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놀자
친구야, 놀자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삶은 단편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풀 스토리로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에피소드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다만 사진처럼 떠오르는 몇 장면이 존재한다. 5학년 정도 이후는 그래도 기억에 저장된 스토리가 여럿 있다.
난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서울에서 상대적으로 - 많이- 낙후된 지역에서 보냈다. 동네에는 유치원이 있기는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난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 유치원은 대부분 부모의 선택이다. 부모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지, 아이가 스스로 선택해 가는 것은 아니니까.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엄마는 날 유치원에 보낼 생각이 없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여태껏 여쭤본 적은 없다.
내 아들을 생각해보면 유치원에 다니지 않은 난 그때 그 시절,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지 매우 궁금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아들 유주는 유치원 화석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녀석은 유치원에서 선배질 하느라 하루 하루를 매우 바쁘게 보내고 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5세 아이들에게는 선생님을 대신해 이것저것 가르쳐 주느라 바쁘고, 6세 아이들에게는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해라 꼰대질 하느라 바쁘다.
이런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테니 내 유아 시절의 시계는 매우 느렸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초등학교에 가서야 첫 친구를 만난 것 같다. 엄마, 아빠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바쁜 분들이었다. 입학식에는 할머니와 함께 갔다. 이 장면이 사진처럼 몇 컷 남아있다. 입학식을 마치고 처음으로 교실에 들어섰는데 내 뒤에 연신 코를 훌쩍이는 빠박 머리를 한 녀석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기훈'이.
할머니가 기훈이를 붙잡고 연신 당부하셨다.
"우리 유진이랑 친하게 지내자."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내 삶은 기훈이를 빼고 설명할 수 없다. 그 외의 기억은 별로 없으니. 기훈이네 집은 우리 집에서 그 당시 내 걸음걸이로도 5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둘 다 아주 작은 주택에 살고 있었고. 믿기 힘들겠지만 그때 우리 동네에 아파트다운 아파트가 처음 들어선 것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그 시절 내 일상은 딱 두 가지였다. 학교 끝나고 일단 집으로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기훈이네 집 초인종을 누르거나, 아니면 기훈이가 누를 우리 집 초인종 소리를 기다리거나. 초인종 소리는 달랐어도 그다음에 들리는 말은 같았다.
"친구야, 놀자"
왜 기훈아 놀자, 아니면 유진아 놀자라고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했다. 우렁찬 목소리로, "친구야, 놀자"
뭐하고 놀았는지 온전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아도, 이 장면은 확실히 머리 속에 인처럼 박혀 있다. 우린 그렇게 동네에서 놀았다.
경비원 아저씨라는 벽
4학년 이후 많이 달라졌다. 한강 남쪽에 위치한 우리 동네에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즈음 달동네도 개발되어 헐리기 시작했다.
서울의 촌놈들이 주로 다니던 우리 학교에 아파트에 입주하기 시작한 친구들이 전학 오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매우 높았고 고급스러웠다. 당연히 느낌적인 느낌이었지만, 얼굴이 시커먼 우리들과는 달리 전학 온 친구들은 피부마저 뽀얗고 윤기가 흐르는 듯했다. 왠지 아는 것도 많아 보이고 인기도 전학 온 친구들이 독차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초등학교는 파가 둘로 갈리기 시작했다.
달리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서울 촌놈파 vs. 아파트파"라고 할 수 있다.
낮은 층의 개인 주택이 많았던 우리 동네는 빠르게 바뀌어 갔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4-5층짜리 빌라가 세워졌다. 이 시점부터 여럿 기억의 장면들이 연결되어 떠오르는데 종혁이가 이사를 간 시점도 이 시점이고 더 이상 동네에는 "친구야, 놀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경비원 아저씨부터 만나야 했다.
경비원 아저씨는 매우 무서웠다. 아파트파 친구나 아파트파로 전향한 촌놈파 친구를 만나러 아파트로 들어 설라 치면 아저씨들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봤다. 순간 죄를 진 기분도 들었다. 내 얼굴에는 난 아파트에 안 산다고 쓰여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귀신같이 너 여기 사는 거 맞냐고 아저씨들이 물었다. 아직 오지 않은 친구를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다가 쫓겨난 적도 있었다. 이제 막 5학년 짜리가 뭘 어쩐다고 이리 매몰찬가 싶었다.
그렇게 친구들 간의 연결 고리가 하나, 둘씩 차단되는 것 같았다. 아파트파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주로 영어학원에 간다고 했다. 우리야 태권도장이나 기껏해야 주산학원 다니는 것이 전부였는데 얘들은 5학년인데 '성문기초'를 배우러 간다고 했다. '성문기초'가 뭔지 알턱이 없었지만, 다들 간다고 하니 촌놈파 중 여건이 되는 녀석들 부터 '성문기초'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친구들을 만나려면 태권도장으로는 부족한 시점이 온 것이다.
학원을 가야 했다. 놀 곳이 동네에서 학원으로 변한 것이다. 학원은 공부하러 가는 곳인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네를 복원한다는 것은 "친구야, 놀자"를 살리는 것
동네의 복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 고리, 관계를 회복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친구야, 놀자"를 살리는 것. 우리 안의 벽을 허무는 작업이다.
동네를 복원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과 정부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서 생겨난 정책이 '마을만들기' 사업이다. 인위적으로 만드는 마을은 당연히 한계가 있다. 하지만 관계의 단절을 방치하지 않고 우리의 관심 영역으로 끌고 온 것만으로도 마을만들기는 가치가 충분하다.
행궁동의 이름은 당연히 화성행궁에서 따왔을 것이다. 행궁은 임금이 자신의 거처를 떠나 잠시 밖에서 머무는 곳을 말하는데 화성행궁은 현재 수원시 팔달구 수원화성 안에 위치한 행궁을 일컫는다. 화성행궁을 정조가 건축했을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따로 정조시대에 건축된 것은 아니고 수원의 관아 건물로 전부터 존재했단다. 다만 정조시대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행궁마을 탐험은 한두 번의 출사로 마무리되지 않을 만큼 방대하다. 우선 신풍루 좌측의 행궁로를 중심으로 행궁마을을 느껴보았다. 행궁마을의 상업 커뮤니티를 담당하고 있는 지역으로 공방거리, 맛촌거리, 로데오 거리 등 컨셉 있는 거리를 만나볼 수 있다.
행궁로에는 좌우로 작은 맛집들과 공방들이 줄 지어 있다. 인도처럼 보이지만 실상 자동차를 끌고 진입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토요일은 차 없는 거리가 되는 모양. 화성행궁에 주차를 하면 되는데 거의 붙어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으니 차를 가지고 이 길에 굳이 진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우물이 시선에 고정됐다. 옛 마을에서 우물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아직 상수도가 전국에 망처럼 펼쳐지기 전 우물은 동네의 거의 유일한 식수였다. 물론 우물조차 없는 동네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급수차가 온 적도 있다고 한다. 요즘 친구들이 들으면 불과 4-50년 전 우리 부모 세대의 삶이 쉽게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훈이랑 놀던 그 동네에도 우물이 있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나 눈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이 기와로되어 있었는데 물론 우물의 수명은 다한터였다. 우물이 작은 슈퍼마켓의 간판을 가리고 있다. 과연 슈퍼마켓 사장님은 장사를 위해 우물을 치워달라는 민원을 제기한 적이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우물 앞 슈퍼로 더 유명하지 않을까.
곳곳에 공방이 있다. 공방의 가치는 판매보다 배움에 있는 것 같다. 동네를 회복시키는 마을만들기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들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임을 이미 강조한 바 있다. 사람이 만나서 함께 하기에 가장 좋은 소재가 바로 같이 뭔가를 배우는 거다. 취미를 공유하는 것만큼 빠르게 가까워지는 방법이 또 있을까. 같이 배우면 말을 하게 되고, 말을 하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친밀감이 샘솟듯 솟을 수 있다. 이해하는 단계에까지 못 이르기에 우리는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람개비를 만날 수 있다. 꽃씨 파종지 표시를 해둔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람이 나에게 느껴지는 것 같다. 저 멀리 초등학교 건물이 보이고 주택들도 보인다. 이 길을 중심으로 사잇길이 제법 많이 나 있는데 적지 않은 주택이 있다.
이 길은 정조로 777번 길이다. 길 이름에 정조대왕이 붙은 것은 화성과의 인연을 생각할 때 매우 자연스러운데 길 번호가 777이라니 이색적이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팔달산로를 만나고 남포루를 거쳐 서남암문에 도착할 수 있다. 행궁로에서 팔달공원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행궁마을 커뮤니티 아트센터는 레지던시 아트센터이다. 즉 작가들에게 숙소와 작업실을 제공하며 전시의 기회도 부여하는 곳이다. 이런 레지던시가 마을과 마을을 잇고, 마을과 문화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레지던시에 입주하는 작가는 이 지역 출신이 아닐 수도 있기에 지역과 다른 이질적인 문화가 지역으로 침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침투는 문화의 다양성 측면에서 너무 반가운 현상이다. 지역의 문화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2018년에 10기를 모집하였고 2017년에는 9기의 전시들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1년에 한 기수씩 입주 예술인을 선발하는 듯하고 올 해로 십 주년이 된 것으로 보인다.
후기
이왕 놀 거 우리 동네에서 놀자
바로 다음 에피소드(11화)는 아니겠지만 행궁마을은 한 두 차례 더 다루려 한다. 그동안의 이 마을에서 있었던 일도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 싶고, 여전히 찾아보고 싶은 공간들이 있다. 맛보고 싶은 맛집의 음식도 있고. 주민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주거지에 대한 느낌도 얻고 싶은 마음이다.
경리단길이나 황리단길 등처럼 주 도로에 작은 공방, 서점, 맛집이 모여있는 그 '길'위에 서면 잘 보이지 않는 곳이 사잇길이다. 주 도로 사이사이에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동네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동네의 실체를 볼 수 있다. 행궁로도 마찬가지이다.
행궁마을의 도시재생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이 지역이 과거에는 팔달시장을 중심으로 상당히 번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수원에 새로운 도심지가 생기고 구도심으로서 행궁동은 90년대에 빠르게 쇠퇴가 진행되었다. 이후 마을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주체가 서로 노력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가꾸었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쇠퇴가 진행되는 부분도 존재하는 듯하고, 상권의 부침도 심해 보인다.
도시재생은 끝이 없다. 정부의 투자는 시작에 불과하지 끝이 아니다. 끊임없이 재생이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이 것은 동네 사람들의 몫이다.
대학원 수업 중에 마을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했다.
"마을을 만드는 사람들은 꿈이 있어요. 내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마을로 돌아와 직장 잡고 결혼하고 애 낳고 그냥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손주들도 여기서 놀고."
노력을 계속한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동네 사람들, 정부, 활동가들,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 등의 조직화된 조직체들이 계속 우리 아이, 아이의 아이를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쇠퇴한 동네도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으면 한다.
이왕 놀거 행궁마을에서 놀자.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