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연구의 길에서 발견한 나
처음 이공계 대학원에 발을 들였을 때, 나의 목표는 단순했다. 학문적 성취를 이루겠다는 열정이 아닌, 현실의 필요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취업을 위해 나는 그 길을 택했다.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학문을 향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한계 안에서 나의 가능성을 조금 더 넓혀보고자, 좁아진 미래의 길을 조금이라도 확장하고자 발을 내디뎠다. 그 출발은 너무나도 냉정한 현실의 반영이었고, 가난과 꿈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지와도 같았다.
그러나, 대학원의 길은 생각보다 더 깊었다. 연구실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 나는 나의 계획을 되뇌었다. "석사만 마치고, 취업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두 손 가득 쥔 자료들과 머릿속에 가득한 결심들이 나를 붙들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학문을 사랑하기보다는 현실을 위해 공부했다. 그러나, 학문이라는 바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거대했다. 하나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수십, 수백 페이지의 논문을 읽고, 한 번의 실험을 위해 밤을 새워가며 실험실에 남아야 했다. 이론과 현상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복잡한 미로 속에서 나의 정신은 더 깊이 빨려 들어갔고, 어느 순간 나는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들에 지쳤던 내가, 어느 순간 작은 성취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간단한 실험의 결과가 이론과 맞아떨어졌을 때의 전율, 내가 고민하고 예측한 방향으로 실험 결과가 흘러갔을 때의 희열, 그리고 그 모든 조각들이 하나로 맞아떨어져 마침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냈을 때의 그 성취감. 그 감각은 그동안 내가 단지 현실의 필요 때문에 좇아왔던 공부가 사실은 나에게 어울렸다는 것을 서서히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론과 실험이 맞물려 돌아가며 원인과 결과가 선명해지는 순간, 나는 마치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의 현상을 풀어내기 위해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쌓아가고, 이론을 정리하고, 수식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제 해결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석사 과정을 마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그 과정 속에서 내 삶의 방향이 천천히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석사 과정을 끝내며 나는 다시금 갈림길에 섰다. 원래의 계획대로 취업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나를 사로잡은 이 새로운 열망을 따라 더 깊은 연구의 세계로 들어갈 것인가? 어느 순간,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결심을 내렸다. 더 깊이 나아가야 한다. 현실의 필요에서 비롯된 선택이 이제는 나 자신의 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박사 과정을 결심했고, 그 결심은 나의 삶을 또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박사 과정의 삶은 석사와는 전혀 달랐다. 연구의 깊이와 넓이,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졌고, 마주해야 할 난제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그러나 그만큼 나의 역할도 달라졌다. 단순히 주어진 문제를 풀어나가는 연구자가 아닌,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새로운 이론을 세우고, 기존의 방법론에 도전하는 창조적인 연구자가 되어야 했다. 나의 한 마디가 연구의 방향을 결정하고, 내가 작성한 보고서 하나가 프로젝트의 생사를 가늠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 무게는 나를 짓누르기도 했지만, 동시에 더 큰 성취감과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박사 과정에 진입하면서, 다행히도 인건비가 이전보다 더 많이 주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금전적 지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온전히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했다.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그 시간을 연구에 온전히 쏟아부을 수 있었다. 여전히 생활은 빠듯했고, 고시원에서의 생활도 그대로였지만, 나는 그 상황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이 힘들고, 육체와 정신의 피로가 겹겹이 쌓여갔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나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있었다. 하나의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밤을 새우며 연구실에 남아 있을 때조차, 나는 그 과정 자체가 너무나도 즐거웠다. 과거의 나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토록 현실적인 필요에서 시작된 길이 이제는 내 안에서 순수한 지적 열망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그 힘겨운 길이 나에게 지독한 고통과 함께 깊은 희열을 안겨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사 과정은 나에게 두 가지를 안겨주었다. 하나는 더 깊어진 학문적 성취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후회하지 않을 나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이었다. 비록 이 길을 걸어오며 많은 기회비용이 날아갔지만, 그러나 나는 결코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연구의 세계 속에서 나를 찾았고, 그 속에서 나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마주했다.
이제, 먼 미래를 바라보는 나에게 확실한 것은 하나다. 내가 걸어온 이 길은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었다는 것. 몸과 마음이 지칠 때마다,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왔던 나를 되돌아볼 때마다, 나는 내 안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지적 열정을 다시금 느낀다.
가끔은 처음의 계획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나은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내가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취업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나의 길은 학문의 깊이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