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란 관념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의미를 머릿속에 품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는 말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말은 관념이나 느낌이 아니라 소리라는 형태를 지닌 살아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말의 의미가 제 생명을 갖추려면 의미에 어울리는 소리의 질감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죠.
‘숲’이란 단어에 생명을 부여하여 살아있는 존재로 뱉어내는 소설가 김훈의 글에는 숲이 있고, 심지어 거기에서 바람이 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뱉어내는 ‘숲’이란 말엔 ‘ㅅ’의 청아함과 푸름, ‘ㅜ’의 시원함과 흐름, 나아가 ‘ㅍ’의 단단한 뿌리내림이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과 함께 늘 푸른 세월을 버텨내고 뿌리내린 숲의 존재가 그의 말에 의하여, 글로 인하여 살아난 것이죠. 그리하여 김훈의 ‘숲’은 온전히 소리를 넘어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수 분, 수 초대에 새로운 글과 새로운 말들이 태어나고,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수많은 말의 홍수 속에서 질감을 느끼기는커녕 말의 느낌조차 가지기 전에, 또 다른 새로운 말들이 계속 덧쌓입니다.
그 말들 중에는 정체가 불분명한 괴상한 소문도 있고, 때론 나와 생면부지인 누군가의 인격체가 장난처럼 난도질당하는 미필적 고의의 무서운 말도 있으며, 때론 부패한 권력에 기생하며 선동하고, 사실인 척 기만하는 더러운 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말들을 여과 없이 자신의 성향에 맞게 퍼담아 옮기기 바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말의 질감은 말의 생명력입니다. 말은 의미를 품고 태어났고, 생명력이기도 합니다. 의미를 품지 못한 말은 생명을 지니지 못한 말입니다. 애초 태어날 이유도 없는 공허한 소리일 뿐입니다.
관념적으로 존재하던 무형의 단어들이 배우의 소리를 통해 말이라는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배우들을 말의 생명을 찾아주는 말의 어머니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배우들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것에 늘 우려하고, 관심을 가지며, 깊이 있는 말의 질감처럼 말의 의미들을 곱씹고, 고찰하고 또 고찰하는 것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숲’이라는 단어가 주는 것과 같은 청아함과 푸름, 시원함과 흐름, 단단한 뿌리내림이 살아있는 것 같은, 소리를 넘는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진정한 말을 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