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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와 가까운 도시들

소설 : 북쪽의 도시들 Northern cities | 2

by 성게를 이로부숴

함부르크행 인터시티 엑스프레스에는 새벽에도 승객이 많았다. 진한 향수를 뿌린 멋진 중년 여자가 내 자리를 두고 자기 자리라 우겼다. 나는 여유롭게 표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부하직원을 매우 논리적으로 타이르는 데 익숙한 사람인 지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객실 승무원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승무원은 독일어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를 1등석 객실로 안내했다. 그녀가 내게 1등석을 양보하다니. 이번 여행도 운이 좋다.


매우 조용한 1등석에서도 잠은 좀체 오지 않았다. 책을 꺼내 잃어도, 풍경을 바라보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 겨울에 반팔 셔츠를 입은 덩치 큰 승무원이 커피를 마실 건 지 물었다.


“슈가, 밀크?”


대답과 상관없이 설탕과 우유를 탁자에 놓더니 샌드위치를 먹을 건 지 물었다.


“소시지가 든 게 뭐죠?”


계산을 하고 잔돈을 받았다. 동전을 넣을 곳이 없어 대충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오랜만에 손에서 동전 냄새가 났다. 소시지 빵을 한 입 물었다. 역시 짰다. 승무원이 준 우유를 커피에 넣었다. 느끼했다. 설탕을 넣었다. 익숙한 맛이 나서 조금 전 보다 나았다. 휴대폰을 꺼내 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잘 도착했어. 이제 함부르크로 가는 중이야. 눈이 많이 와.’


또 다른 메시지 창을 열고 써 내려갔다. ‘어제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군요. 지금은 함부르크로 가는 중입니다. 시간 되면 언제 한 번 만나죠.’ 마지막 문장을 ‘서로 시간이 되면’으로 고쳤다. 진에게서도 페리에게서도 금방 답장이 오지 않았다.






기차는 눈 내리는 평원을 달렸다. 산이 없는 거대한 눈밭에 집들이 간간이 있었다. 도시와 가까워지면 창밖은 회색이 되었다가 도시와 멀어지며 다시 희어졌다. 몇 시간 동안 조용히 바깥풍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몇 번 객실 문을 열고 타거나 내렸다. 안내 방송이 나왔다. 독일어를 몰랐기 때문에 그 어떤 소리도 배경이 됐다. 누군가 작게 통화를 하고 옆 사람과 대화를 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와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 그중에 뜻을 가진 소리는 없었다.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 시간. 상쾌하게 느껴지던 것이 뜻 없이 지속되자 무료했다.


노트북을 꺼내 사진을 정리했다. 지난 여행 사진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포르토 폴더를 열어 꼼꼼히 사진을 정리하다가 결국엔 그저 화살표를 넘기며 추억을 구경한다. 결국 몇 장도 지우지 못했다. 사진 몇 십장을 술술 넘기다 멈췄다.


‘이건….’


어딘지 기분이 이상한, 논리적으로 이질감이 있는 사진. 그것은 해가 들지 않는 포르토 동 루이스 다리아래 대구구이집 골목을 찍은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유독 짙게 진 골목으로부터 무언가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꺾어 밖으로 내민 형체가 있었다. 뜻밖의 검붉은 인영. 그 그림자의 고개가, 어쩌면 팔이, 보면 볼수록 무엇이라 딱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 페리 쪽으로 억지로 구부린 듯 튀어나와 있었다. 포르토 땅의 모든 사물의 정수리를 타고 흐르는 햇살을 피한 그 어두컴컴한 골목에는 허리가 반쯤 튀어나온 형상이 꿈틀댔다. 여전히 어둠에 잠겨.


“검고 붉은 그 잉크! 페리의 노트! 그 메모!”


찢어지듯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기차는 함부르크 역으로 들어섰다. 죽은 친구의 형상이 담긴 미스터리한 심령사진을 발견한 듯 짐짓 심장이 뛰었다. 노트북을 닫았다.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단단히 맸다. 장갑을 끼고 신발끈을 확인한다. 몸은 가볍고 머리는 상쾌하다.


“Bye.”


철도원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작별을 고했다. 친절이든 경멸이든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쪽도 아무 뜻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 독일어로 크게 말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는 검붉은 그날의 그림자는 확실한 감정을 전달했다. 보이는 것이 어떤 식으로 믿어지는 것은 주관의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의미가 되지 않음에도, 나는 그것에서 왠지 객관적인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잘 도착했군요. 여긴 일주일째 겨울비가 내립니다.’


커다란 역사를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조금 전의 공포는 흐려졌다. 나는 페리의 오리너구리 앱을 켰다. 담담한 리뷰가 있는 적당한 호텔을 찾았다. 밝은 사암으로 지은 아르누보 식 청동 장식이 있는 역사에는 빵에 물고기를 끼워 파는 가게가 많았다. 역을 빠져나오니 페리 말 대로 날씨가 잔뜩 흐렸다. 보이는 가로등 꼭대기마다 갈매기가 앉아 있었다. 은근한 바다 냄새가 났다.


호텔로 가는 길에 오리너구리에 나온 조그만 식당을 찾았다. 하와이안 포케를 따뜻한 된장국과 함께 파는 가게였다. 입식 탁자에 서서 초록색 콩을 뜨는데 창 밖으로 가느다란 비가 흐리게 내리기 시작했다. 봄비처럼 얇고 가볍게 날리는 비. 오리너구리를 열어 친구 상태를 확인했다. 페리는 여전히 친구목록에 있었다. 페리의 함부르크 추천목록을 보았다. 호텔 란에 사계절 호텔이 있다. 사진 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럭셔리 호텔. 포르토에서 보았던 페리의 소박하고 친근한 인상과 이 추천 호텔은 너무 달랐다.


“어느 정도 상업적인 데가 없으면 이런 앱을 만들지도 않았겠지.”


돈을 벌고, 욕심을 부리고, 상황에 따라 전혀 양보가 없는 페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도 그런대로 이해가 되었다. 누군가와 말하고 싶어 졌다. 홀로 여행하는 사람은 그곳의 일상에서 제외된다. 진에게 문자가 왔다.


‘함부르크? 조심해서 다녀, 중요한 걸 잃어버리지 말고.’


커피를 마시고 싶다. 말끔했던 정신의 수면을 흘러가던 종이배가 서서히 물속으로 잠기려 하고 있다.


‘난 잘 거야. 그럼 너도 잘 자. 물론 나중에.’


진이 있는 곳은 한 밤 중이다. 나는 어둑어둑한 낮에 있다.






두 개의 캐리어를 끌고 도착한 호텔 로비 레스토랑 바 유리 소케이스에는 물고기와 빵이 촉촉한 양파와 함께 끼워져 있었다. 몽롱한 상태로 체크인을 마쳤다. 사각거리는 하얀 침대 시트가 씌워진 말끔한 방에 도착했다. 화장실, 창가의 테이블, 거울, 옷걸이, 베개, 전화선, 유리잔, 종이로 만든 설탕봉지까지 모두 새것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이다. 호텔의 물건들은 모두 누군가의 손을 탔지만 그렇지 않은 척 내숭을 떠는 것뿐.


창밖으로 어두워 가는 회색 항구에 오렌지색 조명이 반사됐다. 북해의 탁한 회색 빛 물이 어른댔다. 바다는 늘 새것처럼 몸에 닿는다. 수백 억 명의 몸에 닿았다 떨어진 조각임에도. 옷을 입은 채로 침대 헤드보드에 기대 잠들었다. 발끝부터 서서히 풀어져 올라오는 썰물 같은 잠이 눈꺼풀을 아래로 당겨 댔다.


잠에서 깼을 때 나는 옆으로 기울어 쓰러져 기역자로 누워 있었다. 스탠드가 켜져 있어 몇 시인 지 가늠이 안 됐다. 창밖이 캄캄했다. 차도 다니지 않는 시간인지 파도의 등에 바뀌는 신호등 불빛만 언뜻언뜻 비쳤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어 졌다. 물고기 빵을 팔던 레스토랑 바에서 맥주와 간단한 스낵을 주문했다. 방에 돌아와 소파에 앉아 컴컴한 물길을 바라보며 빨간 하트 속에 닻이 그려진 함부르크 맥주를 마셨다. 텔레비전을 켰다. 어차피 알아듣지 못해 볼륨을 작게 줄였더니 거의 음소거 상태가 됐다.


함부르크의 밤은 온통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오렌지 색 가로등 불빛이 맥주병을 통과해 붉은 갈색 그림자를 내며 탁자에 번졌다. 말짱한 이 상태로 ‘그 사진’을 다시 보고 싶다. 자정이 넘어 깨어난 말끔한 지성의 눈으로. 물성의 한계를 넘지 못한 나의 뇌는 지구 반대편의 동트는 새벽을 막 지난 상태였다. 사진을 띄우고 화면을 자세히 보았다. 피하지 않고, 넘겨짚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한가로운 오전의 포르토. 두로 강이 은색과 엷은 금색으로 빛나고 옛 배들은 텅 빈 오크 통을 싣고 떠 있다. 동 루이스 철교는 에펠탑처럼 도시의 절벽에 솟아 있고, 식당 뒷문마다 식재료 배급차량이 세워져 있다. 열린 트렁크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식자재를 내린다. 그리고 페리는 그 분주한 아침나절의 한가운데 서있다. 사진 속 페리는 옆모습을 하고 포르토 사람과 웃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나와 함께 페리를 지켜보듯 온도차가 다른 것 하나. 그것은 확실히 어두운 골목 그림자 속에 잠겨 있다. 빛의 있고 없음에 따라, 사진이란 빛에 따라 색의 차이를 과장하거나 물체의 존재를 소멸시킨다.


‘빛이 날려버리거나, 빛이 전혀 비추지 못하거나….’


창밖의 현저한 어둠에 비해 화면 속 그림자는 훨씬 밝고 말갛게 빛났다. 그것이 더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밤의 어둠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을 뿐 아니라, 이런 걸 두려워하기엔 너무 늙었다.


“내일은 어디를 가 볼까….”


페리의 오리너구리 앱을 열었다. 메시지 란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Ahoi! 다리 사이에 피사의 사탑처럼 엄청나게 기울어진 오래된 식당이 있습니다. 기울어진 식탁에 앉아 뱃사람들의 식사를 할 수 있지요. 나이프와 맥주잔이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걸요? 최고의 랍스카우[1]와 알스터봐써[2]를 먹어보고 싶다면 거기로 가봐요.’


페리의 메시지는 여전히 친절했다.


‘고마워요. 페리, 그런데 저 식당이 어디입니까? 전 지도가 없으면 찾아갈 수가 없어요.’


1분도 안 되어 답장이 왔다.


‘Oberhafenkantine, Stockmeyerstraße 39, 20457 Hamburg 초록색 Brooklyn 컨테이너를 찾으면 다 온 겁니다.’








[1]

Labskau 함부르크 지방 토속음식


[2]

Alsterwasser 함부르크에서 맥주를 섞은 음료를 부르는 말





작가의 말 :

<거기서 페리를 만나> 포르투 편부터 함께 달려 주시며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모두 건강히 평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엔 북해와 가까운 도시 함부르크를 함께 걸어 보죠.

여기는 오늘도 축축한 구름에서 실 같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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