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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환 Sep 18. 2023

맨발로 길거리에 나섰다가 돌아오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최빈국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볼 때가 있다. 여지없이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우리나라 모습도 그랬으리라. 맨발은 가난이다. 약자다. 고단한 삶이다. 맨발은 시련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징이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큰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종일 허드렛일하고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는 가장의 상징이다. 그러니 그 맨발은 애처롭고 측은하면서도 부처의 발처럼 성스러운 것이다. 문태준의 <맨발>을 읽으며 숙연해지는 이유다.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 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ㅡ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맨발>, 문태준     


  삶은 어쩌면 맨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맨발로 와서 맨발로 가는 인생, 맨발로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겠느냐 말하지만, 그것처럼 무책임한 말이 있을까. 맨발을 벗어나려고 열심히 사는 일은 성스럽다. 


  2020년부터 3년여 동안 코로나 팬데믹은 일자리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밤업소에서 음악을 하는 친구가 있다. 정부 규제에 따라 업소가 문을 닫자 처음엔 얼마 안 가겠지 하면서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느긋하게 생각했다. 펜데믹 상황이 1년을 넘자 점차 은행 잔고가 줄어들어 할 수 없이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한번은 대리운전 예약이 있어서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넘게 갔는데 약속 시간 5분 전에 취소당했다. 허탈감과 분함이 엄청나게 컸다. 취소한 사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만 사과 한마디 없는 것이 대리운전을 무시하는 듯해서 속상했다고 한다. 이럴 때 느끼는 초라함은 자존감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그 순간 친구는‘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을 것이다.


  나이를 먹고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을 하면 재취업을 하려고 해도 좋은 일자리는 없고 대부분 택배, 경비, 청소 같은 일을 하는 자리밖에 없다. 젊었을 때는 몰라도 나이 들어 맨발은 더욱더 시리다. 물론 세상을 알 나이가 되어 웬만한 일은 이해하고 견디는 내공을 쌓았다고 하지만 슬픈 일이다. 맨발 같다는 말은 무시당한다는 뜻이다. 갑질에 취약하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 시에서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맨발의 처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우리 주변에 맨발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맨발의 처지가 되었을 때 처신 방법은 앞의 글에서 여러 차례 지혜를 얻었다. 계포, 범저, 오자서, 이사, 소진이 모두 맨발 상태에서 부활했다. 우리는 영웅들 이야기에서 인내와 기다림과 준비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러면 맨발인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까? 소진의 형수처럼 무시해야 하나, 아니면 엄중자처럼 사람을 귀하게 대해야 할까?      


  섭정은 지땅 심정 마을 사람이다.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제나라로 달아나서 가축 잡는 일을 했다. 복양 사람 엄중자가 한나라 애후를 섬겼는데, 그는 한나라 재상 협루와 사이가 나빴다. 엄중자는 죽임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 달아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자기 대신 협루에게 원수를 갚아줄 사람을 찾았다. 제나라에 이르자 어떤 사람이 섭정이라는 용감한 사나이가 원수를 피해 백정들 사이에 숨어 산다고 말해주었다.


  엄중자는 섭정의 집을 찾아가 사귀기를 청하고 자주 오간 뒤에 술자리를 마련하여 섭정의 어머니에게 직접 술잔을 올렸다. 술이 거나해지자 엄중자는 황금 백 일을 받쳐 들고 섭정의 어머니께 나아가 장수를 축원했다. 섭정은 너무 많은 예물에 놀라 극구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엄중자가 억지로 주려고 하자 섭정은 사양했다.

  “저에게는 다행히 늙은 어머니가 계십니다. 집이 가난하고 타향에 떠돌며 개돼지 잡는 일을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얻어 어머니를 봉양합니다. 어머니를 봉양할 음식은 직접 마련할 능력이 있으니 당신이 주는 것을 받지 않겠습니다.”


  엄중자는 사람을 물리친 뒤 섭정에게 말했다. 

  “내게는 원수가 있는데, 그 원수 갚아 줄 사람을 찾아 제후들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제나라에 와서 당신의 의기가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황금 백 일을 드려 어머니의 음식 비용에 쓰시게 하여 서로 더욱 친하게 사귀자는 뜻이었지 어찌 감히 달리 바라는 게 있겠습니까!” 


  이에 섭정이 대답했다.

  “제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여 시장 바닥에서 백정 노릇을 하는 까닭은 오로지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제 몸을 다른 사람에게 감히 허락하지 못합니다.”

  엄중자가 아무리 권해도 섭정은 끝내 받지 않았다. 엄중자는 끝까지 빈객과 주인의 예를 다하고 떠났다.          

맨발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

  한참 뒤 섭정의 어머니가 죽었다. 장사를 치르고 상복을 벗은 뒤, 섭정이 결심했다.

  “아, 나는 시장 바닥에서 칼을 두들기며 짐승 잡는 백정이고, 엄중자는 제후의 대신이요 재상인데, 천 리 길도 멀다 않고 수레를 몰고 찾아와 나와 사귀었다. 내가 엄중자를 대한 것은 너무 빈약했고, 이렇다 할 만 한 큰 공도 없었다. 엄중자는 황금 백 일로 어머니의 장수를 빌었는데, 내가 비록 받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한 것은 오로지 나를 깊이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어진 사람이 격분하여 원수를 쏘아보면서 나 같은 시골뜨기를 가까이하고 믿어주었으니, 내가 어찌 가만히 있을쏘냐! 또 전날 내가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나는 오로지 늙은 어머니가 계시다고 핑계를 대었다. 어머니는 이제 천수를 마치셨으니, 나는 앞으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 


  섭정이 서쪽 복양으로 가서 엄중자를 만나 말하기를, “전날 당신께 허락하지 않은 까닭은 오로지 어머니가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불행히 어머니는 천수를 다하셨습니다. 엄중자께서 원수를 갚으려는 이가 누구입니까? 제게 그 일을 맡겨 주십시오.” 하였다. 엄중자가 자세하게 알려 말하기를, “나의 원수는 한나라 재상 협루요. 협루는 또 한나라 군주의 숙부이기 때문에 종족이 번성하여 많으며 거처의 경비가 매우 삼엄하오. 내가 사람을 시켜 찔러 죽이려 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소. 지금 당신이 다행히 마다하지 않으니,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수레와 말과 장사들을 보태 주겠소.” 했다.


  섭정이 말하기를, “한나라와 위나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 그 나라 재상을 죽이려 하는데, 그 재상이 또 임금의 친족이라면 이러한 형세에서는 많은 사람을 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많으면 득실이 생기지 아니할 수가 없고, 득실이 생기면 말이 새어나가며, 말이 새어나가면 한나라 전체가 당신을 원수로 여길 텐데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래서 수레와 말과 사람들을 사양하고 섭정은 엄중자와 헤어져 홀로 떠나갔다. 칼을 차고 한나라에 이르렀는데, 한나라 재상 협루가 마침 관청 당상에 앉아 있었다. 무기를 들고 호위하는 자가 아주 많았다. 섭정이 곧바로 들어가 층계를 올라가서 협루를 찔러 죽이니, 좌우의 부하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섭정이 크게 고함을 지르며 쳐 죽인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그런 뒤에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창자를 끄집어내어 마침내 죽었다. 


  한나라에서는 섭정의 시체를 거두어 시장 바닥에 드러내 놓고 그가 누구인지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한나라는 현상금을 내걸고 재상 협루를 죽인 자를 말하는 사람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했지만, 오래도록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섭정의 누나 섭영이 다른 사람에게‘어떤 사람이 한나라 재상을 찔러 죽였는데, 그 범인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며, 그 시체를 드러내 놓고 천금을 현상금으로 걸었다’는 말을 듣고, 근심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내 동생인가? 아, 엄중자가 내 동생을 알아주었구나.” 하고 곧바로 일어나 한나라에 가서 시장에 가니, 죽은 사람은 과연 섭정이었다. 섭영은 시체 위에 엎드려 매우 슬프게 울고 나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지땅의 심정 마을에 살던 섭정입니다.” 하니,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나라 재상을 죽였기 때문에 왕이 그 이름과 성을 알려고 천금의 현상금을 걸었소. 부인은 이 말을 듣지 못했소? 어찌 감히 와서 그를 안다고 하시오?” 하였다.


  섭영이 대답했다. “그 말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섭정이 오욕을 무릅쓰고 시장 바닥에 스스로 몸을 던져 백정이 된 것은 늙은 어머니가 다행히 병이 없고, 제가 시집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천수를 누리시다 돌아가시고 저도 이제 시집을 갔습니다. 엄중자가 인물됨을 살펴 알고는 제 동생을 곤궁하고 천한 중에서 들어 올려 사귀었으니, 그 은택이 매우 두텁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선비는 본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합니다. 섭정은 지금 제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훼손하여 저를 이 일에 연루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제가 어찌 제게 닥친 죽음이 두려워서 동생의 장한 이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나라의 시장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섭영은 이윽고 하늘을 우러러 크게 세 번 외치더니 몹시 슬퍼하다가 마침내 섭정의 옆에서 숨을 거두었다.


  진나라와 초나라, 제나라와 위나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모두 말하기를, “섭정만 훌륭한 게 아니라 누나도 장한 여인이다. 섭정의 누나가 참고 견디는 성격이 아니라서 시신이 버려지고 해골이 드러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 리 험한 길을 달려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남매가 함께 한나라 시장 바닥에서 죽음을 맞을 줄 섭정이 미리 알았더라면 감히 엄중자에게 자신을 바치지는 않았으리라. 엄중자도 인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 용감한 선비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섭정은 맨발이었다. 엄중자는 맨발 상태 섭정을 귀히 여겼다. 물론 개인의 욕심을 위하여 그리했다지만 한 나라의 재상을 역임한 사람이 시장 바닥 백정과 친구가 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래 사람을 시켜 의중을 떠보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섭정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맨발을 맨발로 보지 않은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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