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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Aug 20. 2022

작별(作別)

1.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나 헤어짐을 당하는 일과 헤어짐을 만드는 일이 또한 사뭇 다른 것이다.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離別)이라 하고,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헤어짐을 작별(作別)이라 한다. 이별은 '겪는' 것이고 작별은 '하는' 것이다. 전자는 감상과 통속에 더러 곁을 내주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작별은 인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이기 때문이다. 헤어짐을 '짓는' 일이다. 작별의 안간힘과 준엄함을 노래할 때 그의 시는 가장 아름다워진다. 그는 헤어짐을 지으면서 시를 짓는다."


  이별과 작별의 차이를 말하면서 평론가는 작별에 담긴 의지와 결연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후의 삶 속에 짙게 드리울 슬픔과 고통, 상실과 회한을 떠올린다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도 하는 작별의 결심에는 헤아릴 수 없는 처연함이 있다.      


  '당신 없는 삶을 무엇으로 견딜 수 있을까?'


2.

  시인 이형기의 <낙화>는 우아하고 단정한 말이 아름다운 리듬에 실려 오래 기억되는 시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시가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가야 할 때를 어떻게 정확히 알 수 있을까?

  나는 이 앎을 그다음에 오는 문장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에서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가야 할 때를 알기 위해서는 '격정'과 '인내'의 시간이 모두 필요한 것은 아닐까? 격정처럼 '강렬하고 갑작스러워 누르기 어려운' 감정의 시간도 있어야 하고 인내처럼 또한 사랑과 함께 오는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시간도 있어야 할 것 같다. 격정과 인내 모두 사랑의 시간이다.

  그래야 꽃이 지는 것이 그저 지금 저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한'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꽃은 지금 지지만 그것으로 미래의 또 다른 시간이 열릴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가장 '꽃답게 죽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작별은 자기였을 때 가장 자기다울 때 가능할 수 있다고 나는 또 생각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는 오래 평론가의 말과 시인의 시를 떠올렸다. 서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작별을 선택하고 결심하고 결단하고 행동했다. 그녀에게는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라고 이야기할 만한 격정의 시간도 해준의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라는 말로만 버틴 인내의 시간도 있었다. 그래서 가장 서래다운 선택이고 결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래가 머리끈으로 긴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고 녹색 양동이로 바닷가의 모래를 파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눈물이 나기 시작했는데 서래의 작별은 그녀의 입술처럼 단호했지만 그녀의 눈동자처럼 애틋했기 때문이다.


  <낙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내 영혼의 슬픈 눈'   


3.

  작가 한강의 소설 <작별>은 벤치에 앉아 잠깐 잠이 들었다가 눈사람이 되어버린 어떤 여자의 이야기다. 조금씩 녹고 부서지다 사라질 운명에 처한 그녀는 자신과 관계 맺은 사람들과 지나온 자신의 삶과 어떻게 작별할지 생각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 손을 잡기도 하고, 아이와 끝말잇기 놀이를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고운 속눈썹 같던 눈송이들은 일분이 채 지나지 않아 진눈깨비가 되어가고'  '이마와 눈썹이 쉬지 않고 녹아내려 어느 시점부터 제대로 사물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작별의 순간은 이렇게 끝이 난다.

  "젖은 구두를 벗자, 이미 발가락의 경계가 사라진 두 개의 둔중한 눈 덩어리들이 진흙땅을 디디며 뭉개어졌다. 무엇을 돌아보는지 알지 못한 채 사력을 다해, 그녀는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 버리는 순간에도 '사력을 다해' '가까스로' 당신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내게 있기를 깊어지는 여름의 밤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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