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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Sep 11. 2022

사랑할 결심, 슬퍼할 용기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1.

  시인 진은영의 <청혼>을 가을 저녁에 읽는다. 오직 한 여자를 사랑할 결심을 한 어떤 이의 다짐과 각오가 순정한 약속의 언어와 아름답고 순수한 감각에 실려 전해져오는 시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

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진은영, <청혼>



2.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한다'라고 했으니 나의 사랑은 시간적으로 오래되었을 테지만 그것이 꼭 물리적인 시간이 오래되었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너를 알게 되고 사랑한 시간이 비록 짧았어도 나의 사랑에는 오래된 거리가 품고 있을 사람과 풍경과 날씨와 계절과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는 마음일 것 같다. 너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으며 너의 오래된 시간과 삶의 공간을 모두 사랑할 만큼의 사랑이라는 고백일 것 같다. 그만큼 너를 사랑한 날들이 활기차고 강렬했던 '벌들처럼 웅성거렸던' 시간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사랑은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와 같은 명랑함과 즐거움을 너에게 주면서도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는' 사랑, 시간에 기대어 가지 않으려는,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도 달라지지 않으려는 단호한 사랑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마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의 너와 나의 시간에 충실하고자 하는 정성스러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3.

  시 속의 나는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했던 맹세'를 기억하고 그것을 오래 지켜나갈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것은 달콤한 사랑의 말이 아니라 정직한 맹세의 말이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고단한 현실과 해결하지 못한 아득하고 막막한 불안들 앞에서도 '나'는 가장 순수했던 시절 너와 함께 했던 약속을 찾아내고, 온전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을 너에게 모두 돌려주기 위해 애쓴다.

  어쩌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사랑의 모습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4.

  시인은 시의 마지막에 이 '청혼'의 핵심을 담아두었다. 나의 청혼은 모두가 아닌 오직 단 한 여자를 위해 마시는 쓴잔이다. 그것이 쓴잔인 이유는 물컵에 투명 유리 조각처럼 그 여자의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너의 슬픔을 너의 슬픔으로만 두지 않겠다는 이 마음, 너의 슬픔이 혹시 나의 슬픔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투명 유리조각을 삼키는 고통일지라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은 그런 정도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단단히 말하고 있다.


  사랑을 결심하는 마음은 당신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가져오려는 용기이며 당신의 슬픔을 위해 함께 싸우겠다는 용기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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