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입니다. 사는 동안 수십 번 의 계절을 맞이하지만 가을은 늘 마음보다 먼저 와 있습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며칠 동안 내렸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새파란 모습으로 서로를 탐하듯 비벼대며 소리치던 잎사귀들은 시간과 함께 바래고 시들해져 몇몇만 힘겹게 나무를 붙잡고 있습니다. 작은 바람에도 놀라 떠는 모습을 보면 애처로운 마음마저 생깁니다.
지금보다 젊은 시절엔 가을을 맞은 어른들이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인생을 말할 때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지금은 가로변 샛노란 은행잎의 융단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언저리에 휑하니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또다시 맞은 가을은 어디론가 걷고 싶은 심사를 불꽃처럼 피어오르게 합니다. 이럴 때 하염없이 걷는다는 건, 자신에 관한 연민을 그 어느 가슴 아프도록 그리운 이에게 눈물을 찍어 쓴 편지처럼 가슴 저미는 일입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밤이 옵니다. 밤이 오면 마음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짙어집니다. 이 무렵 밤은, 빨리 그 모습을 보입니다. 짧은 낮 동안의 따뜻한 기운이 사라지고 나면 거리는 선득선득 찬 기운 속으로 빠져듭니다. 어두운 골목길의 길고양이 울음소리가 더 크고 차갑게 들립니다.
공연 연습이 끝난 어느 밤, 골목 어귀 선술집에서 허한 마음을 달래 봅니다. 때가 찌든 백열전등 아래 부실한 탁자 대여섯 개가 남루하게 있습니다. 엷은 거미줄이 걸려있는 그 전등은 가끔 문이 열릴 때마다 따라 들어온 바람에 흔들립니다. 창밖엔 여러 가지 낙엽들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옷깃을 여며 바삐 걸어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 황량한 풍경을 감상하며 술을 마시니 흡사 꿈결처럼 취기가 올라옵니다.
연극 이야기, 사는 이야기, 세상 이야기가 가게 바깥으로 넘어갑니다. 따뜻함을 바라보지만 가끔씩 가식적인 웃음과 냉소적인 눈빛들이 돌아옵니다. 살짝 신경이 쓰이지만 계절이 계절인지라 그냥 웃으며 넘깁니다.
깊은 밤, 돌아온 잠자리에 더 이상의 가을은 없습니다. 내일 아침, 여름보다 늦게 뜨는 해를 맞이하려면 낮의 취기는 접어야 합니다. 하지만 잠이 쉽사리 오지 않습니다. 이렇듯 사는 동안 수십 번의 가을은 늘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나의 가을은 이렇게 힘든데 여러분의 가을은 어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