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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Jan 20. 2020

너는 남보다 더 혹독한 봄을 지내야겠구나

이른 봄과 자아의 계절



'남보다 이른 봄을 맞이하는 존재들은 늘상 존재해왔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잘 못된 것, 이상한 것으로 치부해 늘 추방해 왔기 때문에 그들은 늘 주변에 있지만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오랜만에 등산을 다녀왔다. 한겨울의 바람이 차갑고도 달았다.


나의 등산코스는 보통 네 단계로 나눠지는데 오늘 첫 번째 단계에서 개나리를 만났다. 나는 속으로 '너는 남 보다 더 혹독한 봄을 지내야겠구나' 하며 지나쳤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철쭉을 만났다. 나는 앞서 개나리에게 건네었던 말이 생각나 잠깐 가던 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곧 과거의 기억 하나를 소환해 냈다.


2006년 11월 중순, 나는 제주에서 열리는 식물학 관련 학회에 참석했다. 당시 나는 고작 학부 2학년 생으로 학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제주도에 간다는 사실이 중요했었다. 첫째 날 주요 일정이 열리는 건물 주변에 대학교가 있어 잠시 그곳을 방문했다. 나보다 한 학번 높은 두 명의 선배들과 함께 였다. 한 참 캠퍼스를 둘러보던 중 나는 뭔가를 발견했다. 노랗고 작은 꼭 개나리 같이 생긴 것이 가을의 막바지에 피어있었다. 나는 "이거 꼭 개나리같이 생겼어요" 하고 한 선배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선배는 꽃 근처로 가까이 다가왔고, 한번 쓱 보더니 "이거, 개나리야. 생물학과가 그것도 구별 못하면 안 되지"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개나리가 봄이 아닌 계절에도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전까지 개나리는 반드시 봄에 피어야 한다는 전제가 뿌리 깊이 내 머릿속에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피어있는 개나리를 보고도 그것이 개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보다 이른 봄을 맞이하는 존재들은 늘상 존재해왔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잘 못된 것, 이상한 것으로 치부해 늘 추방해 왔기 때문에 그들은 늘 주변에 있지만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나는 여기서 한 인물이 생각났다. 이국종 교수님. 오늘 그분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던 그곳에서 떠나기로 결심을 하신 것 같다. 교수님은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그곳에 혼자 피어난 꽃 한 송이였을까? 그러면 그 꽃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자연의 계절 속 인간들은 자아의 계절을 따르는 인간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른 봄을 경험한 그들은 남들보다 더 혹독한 봄을 지내고도 또 더 혹독한 계절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나는 내 머릿속에 박혀있던 또 하나의 전제를 흐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자연의 계절을 따르는 다수의 우리가 과연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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