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만점 과일은 왜 질병에 취약할까?
바나나는 우리가 아는 상식을 매우 벗어나는 작물입니다. 바나나 나무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 녀석은 풀입니다. 여러해살이 풀입니다. 분류학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자라면서 나이테를 만듭니다. 그런데 바나나는 잎사귀 밑부분이 겹쳐져 줄기(stem)가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바나나 줄기(기둥)로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또하나, 바나나 열매에는 씨앗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바나나에 씨앗이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야생 바나나는 씨앗이 있습니다. 태국의 밀림이나 일본에도 야생 바나나가 남아 있다고 하죠. 그런 바나나에는 파파야처럼 씨가 엄청 많습니다. 우리가 먹는 ‘씨없는’ 바나나도 단면을 잘라보면 까만 씨앗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바나나 속에 씨앗이 가득 차 있었다면 지금처럼 인기있는 과일이 될 수 있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스타벅스의 상품 바구니에 진열되지 않았을 테고, 또 제국주의 시대부터 플랜테이션의 대표작물이 되지도 못했겠죠. 다행히(?) 육종 과정에서 씨앗을 만드는 능력이 퇴화한 품종을 찾았고, 그게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씨 없는 바나나, 즉 암술과 수술이 만나는 생식성장 과정이 생략되다 보니 똑같은 바나나를 전 세계 사람들이 먹는 기현상이 벌어집니다. 어느 나라를 가던 바나나 맛은 같습니다. 캐번디시(Cavendish) 한 품종뿐이기 때문이죠. (정확히는 그렇지 않은데 상품으로 수출되는 대부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씨가 없으니 씨앗으로 번식하진 못하지만, 영양생식이라는 방법으로 다음 세대를 이어갑니다. 줄기, 잎, 뿌리 같은 영양 기관으로 생식하는 걸 영양생식이라 말합니다. 쉽게 꺾꽂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나나는 자라면서 뿌리 주변에 새끼 나무들이 자랍니다. 죽순처럼 땅속줄기에서 분화해서 흙을 뚫고 올라옵니다. 이 새끼 나무를 분할해서 심으면 똑같은 바나나가 됩니다. 부모와 유전자가 완전히 똑같은 바나나 나무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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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씨가 없다고 나무에 꽃까지 없는 건 아닙니다. 단지 수분이 되는 기능이 퇴화했을 뿐입니다. 바나나 끝이 검은 것은 바바나 꽃이 마르면서 생긴 자국입니다. 바나나는 한 나무에 어른 팔뚝만한 수꽃이 하나씩 있습니다. 이걸 나물로도 먹습니다. 수꽃 아래 줄기에는 바나나 다발이 생기고 그 바나나에는 꽃이 달립니다. 원래는 수분이 되어 씨앗이 맺혀야겠지만, 바나나는 “왕년에 나도” 그랬다는 듯 그냥 폼만 잡습니다. 그래서 식물호르몬이 없이도 먹음직스러운 바나나 과육을 만듭니다. 이걸 단위결실(單爲結實)이라고 합니다.
왜 과일나무는 타가수분(cross pollination)이라는 불편한 방법으로 씨앗을 만드는지에 대해 이미 한번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병행충과 기생충 때문이라고요. 캐번디시 이전에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그로 미셸(Gros Michael)' 품종 바나나 역시 곰팡이가 일으키는 파나마 병 때문에 거의 사라졌습니다. 근래에 캐번디시 바나나 역시 같은 운명에 처했다는 기사를 정말 많이 보셨을 겁니다. '바나나 멸종'이란 뉴스 말입니다.
캐번디시 품종이 등장할 수 있었던 건 맛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파나마병을 일으키는 '푸사리움 옥시스포룸(Fusarium oxyporum, 바나나 마름 병균)'에 강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맛은 '그로 미셀'이 더 좋았다고 하죠. 그 맛을 못 봐서 아쉽기는 합니다. 그런데 파나마병을 일으키던 곰팡이의 변종이 생기면서 캐번디시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됐습니다. 생식성장의 결과로 모두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균이 감염되면 다 함께 병에 걸리게 되는 거죠.
글쎄요! 세상에는 여전히 재래종 바나나들이 다수 있습니다. 우리 식탁에 오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1,000여 종의 바나나가 있다고 하죠. 가래떡처럼 불에 구워 먹는 플랜틴 바나나, 빨간 바나나, 새기 손가락만 한 바나나 등등...... 지금은 상품성이 좀 떨어질 뿐이죠. 육종가들은 결국 이런 재래종과 교배를 통해 곰팡이 병에 견디는 새로운 바나나 품종을 만들겠죠.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씨 없는 바나나를 계속 먹을 겁니다.
바나나는 열대지방 농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작물입니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영양가도 높아서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또한 수많은 농민들이 바나나에 생계를 의지합니다. 바나나를 먹을 때마다 라오스에서 만난 한 가족이 떠오릅니다. 바나나 수확으로 비 오듯 땀을 흘리지만, 웃는 미소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들이 행복하길 바라봅니다.
상식으로 알아둬도 나쁘지 않은 것 하나만 더하고 글을 마칠까 합니다. 세계 최대 바나나 생산국은 어디일까요? 아프리카 어디? 태국? 정답은 인도입니다. 브라질이 두번째 생산국이라고 합니다. 가끔 아열대지방을 여행하게 된다면 그 지방 고유 품종의 바나나를 맛볼 것을 추천드립니다. 분명 색다른 경험일 겁니다.
(*) 위 사진은 다음의 사이트에서 가져왔습니다.
(1) Wild bananas around Chiang M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