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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Jan 29. 2023

사랑하는 것을  따뜻하게 떠나보낼 수 있는 마음

1.

  시인 나희덕의 <허공 한 줌>을 읽은 것은 2006년이었던 것 같다. 그때 첫째 딸아이는 두 살이었다. 이제 와 보니 시가 실린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의 첫 장에 나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사랑하는 채원, 네가 슬픔을 알게 되더라도 그 슬픔은 결국 너의 몫이겠지. 그때 아빠는 무엇을 해야 할지. 나에게도 지혜를 주렴."

그리고 <허공 한 줌>의 다음 문장에 빨갛게 밑줄을 그어놓았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수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 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그날은 아이를 데리고 서점에 갔던 것 같고 나는 서점 옆 가게에서 장난감을 사주었던 것 같다. 아이는 장난감을 나는 시집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 아이는 열아홉 살이 되었다.


  나는 아이가 다칠까 봐 걱정이 많은 아빠였다. 놀이터에서는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넘어질 때마다 아이를 잡아주었고 그네는 아주 힘차게 높게 밀어주지 않았다.(아내가 세게 밀어주면 나는 자리를 피하거나 눈을 감아버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복도를 걸어 집까지 갈 때는 아이를 품에 꼭 껴안고 걸어갔다. 아이가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서 등에 땀이 날 정도로 나는 긴장해 있었다. 먼 여행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고 있는 아이가 따가운 햇볕에 힘들어하고 있으면 두꺼운 책으로 햇볕을 가려주기도 했다. 아이가 아프면 나도 아플 것 같았고 두렵고 무서웠던 것 같다.


2.

  아이가 다섯 살 무렵 늦가을, 낙엽이 많이 떨어지던 날이었다. 놀이터 저쪽 편에서 혼자 놀던 아이가 벤치에 앉아 있는 내게 손짓을 했다. 그때 햇살은 눈부셨고 노란 은행나뭇잎들은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게 와보라고 손짓하던 아이를 바라보며 그 순간 생각했다. '아, 이제 이 아이는 슬픔과 외로움도 억울함과 부끄러움도, 미안함과 분노도 느끼며 살아갈 텐데. 그건 순전히 아이가 겪어내야 할 인생이겠구나.' 그 감정은 하나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하고 이상했다. 아이가 기특하면서도 걱정되었고, 어떤 마음을 내려놓으면서도 두려웠고, 아이의 인생을 응원하면서도 못내 애틋했다. 그때 아이의 분홍 원피스와 하얀색 스타킹과 반짝 빛이 나던 검정 구두와 양갈래로 땋아준 머리카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아이에게는 그 이후 기쁜 일도 있었지만 슬픈 일이 더 많았다.


3.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인생의 역사>에서 이 시를 다루면서 지혜롭고 정확하게 이렇게 썼다.  


  시인이 저 이야기를 집착에 대한 것으로 해석할 때 그것은 그 이야기를 사랑에 대한 것으로 읽을 가능성을 포기하거나 배척하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으리라. 시인은 이것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이므로. 이제 그가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은 그 사랑을 부드럽게 내려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저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에서, 그 사랑의 배후와 근저에 있는 강렬한 '움켜쥠'의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성숙한 거리를 두는 일의 깊이를 생각했을 것이다.  



4.  

  그러나, 나는 여기에 내 짧은 생각을 덧붙이고 싶어진다.  '부드럽게 내려놓는 일'도, '성숙한 거리를 두는 일'도 '지극한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난간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잠이 깨어 발견한 엄마의 마음, 그리고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향해 뻗은 두 손에 허공만 잡히자 숨이 그만 멎어버린 엄마, 자신은 죽었지만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간 엄마, 그리고 그제야 이미 죽었지만 마음 놓고 죽을 수 있었던 엄마의 사랑이 있어야 거리를 두고 내려놓고 기다리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조금 눈물겹게 말하고 싶다.

  그런 사랑 이후에야 내게도 사랑하는 무언가를 따뜻하게 떠나보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났던 것 같다.


5.

  일요일 저녁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것들 가운데 내려놓고 떠나보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본다. 나 혼자 붉어졌던 마음과 걱정되어 뒤척이던 하루와 이해받지 못한 슬픔과 움켜쥐었던 핸드폰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본다. 이제 따뜻하고 부드럽게 안녕하고 싶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므로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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