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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진 Aug 08. 2019

도시, 살다 24화 - 강릉 월화거리

국가대표 피서지에 피어난 꽃 길 , 공간을 잇다. 

국가대표 피서지


아빠가 개척한 교회가 조금씩 커져가고, 교인의 수가 100명을 넘어갈 때쯤, 전교인 수련회를 떠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목적지를 잊지 못한다. 바로 강릉. 


초등학교 3학년 정도까지 난 가족과 '피서'를 다녀온 기억이 없다. 그만큼 부모님의 삶은 교회만으로도 벅찼다. 


아들 데리고 놀러 가본 적이 별로 없으신 아빠는 미안하셨던지, 초등학교 3학년 때 열린 첫 수련회의 시작을 이틀 앞두고, 나와 엄마를 차에 싣고 강릉으로 먼저 떠나셨다. 수련회 전에 이틀 정도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만드신 것이다. 아빠와 집이 아닌 곳에서 논다는 것이 처음에는 적응되지 않았지만,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을 벗어나지 못했던 난 적어도 그 나이까지의 삶을 모두 다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갖가지 생선을 말려 놓은 전통시장의 비릿한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회도 한 조각 먹어 본 것 같고, 튜브를 배에 두르고 그림 같은 바다에 뛰어들기도 했다. 목사 아들의 삶은 부모만큼이나 바쁘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안 가겠지만. 언제 이런 것을 즐겨봤겠는가. 


가르치던 학생 중 한 명이 강릉에서 태어난 토박이이다. 인스타를 통해 내 어릴 적 첫 피서지였던 강릉을 다시 가고 싶다고 했더니, 반응이 시큰 둥 했다. 한국에 좋은 곳도 많은데 굳이 여길 왜 오냐는 투. 


갑자기 난 궁금해졌다. 


"강릉 사람들은 휴가를 어디로 가요?"라는 내 바보 같은 질문에, 제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강릉을 벗어나기만 하면 거기가 바로 휴가지예요. 우리는 강릉을 벗어나는 게 목표에요. 늘."


강릉 사람들은 피서를 위해 강릉을 떠난다고 대답할지라도, 난 언젠가 다시 가족과 함께 강릉으로 갈 것이다. 내겐 대한민국 대표 휴가지이다. 


그때의 내 행복감을 다시 느끼기는 어렵겠지만, 그 시절 이야기를 지금 나의 가족에게 들려줄 수는 있을 것 같다. '강릉'이란 도시가 나에게 주었던 그 시절의 감정. 짧지만 매우 강했던 그 행복감 말이다. 그것 때문에 강릉은 아직까지도 막연히 좋다. 


다시 만난 강릉


올해 휴가지를 강릉으로 하고 싶었지만, 매년 우리 가족이 휴가를 위해 떠나는 전북 '고창'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고창의 조용한 분위기를 아내가 많이 좋아한다. 휴가를 위한 강릉은 내년에 가기로 하고, 대신 하루 일정으로 혼자 강릉으로 떠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책을 쓰기 위해 방문하는 도시재생 공간은 떠나기 이전에 정한다. 전혀 정보 없이 가면 중요한 장면을 놓칠 수 있다. 지금까지 방문한 장소 중 감천문화마을이나 아미미술관처럼 이미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곳도 있고, 명월국민학교나 동춘 175처럼 이제 막 떠오로는 핫 플레이스도 있다. 


그런데 강릉은 정해진 곳 없이 무턱대고 떠났다. "어느 곳이든 만나겠지.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 강릉만의 핫 플레이스. 30여 년 전에는 당연히 없었겠지만, 소멸 위기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피서지를 재생할 그런 공간. 어디든 만나겠지." 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만난 공간이 '월화거리'이다. '월화거리'는 강릉과 원주를 잇는 고속철도가 지하로 들어가면서 생긴 폐철도 부지 위에 조성된 거리이다. 도시재생의 컨셉에도 잘 들어맞는 일종의 브라운필드(오염된 부지) 재생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강릉 어디를 찍고 가야 할지 몰라 내비게이션에서 강릉을 키워드로 몇 곳을 검색해보았다. 그래서 결정한 곳은 '봉봉방앗간'이었고, 내비게이션의 설정을 '봉봉방앗간'으로 한 채 안성에서 차를 두시 간 반 정도 몰아 도착했다. 떠나기 전 이 이상한 이름의 방앗간은 무엇에 쓰이는 공간일까 매우 궁금한 상태로 출발했고, 어쩌면 오늘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기대를 한 마음으로 안고 도착했다. 


그런데, 닫혀 있었다. 쉬는 날인 듯싶었다. 이런, 첫 번째 후보지가 탈락했다. 


안성에서 길을 나서기  전 봉봉방앗간은 무엇을 위한 공간일까 매우 궁금한 상태로 출발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봉봉방앗간은 이미 SNS 스타였다. 방앗간의 외형을 유지한 채로 지금은 카페로 활용되는 공간이다. 봉봉방앗간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냥 주변을 구경해보기로 했다. 


봉봉방앗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가 위치한 이 작은 동네의 이름은 명주마을인 듯했다. 동네가 특별히 둘러볼 곳이 많은 곳은 아니었지만, 흔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중소도시 구도심의 귀퉁이 한 공간을 차지하는 듯한 그런 마을이었다. 작은 공연장 '단'에서는 꾸준히 공연이 열리고 있는 듯했다. 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동네의 크기를 고려할 때, 동네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이 공연장 너머로 구도심에 흔한 빌라 건물과 목욕탕 표시가 보인다. 


명주마을의 작은 공연장 '단'에서는 꾸준히 공연이 열리고 있는 듯했다. 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동네의 크기를 고려할 때, 동네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이 마을 곳곳에는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창조적인 사람들이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아담하고 예쁜 카페 '스완네 집'에는 적지 않은 손님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식사까지도 가능한 공간이다. 


아담하고 예쁜 카페 '스완네 집'에는 적지 않은 손님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식사까지도 가능한 공간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피자 제작 공방이다. '미국피자공방'. 개인적으로 시카고 피자를 너무 좋아해 문을 열었으면 들어가 보고 싶었다. 이 곳은 피자를 파는 곳인지, 피자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는 곳인지, 아니면 둘 다 가능한 곳인지 잘 몰라 궁금증이 샘솟듯이 솟아났는데 궁금증은 끝내 풀지 못했다. 아직 오픈 전인 듯 보였다. 


처음 본 공방이다. '미국피자공방'. 개인적으로 시카고 피자를 너무 좋아해 문을 열었으면 들어가 보고 싶었다.


명주마을은 강릉의 구도심에 속하며, 강릉의 유명한 전통시장과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중소도시의 구도심이 대부분 그렇듯이 새로운 세입자를 찾기에 힘에 부치는 듯한 상업 공간이 적지 않게 보였다. 굳이 이 곳에  사진을 올리지는 않겠지만, 강릉의 구도심이 월화거리의 활성화를 통해 전반적으로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마음 가득해졌다. 


명주마을에서 본격적인 구도심이라 할 수 있는 거리를 걷고 또 걸으면, 강릉의 수산물 시장(전통시장)을 만날 수 있다. 전통시장 역시 빠르게 지나치면, 바로 월화거리의 중간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바로 그곳에 관광안내소와 Wish Tree가 있다. 소원이 있으면 잠시 걸음을 멈추자. 이 곳은 포토존으로서도 훌륭하다. 


전통시장 역시 빠르게 지나치면 바로 월화거리의 중간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바로 그곳에 관광안내소와 Wish Tree가 있다.


전통시장에서 월화거리로 향하는 방향을 기준으로 Wish Tree 오른쪽으로 쭉 가면 남대천이라 불리는 나름 꽤 큰 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월화교'가 나오고, 왼쪽으로는 풍물시장과 먹자골목 등이 조성된 길을 만날 수 있다. 


월화교를 지나 월화정을 만날 수 있는 오른쪽 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보고자 한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자마자 눈에 확 띄는 것이 바로 다음 사진의 구조물이다.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작품 같은데 달리 묘사할 방법을 못 찾겠다. 처음에는 연등처럼 보이기도 했다. 부처님 오신 날 지난 지가 오래되었으니 아닐 것이란 생각이 곧바로 들었지만. 하늘에 수놓은 상자들이 어디론가 안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자마자 눈에 확 띄는 것이 바로 이 사진의 구조물이다. 분명 랜드마크일 것이다.


월화교를 향해 가는 길의 오른편에는 유럽식이랄지, 미국식이랄지, 한국식이랄지, 아니면 강릉식이랄지 딱히 규정하기 어려운 3층짜리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대부분 먹거리를 위한 작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다. 홍대에서 볼 법한 젊은 취향의 가게에서부터, 전통시장에서 있음 직한 트래디셔널한 가게까지 다양한 가게를 만날 수 있다. 아마 저녁 시간이 되면 사람들로 확실히 더 붐빌 것 같다. 


월화교를 향해 가는 길 오른편에는 유럽식이랄지, 미국식이랄지, 한국식이랄지, 아니면 강릉식이랄지 딱히 규정하기 어려운 3층짜리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나무 상자를 따라 계속 걸으면, "I Love Wolhaw Street"라는 구조물이 나온다. 이 구조물 너머로 월화교가 있어서 큰 강을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이 공간은 앞 뒤로 개방된 공간이지만 따스했다. 친구와 앉아 수다 떨며 옆의 가게에서 사 온 음식을 나눌 수도 있고,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며 운동과 함께 뷰(view)를 감상할 수도 있다. 전적으로 이 곳을 찾는 사람을 위해 디자인되었다. 


하늘에 떠 있는 나무 상자를 따라 계속 걸으면, "I Love Wolhaw Street"라는 구조물이 나온다. 이 구조물 너머로 월화교가 있어서 큰 강을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I Love Wolhaw Street" 뒤의 계단을 올라, 강 쪽이 아닌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작품 하나를 만날 수 있고, 강릉시의 구도심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김문기라는 작가의 작품으로서 '여유'라는 제목이 붙었다. 전형적인 직장인 슈즈를 신고 있는 커리어 우먼의 머그잔을 주의 깊게 보면 수평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미 커피를 모두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직장인에게 가장 여유로운 점심 식사 후의 모습을 표현한 것 아닐까. 뒤로는 지금까지 걸어온 월화거리가 보이며 강릉 시내의 한 자락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김문기라는 작가의 작품으로서 '여유'라는 제목이 붙었다.


월화교는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월화정이 나오고 그 뒤로는 '부흥마을'이라는 이름의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내심 흐린 날씨가 너무 아쉽다. 이따금씩 빗발이 흩날렸는데 운치는 있었지만, 사진은 이쁘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는 일은 매우 재밌었지만, 중간쯤 가니 살짝 공포심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내 이겨냈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분은 의외로 이 다리 건너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스카이워크에 발을 디딘 기분이 들기도 한다. 


월화교는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월화정이 나오고 그 뒤로는 '부흥마을'이라는 이름의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월화정의 모습이다. 안내석에 따르면, 1930년 건축된 월화정은 일제 강점기 시절 철도 건설을 이유로 철거된 후 재건축을 하였으나 다시 6.25 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의 자리에 재건축된 것은 2004년이라 한다. 


월화정의 모습이다.


월화정의 시그니쳐는 바로 잉어상이다. 잉어는 사랑의 메신저로서 월화설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라시대 화랑이었던 무월과 강릉 지방 토호의 딸인 연화는 사랑하던 사이였는데 신라 왕실의 명으로 강릉에서 일하던 무월이 다시 경주로 발령(?) 받자, 연화는 다른 사람과 혼인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에 연화는 자주 산책하던 연못의 잉어에게 편지를 써서 주었는데, 경주의 한 시장에서 잉어를 구입한 무월이 잉어의 배를 가르자 연화의 편지가 나왔다고 한다. 편지를 읽은 무월은 한 걸음에 강릉으로 내달려 연화와 혼인을 하게 된다는 것이 월화설화의 주요 내용이다. 무월의 둘째 글자와 연화의 둘째 글자에서 한자씩 따와 월화정이 되었고, 이 거리가 월화거리가 된 것이다. 로맨틱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잉어는 불쌍하다. 


월화정을 지나서도 내 구경은 멈추질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시골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길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이 곳은 '걷기 위해 탄생한 길' 같았다. 이 길은 걸어야만 했다. 걸으면서 시골 마을의 정겨운 가옥을 만나볼 수 있었다. 걷는 거리의 총 길이는 상당했지만,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을 만큼 이어지는 풍경이 날 만족시켰다. 


월화정을 지나서도 내 구경은 멈추질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시골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길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굴이 하나 나온다. 노암터널. 잊고 있었지만 이 곳은 폐선 부지이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바로 철로였던 것이다. 사실 일제 시대 수탈을 위해, 혹은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많은 철로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지하화 되기도 했고, 다른 운송수단이 도입된 경우 아예 드러내 버리기도 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의미가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흉물처럼 방치된 경우도 적지 않게 보인다. 도시 재생 전략에 있어 매우 큰 고려 사항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방치된 철로는 인체에 매우 유해하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굴이 하나 나온다. 노암 터널. 잊고 있었지만 이 곳은 폐선 부지이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바로 철로였던 것이다.


노암터널을 지나면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부흥마을'. 규모는 크지 않다. 백세대도 채 되어 보이지 않지만 구도심 마을과는 또 다른 형태의 마을이다. 전형적인 농가는 아니지만, 중소도시의 농업을 담당하는 마을로 보인다. 


노암터널을 지나면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부흥마을'. 규모는 크지 않다. 백세대도 채 되어 보이지 않지만 구도심의 마을과는 또 다른 형태의 마을이다.


부흥마을은 월화거리의 가장 끝에 위치한다. 월화거리는 강릉역에서 부흥마을까지 이어진 거리를 말하므로 월화거리를 설명하는 모든 안내문에 등장하는 유명한 마을이다. 하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 이 마을 자체의 볼거리는 많지 않다. 아직 열었는지, 안 열었는지 확인이 힘들었던 공유 주방이 오픈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외에는 특이한 점은 없었다. 


그런데 월화거리의 끝을 부흥마을로 설정한 것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강릉의 대표적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월화거리는 도시의 소외된 마을과 도시의 최고 번화가를 이었다. 산으로 막혀있고, 철로로 막혀있던 곳을 새로운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사람이 번화한 공간과 이어 버린 것이다. 


단절을 극복하고  변두리의 마을을 구도심의 최고 번화한 공간까지 이은 것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도시재생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는 바로 단절을 허무는 것이다. 세대와 세대의 단절뿐만 아니라 공간과 공간의 단절을 극복해야 소통의 공간, 공유의 공간, 나눔의 공간이 펼쳐진다. 그래서 월화거리 프로젝트에서 이 부흥마을의 위상은 견고하다. 


후기 


지쳤다. 적지 않은 거리를 빗속에서 걷느라. 그래도 걸었던 내 길 끝에서 부흥마을을 만나 볼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행운이다. 관광안내소 왼쪽 길을 다 둘러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었다. 풍물시장이나 먹자골목에서 사진 몇 장은 건졌지만, 월화거리의 끝에서 만난 '부흥마을'이 던져주는 묵직한 의미에 비할 바는 아니기에 굳이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어릴 적 가장 눈부셨던 강릉에서의 추억은 행복감만 남고 실체는 거의 사라졌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강릉의 현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영동의 대표 도시 강릉 역시 강원도 대부분의 도시처럼 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화거리가 품고 있는 가치가 대한민국 대표 피서지인 강릉에 널리 확산된다면, 강릉의 미래는 바뀔지도 모른다. 


근대화를 위해 도시를 가로질렀던 폐선 철로를 드러내어 공간과 공간을 잇는 멋진 재생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강릉의 사례는 앞으로 다른 지역의 도시재생 프로젝트 추진에 있어 교훈으로 삼을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무턱대고 떠난 강릉이지만, 강릉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내년에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 이 길을 걸을 것이다. 월화거리의 끝이 부흥마을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수다스럽게 떠들어 댈 내 모습이 눈에 훤하다. 아내와 아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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