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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히토어할레

소설 : 북쪽의 도시들 Northern cities | 4

by 성게를 이로부숴

지금도 그렇게 우연히 다이히토어할레[1]로 가고 있었다. 여행만큼 인생의 우연성을 기분 좋게 체험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우연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만큼 편안한 일도 없으니 여행이란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 넓은 세상으로 마음껏 떠나 다니, 보고 들은 것이 많아 참 좋은 인생이오.’


그러나 페리에게서 보았던 홀가분함은 그저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 풍기는 다양성에의 포용 같은 것이 아니었다.


‘페리는 얼마나 많은 여행을 한 사람일까?’


고작 며칠이었다. 그것마저도 알 수 없이 발생한 버그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 애초에 페리는 자기가 찾던 것을 계획적으로 보러 온 것이었고, 그건 철저한 비즈니스 여행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내가 버그라는 것을 알아낸 다음, 일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페리도 일상의 습관적 불안을 몰아내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일까?'






지난 여행에서는 운이 좋았다.


어쨌든 여행에서는 우연이 훨씬 자주 일어난다고 느껴진다. 합리적이진 않지만 베팅을 할 땐 최대한 예감이 좋은 쪽에 거는 것이 낫다. 그래야 쪽박을 차더라도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의 행복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버려진 공장을 개조 한 다이히토어할레는 함부르크의 상징인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단단한 건물이었다. 물방울 모양의 커다란 유리창과 굳게 쌓은 벽돌, 항구와 맞닿은 빈 공터, 잡풀이 자라 관리 되지 않은 주변 인도 같은 것들 때문에 사진의 세계 란 이토록 적나라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 보였다.


‘포착의 세계가 적나라한가.’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곳을 집중하고 그 외의 것을 철저히 배재하는 것이 사진이다. 그러므로 원했던 것만 강렬하게 남고, 그 외의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원래 존재하던 것조차 그 속에 남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래서 사진첩을 넘기는 것보다 거울을 보며 발견하는 추억은 씁쓸하다.


흰색 페인트로 꾸민 내부는 우중충한 날씨를 금방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이 밝았다. 적당한 온도로 유지된 실내에서 편안하게 다니기 위해 옷과 가방을 맡겼다. 전시관 입구에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첫 번 째 방에 들어서자마자 당장 나가고 싶어 졌다. 다채로운 명암, 흑백의 억지스러운 대비, 사람들의 거짓 표정, 그리고 그 사진의 반대편에 다리를 벌리고 선 기괴하고 억지스러운 포즈의 작가가 있다.

‘사람들은 네가 아무것도 아닌 사진을 찍는 줄 알지만, 다들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아무도 그렇게 아무 메시지 없는 사진을 찍진 못하는 걸? 게다가 세상엔 못생긴 사람이 훨씬 많잖아.’


사진이야 나는 철컥철컥 찍었다. 그것들은 어느 정도 유통되었고 누군가 쓱쓱 보고 사라졌다. 어차피 잊힐 것들일 뿐. 그러나 이 홀의 흰 벽에 걸린 사진들은 잊힐 생각이 없는 것처럼 기분 나쁘게 군림했다. 직접 움직이며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보다 천년은 더 값어치가 있다는 듯. 영영 멈춘 채 수동적으로 걸려 있는 주제에 거만한 위엄으로 사람들을 내려보고 있다.


‘예술이 대단한 가?’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짝에 도 쓸모없는 것이 예술이다. 의미를 만들고 그 내용을 유지시키고 감정이 건드려지는 주체는 그 시간에 살아있는 사람이다.


‘지식과 의미 속에 한정된 예술이 그토록 숭고한 의미가 있나?’


당장이라도 액자들이 매달려 있는 가냘픈 쇠줄들을 끊어뜨리고 싶었다.


목이 말랐다. 여행 중엔 물을 마시는 것을 잊게 된다. 계획대로 화장실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미술관은 좋은 여행지다. 매우 넓고, 텅 빈 공간이 많고, 사람들과 어느 정도 교양 있는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잔잔한 음악을 듣거나 고요에 가까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교양에 찬 사람들도 어차피 화장실로 가게 되어 있고 거기선 어김없이 찝찝한 냄새가 난다.


화장실에서 나와 전시장엔 눈길도 주지 않고 미술관 카페로 갔다. 프렌치 프레스 커피를 시켰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비가 끈질기게 내렸다.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부드러우면서 차가운 목소리. 그는 매우 깍듯한 태도로 물었다. 외국어였지만 머릿속에서 그것은 확실히 존칭으로 번역되었다. 들어올 때만 해도 자리가 많았기 때문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텅 비어 있다.


“창가 자리는 여기밖에 없어요. 비가 계속 오는군요. 여행 중 이십니까?”


“네.”


“커피는 맛있나요?”


“네. 뭐….”


“함부르크는 처음이십니까?”


“처음입니다.”


“그럼 엘프필하모니에는 가보셨나요? 오래된 도시에 새로운 것이 생겼거든요.”


“아니요. 아직.”


“거기 맥주 맛이 좋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꼭 가 보시죠.”


“좋은 정보군요.”


“사진을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작가십니까?”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니요.”


“아까 커다란 카메라를 맡기시던데요.”


“네?”


“밑에서 옷을 맡기실 때 봤거든요.”


“아….”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요즘은 관광객이 많으니까요. 전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을 모두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를 친숙함이 있었다. 짙은 머리카락과 눈썹, 검은 눈동자. 하지만 골격과 무릎, 손은 외국사람의 것이다. 정강이가 길고 골반이 높고, 어깨가 넓었다.


“사실 전 한국어를 할 줄 압니다.”


강한 호기심과 친밀감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전 임은 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가 꼭 배우처럼 웃었다. 좌우 대칭이 딱 들어맞는 미소였다.


“전 로키라고 합니다.”


“함부르크에 사는 건가요?”


로키가 긴 다리를 쭉 뻗어 편안한 자세로 몸을 늘리며 대답했다.


“함부르크는 겨울이 좋지 않은데 여행 시기를 잘못 맞추신 것 같은데요.”


로키는 자연스럽고 기분 좋게 대화 주제를 바꿨다.


“차라리 스위스나 이탈리아 남부로 가는 편이 좋았을 텐데 이렇게 우중충한 북쪽 도시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계속 묻고 있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문득 샘 스페이드의 주먹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냥. 여행입니다. 뮌스터로 갈 거라서 주변을 알아보다가 오게 됐습니다.”


로키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저도 뮌스터에 자주 갑니다. 출장이 잦거든요.”


여행지에서는 사람을 쉽게 믿게 된다. 무엇보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로키처럼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고맙고 반갑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로키처럼 훤칠하고 깔끔한 인상을 풍기고, 현지에 밝고 심지어 한국어를 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좋은 인연을 만나 기뻤다. 여행에서 일어나는 우연의 행운은 포르토에서부터 쭉 이어져 온 것이다.


“독일에 오래 사셨습니까?”


로키는 내가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는 듯 웃었다.


“저요? 그럼요. 저는 여기서 나고 자랐어요. 말하자면 독일인이죠.”


“한국어를 어떻게 이렇게 잘하십니까?”


“배웠습니다.”


로키가 고개를 졌다가 짧게 까딱 숙이는 제스처와 함께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부정적이라고 하기보다,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느껴졌다.


“오래 살면 얼굴이 좀 변하기도 하지요.”


그는 컵받침과 컵을 한 번에 들어 올려 에스프레소를 단번에 마셨다.


“함부르크에는 좋은 카페가 많습니다.”


그가 진한 눈썹을 꿈틀대며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렇게 비가 많이 와서는… 그런 카페들은 골목 구석구석 숨어 있을 텐데요.”


“내일은 날씨가 좋을 지도 모르죠. 혹시 운이 좋은 편이십니까?”






로키가 일어났다. 검은 코트와 여러 가지 문양이 섞인 전체적으로 붉은빛의 세련된 목도리를 맨 모습이 맵시가 좋았다. 로키 정도면 웬만한 모델 보다도 훨씬 사진이 잘 나올 것이다.


“혹시 함부르크 전통 음식 먹어볼 생각 있습니까? 최고의 랍스카우를 내는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거의 쓰러질 것처럼 기울어진 집인데 가볼 만하죠. 생각 있으면 저녁은 어떠십니까?”


“거기가 혹시… 커다란 초록색 컨테이너랑 가깝습니까?”


로키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맞아요. 저는 일이 있어서 다시 들어가야 하거든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국적인 로키의 얼굴에서 그토록 상투적인 표현이 흘러나오다니.


“로키가 한국어를 너무 잘하니까 꼭 한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국경이 뭐가 중요합니까. 살고 싶은 곳에서 사는 거지. 우리 윗집 할머니가 늘 그렇게 말씀하시거든요. 재미있고 좋은 분이죠.”


“그럼, 몇 시에 어디서 만나는 것이 좋겠습니까?”


나는 로키와의 약속이 혹시나 장소를 정하지 못하거나 연락처가 없기 때문에 아쉽게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물었다. 로키가 명함을 건넸다.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7시쯤 연락 주세요. 그럼.”


로키가 서둘러 악수를 건넸다. 여행자는 일상을 배려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둘러 로키가 내민 손을 재빨리 흔든 후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미술관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지만 춥고 비 오는 거리를 배회하고 싶지도 않았다. 함부르크 커피에서 눈이 입 속으로 녹아드는 질감이 났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전시회는 더 이상 둘러볼 마음이 없다. 젖은 바지와 신발을 갈아 신기 위해 호텔로 갔다. 잠이 좀 오기도 했다. 오후만 되면 난데없이 큰 잠이 쏟아졌다.


‘금장시계는 런던에 잘 도착했겠지?’


그 사람이라면 최고급 배를 빌리든, 특급 열차를 타든 음속 비행기를 타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지에 도착했을 것이었다. 그러면 순간이동 장치나 타임머신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장치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마치 누군가는 그런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있다. 어쨌든 그 사람은 내가 걱정해 줄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런 금장시계를 차고 있기도 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따뜻한 물로 발을 씻었다. 온몸이 나른했다. 푹신한 침대 헤드보드에 기댔다. 못다 한 사진 정리를 할 참에 노트북을 열었다. 사진은 전날 열어 둔 대에 멈춰 있다. 골목길 사이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듯한 착각. 페리 쪽으로 고개를 쭉 뺀 그림자가 당장이라도 페리의 머리를 집어삼킬 것만 같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커서를 움직여 그림자가 진 골목을 마구 눌러 댔다. 멈춰 있는 그림자가 움직일 리 없다. 커질 리도 없다. 몸은 이토록 피곤하고 졸린데, 커피를 마셔서 인 지 멍한 인상이 또렷했다. 눈에서 깨끗한 상을 투과시켰으나, 반대쪽엔 뇌엔 안개 같은 흐릿한 상이 맺힌다. 노트북 전원을 꺼 버렸다. 피곤한 상황에서 공포는 우습다. 무서운 영화는 꺼 버리면 되고, 방 불은 켜면 된다. 창가 탁자에서 물을 가지고 왔는데 컴퓨터가 재시동되어 있었다.


“뭐야, 왜 이래.”


다시 전원을 껐다. ‘다시 시작’과 ‘종료’ 버튼은 1mm 차이도 없이 붙어있다. 도대체 왜 ‘절전, 종료, 다시 시작’ 순으로 배열되었는지 새삼스레 이해가 안 된다. 맨 마지막이 종료인 편이 훨씬 논리적이다.


“다시 시작이 더 중요한가.”





[1]

Deichtorhalle

함부르크의 현대미술 및 사진미술관






작가의 말:

3화를 다시 읽으니 너무 고심해서 고친 나머지 제가 원래 전하고 싶었던 것이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낯선 외국 친구와의 여행 느낌을 내고 싶어서, 번역체로 썼던 대화를 내버려 둘 걸 그랬습니다.


외국의 낯선 설렘이 불편한 불안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신 분들 계신가요?

오래 살아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도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타면 밀려오는 친숙함에 안심합니다.


저는 며칠간 베를린에 갑니다. 그래도 여행은 언제나 설레네요.

그럼,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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