에서부터 몸을 감싸는 듯한 한기가 들었다. 밝은 겨울 아침, 구름도 없는 파란 하늘, 꽃을 안고 다니는 사람들, 자전거 벨소리, 커피잔이 컵받침에 부딪치는 소리, 자동차 엔진. 무서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페리의 검은 노트, 붉은 잉크, 그리고 페리의 ‘회색 코트….’


“계속 얘기해 봐요.” 


로키의 얼굴에 햇볕이 비쳤다. 그 눈동자는 햇볕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밝은 광이 돌던 페리의 눈동자.’


“부자의 집에서 그 여행자는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림자를 잃어버렸고요.”


“잃어버려요? 그림자를? 왜요? 아니 어떻게?”


“누가 싹둑 잘라 갔거나, 바닥에서 투두둑 뜯어 갔겠죠. 아니면 더 깊숙하고 짙은 그늘에 스스로 두고 왔던가.”


로키가 내 발 밑을 보았다. 괜히 이상한 느낌에 발 밑을 내려봤다. 로키의 그림자는 성실하게 붙어 리얼타임으로 따라다니고 있었다. 


“흐흐흐흐.” 


겁에 질린 사람처럼 부산스럽게 발 밑을 본 것이 머쓱해 웃었다. 


“그림자를 잃어버리는 건 무서운 일이 에요. 웃을 일입니까?”


“안 잃어버렸으니까요. 로키도 잘 붙어있고. 그래서 회색 코트 입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이야기에서는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다. 그렇지만 ‘회색코트’ 쪽이 궁금했다. 내 그림자는 멀쩡히 붙어 있고, 그렇다면 조심해야 할 것은 그림자를 앗아갈지도 모르는 놈의 정보다. 로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펴면서 말했다. 


“언제부턴가 악역이 주인공보다 관심을 받고 동정을 받는 시대가 됐다고요. 빌런은 빌런이지. 마음 약한 척 연기를 하는 놈들에게 언젠가 당할지도 모르는 스스로가 더 불쌍한 줄을 모르고….”


나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감정을 로키는 눈치채지 못했다. 나만큼 우울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 그가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충분히 이해된다. 


“빌런들도 다 감정이 있고, 또 스토리가 있잖아요. 사회가 그렇게 만든 건데 누군가는 감싸야죠. 사람들의 공감의 넓이가 더 커진 건 좋은 일 아닌가?”


“공감 능력이 그렇게 민감하면 더 살기 좋아져야 할 텐데. 물론 악당이 악당이던 시절에도 호기심이 문제였지만.”


로키는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듯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악당은 악당입니다. 그런데 우린 인간으로서 지켜야 될 것들에 대해 쉽게 선을 넘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하려 안달이죠.” 


로키는 그즈음에서 고개를 돌렸다. 2인용 프레스와 따뜻하게 덥혀진 새 커피 잔이 서빙되었다. 금발의 키가 큰 여자가 로키에게 생긋 웃고는 무어라고 말을 하더니 나를 보고는 영어로 말했다. 


“3분 뒤에 벨이 울리면 프레스를 누르세요.” 


“프란츠브뢰첸은 전문 점에서 사 먹으라고 하는데요. 저기 앞 빵집이요.”


“저 때문이라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나중에 돌아다니다 먹어도 되고요. 그건 그렇고, 전 빌런 영화 즐겨 봅니다. 로키도 볼 거 아니에요. 그리고 호기심이 꼭 나쁩니까?”


“분수에 맞지 않는 호기심을 가져 놓고 변명을 하는 게 문제죠. 그런 주인공들 있잖아요. 호기심 때문에 인류의 종말을 초래하는….”


반듯한 로키가 좋지만 사람은 누군가를 이해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다. 


“자기 호기심 때문에 누군가를 곤란에 처하게 하면 책임을 져야죠.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닥치면 대부분은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그게 문제죠.” 


“긴 여행에서 돌아왔다는 사람이 그 정도로 큰 실수를 했습니까?”


로키는 먼 도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렇게 반듯한 도로에서도 사고가 난다. 나는 그런 끔찍한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로키가 입을 뗐다.


“그림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정도 스스로의 의지로 줘 버리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그림자를 잃었을 뿐이잖아요.”


“그것도 그렇네요.” 


로키의 커피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면? 그래서 회색 코트를 입은 놈이 여전히 신나게 날뛰면서 돌아다니고 있다면?”


로키는 내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덧붙였다. 


“아직 그들의 그림자를 되찾아 줄 수 있다면? 제 말은. 그 회색 코트 녀석을 잡아서. 물리적 행사를 할 수 있다면?” 


로키가 빙긋 웃었다. 나는 그 유치한 의욕에 찬물을 붓고 싶었다. 


“그림자가 없어도 살 만할 것 같은데. 별로 문제 거리가 있을까요?”

 

나는 여유로웠다. 회색코트가 겨우 그런 걸 가져가는 거라면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로키는 몸을 뒤로 젖히고 빙그레 웃었다. 


“함부르크에서 그림자를 잃어버린 그 여행자는 무척 후회했거든요. 팔아버리자마자.”


그림자가 없어서 생기는 불편함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옛말에 그림자가 없으면 귀신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성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걸 믿을 리 없을 것이었다. 실제로 뼈와 살로 이루어진 따뜻한 육체를 만질 수도 있고 그림자가 없다고 해서 외모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성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손 발 멀쩡하니 일을 못할 이유도 없고, 그림자를 따라 아이큐가 빠져나가 머리가 나빠질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림자가 짙을수록 운이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짙거나 옅은 그림자….’ 


포르토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골목 그늘에서 목을 쑥 빼고 페리 쪽을 바라보는 듯 한. 저릿한 전율이 발 끝에서 머리끝까지 훑었다. 설마 내가 찍은 사진이랑 관련이 있을 리가. 커피 잔에서 눈을 들었더니 로키는 내 행동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너무 걱정 마요. 그림자가 없어졌다고 해서 아직 끝장 난 건 아니니까. 아마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다 그렇게 생각할 걸요. 옛날 얘긴 데요 뭐.” 


로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우습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림자가 없다고 해서 죽음을 미룰 수 있다든가, 정반대로 사망에 이르는 형벌적 선고를 받는다든가…. 뭐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술관 쪽으로 걸어가면서 더 얘기할까요? 저기 빵집에서 프란츠브뢰첸을 사서 걸으면서요.”






달콤한 계피향이 나는 질박한 흙도자기 같은 빵을 샀다. 식은 호떡처럼 쫄깃하고 바삭했다. 여행이 주는 여러 즐거움 중 하나는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주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이 주는 추억과 낯선 것이 주는 망향이 한 시점에서 교차된다. 로키 말처럼 그림자를 잃어버림으로 죽음을 미룰 수 있다면, 그래서 온 세상을 마음껏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다면, 망향과 향수는 어느 순간 서로 교차하는 일 없이 평행할 것이다. 우주에서 만난다는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들의 각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한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것이 과연 희망이 될지, 언젠가 끝난다는 불안이 될지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몰랐다.


“로키 그 사람 말입니다. 함부르크에 실제로 있던 사람인가요? 아니면 정말로 옛날 얘기?” 


로키가 프란츠브뢰첸을 먹고 난 손을 빵집에서 가져온 기름종이처럼 얇고 빳빳한 휴지에 닦으며 말했다. 


“호랑이 얘기 있잖아요. 곶감과 호랑이, 선비와 호랑이, 수수밭에 떨어진 호랑이. 그런 건 어떻게 생각해요?”


“로키, 곶감이랑 수수밭이랑 그건 다 허구….”


“호구?”


“허구 허구. 가짜다 이 말입니다.” 


선비와 호랑이라니.


“눈빛 만으로 호랑이가 물러갔다는 얘기 같은 거요. 많이 들었는데.”


“로키는 그런 얘기를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았다면서요. 그러니까 호랑이 얘기가 많은 거 아닙니까.”


“그렇죠. 백두산 호랑이. 참, 시베리아 호랑이가 한국 호랑이인 거 알아요? 벵골 호랑이보다 훨씬 큽니다.” 


집 마당에 호랑이를 마주하며 살아온 민족은 많지 않다.


“여기는 호랑이가 없죠? 유럽 호랑이는 들은 적이 없는데.”


“여기엔 늑대가 있죠.”


“에이 늑대는 호랑이한테 상대가 안되지.”


“진돗개 몇 마리면 호랑이도 잡는데요?”


“진돗개는 호랑이를 아니까요. 여기 늑대들은 호랑이를 만난 적도 없으니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요?”


“여기 늑대는 호랑이를 모를 겁니다. 상상을 하려고 해도 뭘 알아야 그려낼 수가 있겠죠. 가장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야인 예술도 시간을 들여 삶으로 가다듬는 인내가 없으면 현실적인 감동이 없잖아요.”


로키가 나의 미학적 감상을 시험하려는 듯 말했다.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상천외한 것이 주는 센세이셔널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로키가 유연한 목을 흔들며 말했다. 


“그런 것도 결국엔 무언가 모티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사고할 수 있을까요? 서서히 주변을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인간이 아기로 태어나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도 그런 출발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는 S철도를 탔다. 


파란색이 더 많이 섞인 밀도 낮은 겨울 햇살이 차창으로 들어와 시트를 비추었다. 같은 햇볕임에도 노인들의 흰머리에 내린 햇볕은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이야기가 그렇게 많다는 말인가요?”


“관심만 가지면 오싹할 정도의 양이죠.” 


로키는 무심한 태도로 창밖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술관이랑 그림자랑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로키가 휙 돌아보았다. 


“그림자가 없는 그림이 있습니다. 사람은 똑같은데, 그림자가 있다 없다 한답니다. 중간중간 마법의 부츠 이야기도 나오고, 요술 주머니 같은 원초적인 이야기도 등장하고, 커다랗고 푸른 인면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또….”


로키는 시선이 닿는 한 내 눈 속의 가장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등장하죠. 아까 얘기했나? 색감에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까. 아 또….”


곰곰이 생각을 하다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도 그림자의 색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데…. 독창적인데요?”


“그 여행자의 그림자를 빼앗은 게 정말 회색코트가 맞습니까?” 






로키는 대답을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양쪽 창으로 호수가 펼쳐졌다. 흰색 돛을 단 작은 요트들이 겨울 수면을 미끄러지고 있었다. 참으로 윤택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학생증 있어요?”


“아니요. 학생증 없는지 오랜데. 로키는 학생이에요?” 


“학생? 진짜로? 로키 몇 살입니까?"


"스물다섯입니다. 생일도 아직 안 지났고요.”


“생일이 지나야 한 살 먹는 건가? 1월 1일 아침에 바로 먹는 거지. 떡국을 안 먹어도 착실하게 나이는 먹는 건데.”


로키는 매표소를 나와 공공 사물함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로키를 따라 들어가 녀석이 하는 대로 겉옷과 가방을 넣고 화장실에 들렀다. 자동 소등 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한 참 뒤에 불이 들어왔다. 언뜻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화장실 한쪽 칸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문득 세하를 베스 빌라의 육중한 핑크빛 대리석 욕실이 떠올랐다. 불이 꺼졌다. 암흑 속에서 홀로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두 개의 거울에 나란히 내가 보였다. 


‘창 밖으로 보였던 시원한 미소.’


로키는 전시실로 오르는 붉고 육중한 대리석 계단 끝에 우뚝 서서 내 쪽을 내려다보았다. 로키에게 포르토의 그림자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 장난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옛날에도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 호랑이 얘기는 애들이나 믿던 장난이었으니.


‘장난, 낙서, 검붉은, 그림자, 회색코트 그리고 페리.’





        


[1] Rote Flora 붉은 꽃이라는 뜻, 샨츠 구역의 붉은 건물을 칭함.

[2] Franzbrötchen 함부르크의 시나몬 빵






작가의 말 : 

모쪼록 저의 세계를 앞으로도 마음껏 즐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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