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게 낙이던 시절은 가고
초등학생인 조카가 겨울방학에 들어선 지 1주일째다. 조카는 신이 나서 들떠 있지만, 나에겐 한 끼의 식사를 더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책무가 부여되었다. 사실, 내가 할 줄 아는 음식의 범위는 매우 한정적이다. 그나마 그중에서 조카가 싫어하는 음식이 반 이상 될 터이니 메뉴의 반은 걷어내야 한다.
늘 국물을 요구하지만 된장국도 싫다, 황탯국도 싫다, 감잣국도, 달걀국도 다 싫다고 한다. 그나마 먹던 김치찌개는 저번 주에 간신히 설득해 몇 끼를 먹었으니 앞으로 당분간 김치찌개를 먹겠다는 소리는 안 나올 거다. 콩나물국이 나오면 먹긴 하겠지만 낯빛이 그리 밝진 않다. 제일 좋아하던 미역국은 한때 많이 끓여줬더니 이제는 미역국 소리만 나와도 표정이 일그러진다.
간혹, 비상용으로 챙겨두고 하나씩 끓여줬던 비비고 육개장마저 이제는 고개를 젓는다. 최근에는 내 인생 최초로 오징어국을 끓여볼 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다며 벌써부터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저 본인 마음이 호감으로 가지 않으면 아예 먹으려고도 하지 않아 괜히 고생해서 만들었다가 내 독차지가 될까 걱정되는 마음이 있다.
어느새 내 하루의 기분은 조카의 대답에 따라 들쑥날쑥해진다. 아침의 상쾌했던 기분이 조카의 기분에 따라 업이 되기도 하고, 다운되기도 한다. 오늘 점심은 어제 먹고 남았던 김치볶음밥을 데워줄 생각이었다. 어제저녁에 맛있게 먹은 터라 한 번 더 먹어도 괜찮을 거로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어김없이 깨졌다.
“김치볶음밥 먹을래???”
대답이 없다. 침묵이 의미하는 건 한 가지다. 먹기 싫다는 거다. 순간, 대체할 만한 메뉴가 무엇이 있을까 머리를 빠르게 회전해본다. 남아있던 참치가 생각났고, 참치랑 달걀후라이랑 비벼서 간단하게 먹는 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어”라는 대답이 떨어졌다. 이건, 그냥 먹기 싫다는 거다.
사실, 오늘은 카레를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고, 카레는 저녁으로 미뤘다. 그리고 정작 조카가 카레도 그리 반기지 않는다. 하여튼, 점심은 간단하게 넘길 생각이었는데 한 끼 한 끼가 소중한 조카에겐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마도 어제 늦은 저녁 나에게 남긴 카톡이 그 답을 말하고 있을 거다.
‘다음 주에는 제육볶음 해줘’
당연히 제육볶음은 메뉴에 넣어뒀다. 그래도 지금은 당장 해결할 것이 필요하다. 냉장고를 뒤져서 대패삼겹살을 찾아냈다. 대패삼겹살 구워주겠다는 말에 조카의 대답이 조금 커졌다. 그리고 살짝 웃어 보였다. 이건 오케이라는 신호다. 그리곤 뒤이어 김치도 구워달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밥을 하면 용기에 담아 냉동실에 얼려두곤 식사때마다 해동해서 먹곤 했다. 그런데 조카가 이 방식을 아주 싫어했다. 자신은 냉동실에 얼려둔 밥을 먹기 싫다는 거다. 내 입맛에는 그게 그거 같은데... 식감에 민감한 조카 입에는 영 불편한가 보다. 그래서 방학을 한 이후로는 전기밥솥에 그때그때 밥을 해서 주고 있다.
그렇게 난 쌀을 씻고, 밥을 안쳤다. 그리고 대패삼겹살을 구웠고, 버섯도 함께 볶았다. 남은 기름에는 김치를 구워주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그런데 밥을 먹는 모습이 영 신통치 않다. 김치 맛이 이상하다는 거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묵은지가 떨어졌고, 얼마 전에 담근 김장김치를 볶음 거라 맛이 덜할 수 있다. 그래도 제법 새콤한 맛이 올라왔길래 구운 거였는데... 어김없이 그 날카로운 입맛을 비켜나가지 못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너희는 집에서 뭐 해 먹고 사냐고... 다들 비슷한 대답이 왔다. 대충 먹어... 대충 먹는 게 참으로 힘든 시간이다. 정말로 대충 먹으며 살고 싶다. 그리고 사실 가끔 조카에게 내주는 밥상을 보면 너무 빈틈이 많은 건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 때도 있다. 그래도 조카가 싫어하는 거 싹 빼고, 좋아하는 거로만 차려주니 그게 더 만족도가 높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어릴 때는 요리하는 것도 제법 좋아했는데... 이젠 밥때가 참 싫다. 그렇다고 외식을 하거나 배달음식을 먹는 것도 지겨운 마음이 든다. 먹는 것에 진심이던 시절도 있었는데... 삶의 낙이 먹는 거라고 당연하게 이야기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냥 대충 한 끼 때우며 살면 안 될까 싶다.
오늘 점심 메뉴에 대한 시원찮은 조카의 반응에 오늘 하루 기분이 다운이다.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영 집중이 안 된다. 그러면서 또 고민하게 된다. 오늘 저녁에는 뭘 먹을까. 이미 카레는 내일로 미뤄두었다. 뭔가, 조카가 만족할 만한 걸 찾아야 한다. 조카가 웃어야 나도 웃을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정답은 안다. 라면을 말하면 신이 날 것이고, 외식하자고 하면 오늘 점심때 짜증 낸 것까지 사과할지도 모른다. 거기다 외식 메뉴 중에서 마라탕을 말하면 환호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 대답은 NO다. 이미 지난주에 1번씩 먹었던 메뉴들이다. 자주 먹는 건 안 된다.
솔직히, 조카가 음식 타박을 할 때면 점점 짜증이 나긴 하지만 크게 화를 내긴 멋쩍을 때가 있다. 나라고 세상의 모든 음식을 좋아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어린 시절 싫어했던 음식이 어른이 되고 나서 맛있게 먹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조카도 분명 어른이 되면 채소도 좋아하고, 된장국도 좋아하고... 비빔밥도 좋아하게 될 거다.
또 웃긴 건, 나는 국 속에 빠진 고기는 싫어한다. 어른이 된 지 한참인데도 변하지 않는 입맛도 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 엄마는 김치찌개나 소고깃국을 끓이면 지금도 내 국그릇에는 고기를 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엄마도 우리들 입맛 맞추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