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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Mar 22. 202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먼지

드넓은 우주 속 먼지 같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가기

나는 햇살 좋은 오후 세상이 따뜻한 빛과 온도에 감싸였을 때 마음껏 그곳을 누빌 자유를 얻었다. 평일 오전 동네 영화관의 텅 빈 상영관을 전세 내어 기다리던 영화의 개봉일에 첫 관객이 되기도 하고, 마음 내킬 때까지 길고양이들의 나른한 오후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한가함 속에는 늘 무언의 압박과 유언의 강박이 자리 잡고 있다.


닥터 마리 퀴리라고 이름 지어준 동네 고양이


내가 영화를 보거나 고양이를 관찰하고 있을 그 시각, 과거의 나는 사무실 안에서 빛을 그리워하며 시들어가는 식물과도 같은 정신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때 보고 듣고 읽었던  음악, 글, 그림과 사진들. 그러니까 누군가의 의지로 창작된 예술, 그것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얻게 된 축복 같은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무엇인가로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 나는 고흐처럼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붓을 잡아야 하며, 밀레처럼 오랜 기간 세상이 내 그림의 유용성을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 없이 묵묵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피카소처럼 빛을 보지 못한 무명의 위대함을 세상으로 꺼내 발전시켜야 하며, 마티스처럼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잡는 일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와 같은 생각들로 스스로를 압박하고 강박적으로 생각을 반복한다. 내가 비록 그들과 같은 위대한 창조물을 만들어 낼 수는 없더라도 그들의 정신만은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품 이전에는 늘 위대한 인격이 존재한다. 나는 그들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평생을 게으름 없이 연마해온 테크닉과 생을 관통하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철학과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들의 작품은 누군가의 마음속 빈 공간을 채워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서



소유가 인간을 독립적으로 만들고 더욱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은 어느 한계 내에만 있는 일이다. 그 한계를 조금만 넘어서도 소유는 주인이 되고 소유자는 노예가 된다.
정신을 갖는 자만이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나는 그림을 그리며 늘 위로를 생각한다. 과거의 나처럼 시들어가는 누군가가 내 그림을 혹은 글을 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유용성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을뿐더러 정량적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도록 하며, 자신도 모르사이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며 마음속에 가벼운 물결과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게 한다. 이런 정신적 유용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자본주의와 경제논리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정신적 유용이나 따지는 한가한 한량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러한 사회이기에 누구나에게나 더욱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직한 책은 독자를 정직하게 만든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나는 내 그림이 너무 쉽게 그러진 그림이 될까 두려워진다. 그리고 가끔 좋은 눈을 가진 독자가 그런 나의 그림을 보고 내가 실제 표현하려던 이상을 꼬집으며 '아직 멀었군'이라고 말하는 상상도 한다. 그러면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되지!'라고 생각하며  더 정직하고 진심을 담은 그림을 그리게 된다. 니체는 정직한 책은 독자를 정직하게 만든다고 말했지만 그 반대이기도 하다.




모든 우수한 작품은 어딘가 여유를 지니고 있으며 초원의 암소처럼 누워있다.
언젠가 뛰어난 인물이 되길 바라는 사람은 자기 그림자까지도 존중해야 한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나는 나의 그림 속에 조금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캔버스를 가득 채우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여백을 여유로 표현할 수 있는 세련된 솜씨도 길러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니 또 생각이 복잡해지고 마음이 조급해진다. 갈길이 너무 멀다.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는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는데 이젠 조금 더 오래 살아서 내가 생각하는 뛰어난 인물이 되어보고 싶다. 그렇다, 나는 언젠가는 뛰어난 인물이 되고 싶다. 좋은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말로는 전할 수 없던 위로를 건네고 비록 그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어 부를 가져오지 않더라고 끝까지 가치 있다고 믿고 따르며 생의 마지막까지 그 행로를 묵묵히 걸어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런 날이 오면 '그래 봤자 드넓은 우주 속에 먼지 같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인걸!' 하며 크게 웃어보고 싶다.


Little Forest, illustration by K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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