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이 숲처럼 어울리는 세상을 위하여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월 대보름에 밥 훔쳐 먹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보름 전날 동네 형들과 몰려다니며 다른 집 부엌에서 밥을 훔쳐 커다란 그릇에 비벼 먹던 추억이 있다. 말이 훔쳐 먹는 것이지 집 주인이 일부러 훔쳐 먹을 밥과 나물을 준비해 놓았다. 열 나흗날 오곡밥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야 일꾼이 많이 생겨 풍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집주인들은 모른 척했다. 밥 굶는 아이들을 위한 공동체의 배려였을 것이다.
요즘 같은 아파트 문화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몇 달 전 아파트 앞집에 새로운 식구가 이사 왔다. 나는 그 집에 몇 명이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사 온 지 몇 달이 넘도록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봤다. 뭐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니 크게 마음 쓰지도 않는다.
많은 국민이 아파트나 빌라 같은 공동주택에 살다보니 주차 문제나 층간소음이 폭력 사건으로 이어지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세상이 각박해지며 사유지라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길을 막아 통행에 불편을 주는 일도 일어난다.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현상은 공동체 붕괴를 부추긴다. 각박해진 인심은 팍팍한 세상살이를 더 힘들게 만든다. 각자 열심히 살 뿐이다. 동창회 모임도 없어졌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자연히 선배와 후배 간의 끈끈한 정도 사라졌다. 정희성 시인의 <숲>은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한 시다.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숲>, 정희성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중국 전국시대 양나라 대부 송취가 초나라와 경계가 맞닿아있는 마을 현령으로 있을 때 일이다. 양쪽 모두 오이를 심었는데 양나라 사람은 부지런히 물을 주어 오이가 잘되었고 초나라 사람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 오이가 잘 자라지 않았다.
초나라 수령이 양나라의 오이가 잘 된 것이 싫어 밤중에 해코지하여 양나라 오이 중에 말라 버린 것이 생겼다. 양나라 정장이 보복으로 초나라 오이를 해코지하려 하자. 송취는 "이는 화를 같이 당하는 것"이라며 말리고는 사람을 시켜 밤중에 몰래 초나라 오이밭에 물을 주도록 하였다.
초나라 정장이 매일 아침 밭에 나가보면 오이밭에 물이 이미 충분하고 오이가 날로 좋아졌다. 알아보니 양나라 정장이 그렇게 한 일이었다. 초나라 수령은 대단히 기뻐하여 이 일을 초나라 왕에게 보고하였다. 초나라 왕은 양나라 사람이 남모르게 행한 일을 기뻐하여 크게 사례하고 양나라 왕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감사 이창정이 순천부사로 있을 때 일이다. 이창정과 이름도 같고 관품도 같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가난한 선비가 딸의 혼수에 도움 받으러 왔다가 사또를 만나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순천부사가 친구인 줄 알고 찾아온 선비는 크게 실망하여 머뭇거리는데, 이창정은 자리를 권하고 까닭을 물었다.
“어떤 일로 오셨소?”
선비가 사실대로 말했다.
“딸년이 혼사를 앞두고 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도움을 받을까 찾아왔습니다.”
이창정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고는 이방에게 일렀다.
“이 선비를 후하게 대접하고, 혼수를 준비해주되 한 가지도 빠지지 않게 해드려라.”
선비는 "비록 내 친구가 마련해 준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하지는 못할 것이요" 하며 무척 고맙게 여겼다.
오고 가는 정이라는 게 있다. 맛있는 음식이 있어 옆집에 나눠주면 빈 그릇을 그냥 주지 않고 음식을 담아 주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스승의 날 제자들이 스승에게 드리는 조그만 선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스승의 날에 아무런 선물을 못하게 법으로 금지를 해 놓았다. 선물이 지나쳐서 문제가 일어난다지만 사제 간에 조그만 선물도 주고받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는 문제가 있다. 세상 각박한 현상은 결혼식장에도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주례 볼 사람을 돈 주고 산다고 한다. 하객까지도 아르바이트란다. 주례로 모시려면 식전에 인사를 드리러 가야하고 식이 끝나면 답례품을 들고 인사를 가는 번거로움이 싫다고 한다. 점점 사람 사는 맛이 사라지는 현상이다. 다음 사례를 보자. 청렴결백도 좋고, 원리 원칙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나치면 세상이 각박해진다는 의미로 정약용이 목민심서에 기록한 내용이다.
인조가 병에 걸렸다. 마침 궁중의 주방에는 입에 맞는 음식이 없었다. 인조는 갑자기 수원 약과가 생각이 나서 내시를 불러 말했다.
“내가 지금 입맛이 없는데 수원 약과가 먹고 싶구나. 수원에 가서 약과를 가져오도록 하라”
내시가 수원에서 와서 수원 부사 조계원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입맛이 없는 와중에 특별히 수원 약과를 찾으시니 구해주시오.”
부사가 요구를 거절하며 말했다.
“자네 말은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하지만 수원부에서 약과를 사사로이 헌납하는 것은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예가 아니라네. 조정의 명령이라는 공식 절차에 따른 문서가 없으면 약과를 구해줄 수 없네. 전하께 그리 전하시게.”
그 말을 들은 인조는 비록 군신 사이지만 인척으로 얽힌 사이인데 어찌 그러한 인정조차 없냐며 웃었다고 한다. 인조가 인척의 인정을 언급한 것은 조계원의 형인 조창원이 자신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수원부사 조계원이 인조의 처 작은 아버지인 셈이다. 조카사위인 자기에게 약과를 두고 깐깐하게 군 조계원의 처사에 박정하다고 인조가 한마디 한 것이다.
고적 사문(士文)은 성품이 차갑고 거칠었다. 관리가 되었어도 녹봉을 받지 않았다. 아들이 수령의 음식을 만드는 관주의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칼을 씌워 옥에 여러 날 가두고 곤장 2백 대를 때린 후 수레를 태우지 않고 걸어서 서울로 돌아가게 했다.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적발하여, 베 한 자나 쌀 한 말 받은 장죄도 관대하게 봐주는 일이 없이 탄핵해서 영남으로 귀양 보낸 자가 1천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가 풍토병으로 죽으니, 그의 가족들이 울부짖었다.
고적사문(庫狄士文)이 그들을 잡아다 매를 때리니 때리는 매가 그 앞에 가득하였으나 울부짖는 소리는 더욱 심해갈 뿐이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사문의 포악함이 맹수(猛獸)보다 더하다.” 하였다. 그로 인해 벌을 받아 파면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숲처럼 어울리는 세상을 위하여
송취와 이창정이 한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 끈끈한 정을 느끼게 한다. 각각의 나무가 아니라 어우러지는 숲을 만든 사람이다. 반면 조계원을 보면 빡빡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친 청렴은 인간의 정마저도 말살한다. 고적 사문은 법을 오히려 백성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맹상군은 사람을 모아 숲을 이룬 사람이다. 앞에서 우리는 맹상군의 식객 풍훤이 설땅에 가서 백성들이 맹상군에게 진 빚을 모두 탕감해 준 이야기를 보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숲처럼 어울리게 만드는 비결은 베풂과 희생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맹상군(전문)은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왕족이며 정치가다. 맹상군은 천하의 유능한 선비들과 제나라로 망명해 오는 인사들을 식객으로 우대했다. 유력한 정치가 전영의 아들이지만 아들 대접을 받지 못할 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아버지께서 제나라의 재상 일을 맡아 지금까지 세 분의 왕이 계셨지만 제나라는 그 땅을 넓히지 못했고, 집에는 만금의 부가 쌓여 있지만 문하에 유능한 사람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듣기에 장수의 집에서는 장수가 나고, 재상의 집에서는 재상이 난다고 합니다. 지금 후궁들은 땅바닥에 끌리는 수를 놓은 명주옷을 입고 다니나 선비들은 짧은 바지도 얻어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인과 첩들은 쌀밥에 고기를 먹지만 선비들은 술지게미나 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또 재물 잔뜩 쌓아두었다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주려고 하시면서 나라의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잊고 계시니,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이상합니다.”
이에 전영은 아들을 예우하여 집안일과 빈객을 대우하는 일을 맡겼다. 빈객들이 날이 갈수록 모여들었고 명성이 제후들의 귀에 들어갔다. 제후들이 모두 사람을 보내 설공 전영에게 문을 태자로 삼으라고 권하니 전영이 이를 받아들였다. 전영이 죽자, 시호를 정곽군이라 했다. 문이 과연 설에서 대를 이으니 이가 바로 맹상군이다.
맹상군이 설에 있을 때 제후와 빈객뿐 아니라 도망친 범죄자들을 초빙하니, 모두 맹상군에게로 왔다. 맹상군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이들을 후대하니 천하의 인재들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식객이 수천이었지만 귀천 없이 모두 맹상군과 동등했다. 맹상군이 객을 맞이하여 앉아서 대화하면 병풍 뒤에 늘 시사가 있어 맹상군과 객의 대화를 기록했는데 친인척이 사는 곳을 물었다. 객이 떠날 무렵이면 맹상군은 이미 사람을 보내 친척을 방문하여 예물을 드린 뒤였다. 맹상군이 언젠가 밤에 객과 식사를 했는데 누군가 불빛을 가렸다. 객은 밥과 반찬이 같지 않다고 여기고 화를 내며 밥그릇을 엎고 자리를 떴다. 맹상군이 일어나 직접 밥그릇을 들고 객의 것과 비교하게 해주었다. 객은 부끄러워 자살했다. 이 일로 인재들이 맹상군에게 더 많이 모여들었다. 맹상군은 객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잘 대우했으므로 사람마다 각자 자신이 맹상군과 친하다고 여겼다.
어디를 가도 서로 이익만 놓고 다툴 뿐, 양보와 배려와 희생이 없어 안타깝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숲을 이루려면 개개인은 어느 정도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각박하다고 탓한다면 숲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가 맹상군이나 순천부사 이창정 만큼은 못하더라도 양나라 정장처럼은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