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을 따라 정원 구경에 나선 나는, 소풍 가는 유치원생처럼 신이 났다. 담벼락을 가득 덮은 능소화를 지나자 키친 가든 초입에 닿았다. 그곳에는 하늘로 곧게 뻗은 완두콩이 목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잎 사이로 주먹만 한 완두콩이 탐스럽다. 알알이 맺힌 꼬투리가 통통하게 여물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성기게 짜인 그물망을 가벽 삼아 자란 콩 줄기들이 다부지고 실해, 마치 초록 담장 같다.
콩밭 아래에선 자줏빛 비트 줄기들이 슬쩍 얼굴을 내밀며, 존재감을 뽐냈다. 맞은편에서는 기는줄기인 딸기가 살금살금 뻗어 나와 자리를 넓혀 갔다. 비트도, 딸기도 제법 붉지만, 그 옆의 후쿠시아는 꽃잎도, 꽃받침도, 수술도, 심지어 줄기까지 새빨갛다. 이쯤 되니 여긴 누가 봐도 ‘빨강’ 테마 정원이다. 우단 동자꽃까지 나란히 붉게 피어선, 마치 ‘빨강 클럽’에 가입한 듯하다. 채소밭에 핀 붉은 꽃들이 어우러지며 정원에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정원 한 편에 설치된 미니 비닐하우스 안으로 파스칼이 들어간다. 나뭇가지 리스로 장식한 비닐하우스 문을 열자, 방울토마토와 콩이 사이좋게 반반씩 나뉘어 자라고 있다. 파스칼은 판자로 덧댄 가운데 길 사이에 서서 콩에 물을 줬다. 싱그럽게 물줄기를 맞는 콩잎의 모습이 마치 마른 목을 적시듯 시원하다. 물줄기가 잎에 닿아 옆으로 튈 때마다, 시원한 물방울이 피부를 스치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시원해졌다.
물을 흠뻑 주고 나와, 우리는 나무 울타리 앞에 활짝 핀 수국으로 갔다. 너른 사다리 모양의 나무 얼개 사이로 한 아름의 수국이 만개했다. 수국정원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수국이 가득하다. 햇살 좋은 오후에, 흰 수국잎 위로 햇빛이 일렁이고, 장식화 꽃잎마다 고운 펄을 뿌린 듯한 수국의 모습이 눈부시게 화사하다. 꼭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다.
꽃잎에 감탄하는 사이, 점 박힌 황갈색 나비가 수국 위로 날아 앉았다. 잇따라 흰 나비들도 빙그르르 돌다 나부끼며 착지한다. 곧이어 별 모양 꽃잎 위에 내려앉아, 안쪽 꽃의 꿀을 빨려는 듯 자세를 취했다. 나비는 꿀을 빨 때만큼은 팔랑이던 날개 잎도 얌전히 두었다. 아무래도 수국정원은 흰 나비들의 놀이터이자 급식소임이 분명했다.
저 너머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따고 있던 파스칼이 나를 불렀다.
“손바닥 펴봐”
“뭔데요?”
손 위에 올라온 것은, 서양 까치밥나무 열매인 ‘구스베리’였다.
“아! 예뻐요!”
500원짜리 동전보다 약간 더 큰, 청포도알 같은 초록색 반투명 열매다. 열매 위로 지구본의 자오선처럼 흰 줄무늬가 북극에서 남극 방향으로 그어져 있다. 여기서는 구스베리를 ‘그호자이 아 마크호(Groseillier à maquereau)’라고 불렀다. ‘마크호’는 고등어라는 뜻으로, 구스베리에 있는 줄무늬가 고등어의 무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실제 모양을 보니, 과연 그런 것도 같다. 그런데 나는, 그 줄무늬와 닮은 이야기보다는 고등어 요리에 구스베리를 넣으면 어떤 맛이 날까, 어떤 맛으로 변할까? 가 더 궁금해졌다. 상상만으로도 입안이 간질거렸다.
투명한 속이 신비로워 열매 한 알을 손바닥 위에 놓고 접사하듯 바라본다. 붉은 포도색 구스베리가 되기 전엔 이토록 투명한 녹색이라니.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안에 다른 세계가 있을 것만 같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속 움파룸파 같은 이들이 저 안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자, 조그마한 열매가 우주처럼 아득하고 거대하게 보였다.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이 파스칼이 나를 호박밭으로 불렀다. 노랗고 윤기 나는 호박이 소담스럽다. 굵은 줄기가 즐비한 호박밭 사이로 기다랗게 열매 맺은 진녹색 호박들도 한가득이다. 호박 잎과 땅사이사이로 보이는 노란 호박 꽃들이 앞으로의 작황도 풍년이라는 쉬운 힌트를 줬다. 때마침 수분을 담당해 줄 벌들도 정원을 놀이터 삼아 붕붕거리고 있었다.
원뿔로 솟은 구조물 위로 한련화 덩굴이 탐스럽게 타고 올랐다. 한련화잎을 매만지던 파스칼은 “꽃이 얼마나 이쁜데…” 라며 아쉬움을 되뇌었다. 이미 진 꽃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방패형 잎사귀만으로도 예쁜 한련화지만, 꽃과 잎을 모두 요리에 쓸 수 있어 아무래도 손길이 더 갔던 모양이다. 한련의 한 종인 마슈아는 뿌리까지 식용했다. 못내 아쉬운 표정이지만, 기둥 가득 덩굴져 잘 자란 잎들만으로도 내 눈에는 충분했다.
내가 식물 하나에 집중하는 동안에도, 파스칼은 계속 발길을 옮겨가며 식물을 돌봤다. 옆에서 작은 풀 한 포기를 뽑아 올리던 파스칼이 뽑은 뿌리를 재빨리 다시 묻는다. 마치 동면 중인 개구리를 잘못 깨운 듯, 얼른 다시 잠들라며 흙을 덮는 모양새다. “먹는 뿌리인데 아직 더 자라야 해.”하며 흙을 다독였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 잎을 가진 보랏빛 에키놉스가 담벼락을 따라 1m 높이로 줄지어 자라 있다. 모습이 꼭 개성 강한 밤송이 같다. 엉겅퀴를 닮은 가시 돋은 잎의 기개가 어쩜 정원의 가디언처럼 늠름해 보인다. 나는 늘 보랏빛 에키놉스의 가시 세운 모습을 좋아했다. 가시의 날 선 모습이 꼭 쌀쌀맞게 꾸민 기색이지만, 차가운 겉모습 뒤에 실은 따뜻한 면모가 느껴져서다. 에키놉스에게 한마디 하자면 “시치미 떼 봤자 말캉말캉한 마음인 거 다 알거든? 그렇게 뾰족한 척 안 해도 돼.” 가시는 따갑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에키놉스다. 파스칼이 후하게 준 비료 덕에 지금도 잎과 줄기 모두 단단하고 실하지만, 다음에 오면 에키놉스가 2m까지 훌쩍 자라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분홍색 쥐오줌풀 옆으로, 주머니가 불룩한 초록색의 꽈리가 숨어 있다. 가을 색을 입지 않아 잎을 들추어서야 꽈리인 줄 안다. 주홍빛 꽈리에 익숙한 나는 “요놈 찾았다! 변장하면 모를 줄 알고?!” 하고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올해, 한 번도 변신한 적 없는 꽈리는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 것 같다.
달래주지 못한 꽈리를 뒤로한 채, 나는 보라색 꽃이 진 프렌치 라벤더 앞에 멈춰 섰다. 이제 막 꽃이 져 꽃잎 몇 장만 남은 라벤더를 엄지와 검지로 살살 비비며, 향기가 남아 있길 바랐다. 그리고 손을 코에 가까이 가져가 향을 맡아본다. 역시, 사려 깊은 라벤더는 누구도 낙담하지 않도록 약간의 향기를 남겨두었다. 라벤더 특유의 향기가 성정만큼이나 향긋하다.
“하나 있다!” 파스칼은 작은 까치밥나무 열매가 있다며 잎사귀를 들춰 보여준다. 투명 아이보리빛에서 연분홍으로 익어가는 몇 알의 열매가, 관목 사이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예쁜 열매를 보면, 익은 뒤 잼이나 디저트로 만나는 것보다 식탁 위 작은 화병에 꽂아두고 오래도록 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방풍림 역할을 하는 왼쪽 아왜나무를 지나, 정원 오른쪽 돌담 쪽으로 향했다. 아이비 덩굴이 뒤덮은 담벼락 아래에는 고사리가 연초록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낮은 키로 푸릇푸릇하게 번진 고사리 군락은 마치 “지금 이 더위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라고 말하는듯 청량했다. 나는 더위 속에서,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고사리의 연초록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시원한 바람을 맞는 듯 상쾌했다. 그래서 고사리를 볼 때마다 늘 기분이 좋아졌다.
분홍, 노랑, 빨강… 장미가 저마다의 빛깔로 가지런히 어깨를 맞대고 자라 있다. 소개에 여념이 없던 파스칼도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오묘한 오렌지빛이 도는 장미 향을 맡으며 조용히 감상에 젖는다. 향기를 맡는 그녀의 표정에서 정원 깊숙이 스며든 삶의 일상이 느껴진다. 정원 속에 파묻혀 사는 삶의 결이 아름다웠다. 뒤이은 장미에 대한 설명에도 ‘어린 왕자’의 특별한 장미처럼 애정이 가득 담겼다. 장미는 그럴 수밖에 없는 ‘종(種)’이라는 걸 나도 예전부터 깊이 공감했다. 장미에 가까이 다가가 그 향을 함께 맡았다.
장미 옆으로 청록과 보랏빛 잎을 품은 안개나무가 눈길을 끈다. 두 가지 색을 머금은 달걀형 잎 위에 연한 자주색 원뿔 모양 꽃이 피어 있다. 아직은 작은 나무지만, 키가 커질수록 잎은 점점 짙은 자줏빛 붉은색으로 변하고, 꽃은 몽글몽글한 구름처럼 환상적으로 피어날 것이다. 나는 벌써 성장한 안개나무 아래에 서 있는 듯, 3m가 넘은 나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몇 년 후면 분명 이 안개나무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어려울 만큼 환상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그때 파스칼이 “오! 두더지!” 하며, 잔디밭 위에 흙 두 덩이가 올라온 곳을 가리켰다. 두더지는 재빨리 땅속에 몸을 감췄다. 촉촉한 흙색이, 오늘 아침 새롭게 땅을 개척한 흔적처럼 보인다. 화단 옆까지 두 덩이나 파 올린 걸 보니, 정말 바지런히 일한 모양이다. 전에 파놓은 잔디의 구멍은 상처가 아문 듯, 동그란 자국만 남겨 두었다. 귀여운 두더지를 현장에서 딱 마주치고 싶었는데, 늦고 말았다!
파스칼은 10여 년 전 별장에서도 정원 곳곳의 구멍들을 가리키며, ‘빌런’ 두더지가 해 놓은 일들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손으로 “여기, 여기, 그리고 저기도 많아”하며 구멍들을 짚었지만, 목소리의 톤은 그때와 달랐다. 이제는 이웃으로, 응당 받아들인 말투였다. 정원사로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체념과 애정이 담긴 목소리다.
두더지가 파놓은 잔디 너머로, 파스칼이 베로니카의 한 품종을 소개했다. 마치 ‘파스칼의 식물학 수업’ 같다. 질경이과에 속한 이 키 작은 베로니카는 자연 왁스 코팅 덕분에 잎이 유난히 반짝인다. 도톰하고 윤기 나는 잎은 언제나 터치를 부르며 “만져봐도 좋아”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반질반질한 잎에 손을 대 보았다. 기분 좋은 촉감이다.
가을을 미리 맞이한 듯한 휴케라 잎은 연두에서 빨강까지, 초록 잎들 사이에 낮게 퍼져 색을 연주한다. 이웃한 리아트리스는 긴 꽃대를 따라, 자주색 꽃망울을 위에서부터 차례로 틔울 채비를 했다.
바람이 불자 삼색 버드나무가 환기하듯 흔들리며 시선을 끈다. 날이 맑다가도 금세 구름이 끼는, 전형적인 브르타뉴의 날씨다.
흰색과 분홍이 섞인 삼색 버드나무 옆으로, 키가 1미터 가까이 자란 하얀 샤스타데이지가 쓰러져 있다. 파스칼은 바람에 꺾여 누운 줄기를 세워 올리며 앞서 걷는다. 그 길을 따라 한 마리 잠자리가 안내자처럼 내 앞으로 지나간다. 뒤따라 걷는 그 길 위, 눈높이에서 만나는 큰 키의 환한 샤스타데이지가 내 마음도 밝고 부드럽게 해주는 듯, 기분이 좋다.
데이지 길 끝에 다다르자, 파피루스가 이제 막 진 꽃을 매단 채 2m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줄기가 옥수수만큼 굵은 파피루스를 보며,
‘이렇게 굵었으니, 예전 사람들이 이것으로 글을 썼구나’ 싶었다.
정원은 곧 허브정원으로 이어졌다. 아욱을 닮은 레이디스 맨틀(Lady’s Mantle), 로즈메리, 민트 등 다양한 허브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민트잎 몇 장을 손바닥으로 비벼 코끝에 대어본다. 진한 향이 코안 가득 퍼졌다.
흰 카라, 개화를 기다리는 또 다른 수국, 노란 꽃이 지고 있는 서양 망종화(Hypericum) 곁을 지난다. 꽃 학교에서 다뤘던 식물들을 하나둘 지나치며 실습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순간, 정원에서 보내는 이 한때가 햇살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알던 식물을 만나는 반가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는 감정인 것 같다.
굵은 줄기와 두꺼운 잎 사이로 생명력이 넘실대는 정원. 그녀의 손길로 무럭무럭 자라나는 다른 아이들과의 만남은 다음을 기약하고, 우리는 저녁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파스칼의 정원에서는 감탄밖에 할 일이 없었다.
나는 ’하…’하는 숨소리와 “아! 너무 예뻐요.”만
연거푸 한듯하다. 파스칼은 자랑스러운 아이들을 하나씩 소개하며 미소 지었다.
정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정원은 곧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