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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장시계

소설 : 북쪽의 도시들 Northern cities | 1

by 성게를 이로부숴

함박눈이 내리는 활주로. 작은 공항버스로 옮겨 타고 터미널로 들어간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모르는 언어로 적힌 안내판. 설렘과 피곤이 동시에 밀려왔다. 펑펑 내려 쌓인 눈들은 터미널 주변으로 정갈하게 밀려났다. 평소라면 그저 춥겠다든가 길이 미끄럽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여행이란 하찮은 일상을 얼마나 새롭게 보게 하는지 모래와 먼지가 쌓여 회갈색 빛을 띠는 눈에도 낭만적 감상이 일었다.


딱딱하게 끊긴다고 믿어왔던 독일어 음절이 청량한 멜로디와 퍽 잘 어울렸다. 버스는 터미널에 도착해 문을 열었고, 눈과 함께 찬 바람이 버스 속으로 불어 들었다. 사람들은 눈발이 내리는 바람 속으로 토해지듯 내렸다.


나는 페리가 그랬듯 모두에게 양보를 한 다음 가장 마지막으로 내렸다. 검은 하늘 가득 날리는 눈, 반짝이는 공항 램프, 활주로를 서행하는 비행기들이 차가운 공기와 한 장면이 되어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분주한 사람들이 벌써 사라져 버린 고요한 터미널. 버스에서 내려 활주로를 바라보느라 뭉그적거린 탓에 그 어떤 친절한 참견도 없이 완벽한 자율상태에 놓여졌다.


‘망설였다.’


이렇게 빨리, 아주 혼자가 될 줄 몰랐다.


‘어디로 가야 하나.’


손목시계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시간은 떠나온 곳에 묶여 있다. 전광판 비행 스케줄 표의 모든 비행기들이 최소 되어 있었다. 연착하는 비행기는 나와 상관이 없었다.


검은 하늘에서 커다란 눈송이들이 떨어졌다. 최소한의 조명만을 남긴 공항이 어둑어둑했다. 함께 입국심사를 받은 몇몇 사람들은 기차 표시가 있는 유리문을 마지막으로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발이 몰아치는 야외 플랫폼에 외롭고 피곤하게 홀로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기다리고 있는 기차보다 먼저 왔어야 할 기차도 9시간이나 연착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차피 오늘이 아니어도 되잖아. 조급할 거 없어.’


첫 일정을 마음대로 바꿨다. 곧 폐허가 될 것처럼 적막한 공항으로 돌아왔다. 이 세상의 마지막 전기를 써버리듯 엘리베이터 문이 대차게 울리며 닫혔다. 호텔 로비로 이어지는 작은 문과 좁은 복도 끝, 따뜻한 인영이 비치는 노란색 불빛이 드리워 있었다. 비상구를 통해 호텔 로비로 빠져나왔다. 복도에서는 카펫청소용 방향제 냄새가 났다. 방 문을 닫으니 전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정적이 흘렀다.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저녁을 먹고 싶다.


‘페리에게 메시지라도 남길까.’


창밖에는 계속 눈이 내렸다. 샤워를 하고 새 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었다. 두꺼운 스웨터를 꺼냈다.






호텔 레스토랑에는 말끔한 정장과 코트를 입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아무래도 가벼운 차림을 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여행이란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예민한 감각을 느끼는 일이다.


‘잘 도착했어?’


그녀의 말풍선 끝에 달린 작은 사진 속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누군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을 때 친절한 미소를 띤 직원이 메뉴를 넘겨주었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아무 맥주나 주문했다. 거품이 조금 흘러넘친 차가운 잔을 리드미컬하게 내려놓으며 주문하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겠다는 직원의 적나라한 시선이 부담스러워 전채요리를 주문하고 메인 요리추천을 부탁했다. 직원은 알아볼 수 없는 독일어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내가 잘 못 알아듣자 생소한 악센트로 말했다.


“돼지고기 메달리온과 구운 감자를 추천합니다.”


손에 묻은 맥주를 냅킨에 비벼 닦고 있는데 여전히 뒤통수가 간질간질했다. 어떤 남자가 꽤 먼 테이블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 피부색보다 톤이 붉고 어둡고 매서운 눈을 한 남자는 다름 아닌 인천 공항에서 만났던 ‘금장시계’였다.


“어?”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다. 안 좋았던 첫인상은 사라지고 반가운 마음만 들었다. 그는 아침에 본 차림 그대로였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뵙네요. 식사하셨습니까?”


그의 표정에는 반가운 표시 란 전혀 없었다. 흐물흐물 해 지려던 첫인상이 다시 빳빳하게 코팅됐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자리로 돌아와 보니 호박수프가 놓여 있다. 보기엔 항상 먹던 호박죽과 비슷해 보였지만 흰 크림이 중간에 뿌려져 있었다. 빵을 먼저 뜯어 입에 넣고 수프를 떠먹었다. 빵도 짜고, 수프도 짰다. 달큼한 호박에게 이건 너무 실례가 되는 맛이었다. 페리가 있었더라면 이 수프를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패.’


직원이 계속 나를 주시했다. 다음 요리를 낼 타이밍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 다른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가 금장시계 쪽으로 가더니 문득 식사를 하고 있는 내 뒤에서 나타나 말했다.


“실례합니다. 저쪽에 계신 신사분께서 함께 자리를 하시겠다고 하시니 음식을 옮겨 드리겠습니다.”


‘아까는 반가운 척 하나 없더니.’


내가 일어서자 직원이 수프 그릇을 들고 따랐다. 나는 내 맥주잔을 들자 그는 입술을 꽉 다물며 미간에 인상을 썼다. 서둘러 걸어가 수프 그릇을 내려놓더니 빼앗듯 서둘러 맥주잔을 받았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뭔가 실례를 범한 모양이었다. 돼지고기 메달리온과 버터에 구운 감자가 나왔다. 난데없이 얼음을 가득 채운 은색 통에 담긴 샴페인과 은 쟁반에 수북이 담긴 캐비아가 등장했다.


“맛있게 먹지.”


“제네바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금장시계가 샴페인 잔을 들었다.


“먹는 일엔 영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말이야. 요즘 독일 사람들이란.”


그는 캐비아를 입에 털어 넣고 샴페인을 마시고 입가심하듯 빵을 먹었다. 나는 내 돼지고기 메달리온과 감자를 먹었다.


“럭셔리에 관심이 없다니까. 이런 샴페인이라니.”


“런던에 가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비행기는 모두 캔슬.”


“피곤하시겠습니다.”


사실 금장시계는 혈기왕성해 보였다.


“좀 더 먹지.”


그는 내가 캐비아를 한 입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눈이 펑펑 내리는 군. 이런 계절에 북해를 건너는 건 웬만해선 좋지 않아. 하루 만에 집과 배들이 가득했던 도시가 없어져 버리기도 하거든. 바다는 그래.”


나는 식사를 거의 끝내고, 맥주잔을 비웠다. 그리고 금장시계가 따라준 샴페인 잔을 들어 단번에 들이켰다.


“모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인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금장시계는 내 잔에 다시 샴페인을 따랐다.


“글쎄. 비행기가 있어도 그때와 똑같다니까. 아직까지도 눈 태풍 하나 어쩌지 못하는 인간들이란.”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씩 웃었다. 여유로운 나는 그가 비행기를 탈 때까지 좀 기다려 주기로 했다. 먹고 마셨더니 몸에 활기가 돌았다.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는 그의 손목이 번쩍였다. 금빛 손목시계는 너무 커서 건너편에 앉은자리에서도 시간이 보일 지경이었다. 페리의 나무시계와 비교하면 그 시계는 너무 무거워 보였다. 그는 손을 들어 샴페인을 한 병 더 시켰다. 소매 속으로 건장한 팔이 보였다.


“이 도시들엔 오래된 이야기들이 많지. 잘 들으면서 다니면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여행을 할 수 있을 거야.”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송곳니가 드러날 만큼 입을 주욱 찢어 웃으며 말했다.


“외국어 공부는 이래서 중요하단 말이야. 중요한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 말! 말! 말이야. 곧 필요 없어지겠지만.”


그는 시종일관 나를 매우 어리거나, 혹은 아주 아랫사람으로 대했다.


“여행이란 희망을 몸소 체험하는 일이지.”


“네?”


금장시계가 씩 웃었다.


“보지 못해서 알지 못했던 것, 듣지 못해서 알지 못했던 것, 먹어보지 못해 몰랐던 세계는 여전히 남아있거든. 유한한 생애에 무한한 희망. 끝이 있어도 너에겐 보이지 않는 그 무한한 희망 말이야.”


그는 여행의 낭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본 듯했다.


‘차갑고도 뜨거운 생생하고도 오랜 불꽃.’


무엇에 홀린 듯 금장시계와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한 이래 본격적인 아메리카 이민시기의 독일인과 영군인에 관한 것부터 하드보일드 소설에 대해서까지. 그는 눈 내리는 새벽 공항 호텔 레스토랑을 자신의 거실처럼 여겼다. 마침내 머리를 길게 기른 켈트족과 짧게 이발한 로마인들 간의 잔인하고도 긴 싸움이야기를 꺼냈다. 얼마나 실감이 나던 지 꼭 그가 직접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쟁은 사라지지 않아. 그건 결코 사라질 수 없으니까. 피를 흘리고 울어도 인간은 결국 또 피를 흘리게 되어 있거든. 울 지 안 울 지는 스스로 결정하라고 해.”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금장시계가 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혈기왕성해졌다. 그가 손목을 들자 역시 내 쪽에서도 시간이 보였다.


“비행기를 타긴 글렀군.”


금장시계와는 거기서 헤어졌다. 이별의 인사는 없었다. 그는 금장시계를 찬 손목을 들고 고개를 몇 번 끄덕끄덕 하고는 갑자기 일어나 플랫폼 쪽으로 사라졌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활주로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고 싶었지만 이상할 만큼 생기가 넘쳐 몸이 근질근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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