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다(3)
지금 생각해보면,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온 날, 아내는 분명 평소와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어?" "위험한데, 왜 거기에 갔어? 몸이 다 젖었잖아!" 다그치듯 물어봤지만, 그녀는 침묵을 지키며, 멍하니 창밖만 바라봤다.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한참이 지나 새벽 4시쯤, 그녀는 거실로 나와서 말을 꺼냈다. "자기야. 내가 변신했어. 세상이 나를 속이려나 봐."
변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농담을 던졌다. "드래곤볼 만화에서 나오는 슈퍼 사이아인처럼 변신했다는 거야? 그러면 머리도 막 노란색으로 변하고, 파란 불꽃같은 거라도 휘날렸어? 아니면 금빛 오라라도 나왔나?"
아내는 전혀 웃지 않았다. 정색하며 말했다. "문어…. 문어처럼." 몇 번 반복한 뒤, "피곤해, 혼자 있고 싶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대로 거실에 멍하니 서 있었다. 도대체 문어는 무슨 문어고, 뭐가 변신했다는 걸까? 혼란스러웠지만, 그때는 그저 아내가 너무 피곤했나 보다 싶었다. 내 눈에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딸처럼 귀여운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한 달이 지나고, 그녀는 예전과 같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은 지도교수님의 부탁으로 아내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안상국 교수님은 원래 말수가 적은 분이지만, 필요한 때는 정확하게 의도를 전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복도에서 아내에게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고 한다.
“이레나, 이번에 새로운 토질역학 프로젝트에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다름이 아니라, ‘연약 지반에서의 지하수 배수 및 침하 해석’ 프로젝트인데, 우리가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충분치 않아서 직접 현장에서 압밀 실험을 할 거야. 지반 개량과 관련된 압밀 속도와 간극 수압 분포를 측정하는 실험이거든. 이론적으로는 다 배웠겠지만, 이번엔 복합 지반을 대상으로 하니까 어려울 거야. 특히, 복합 지반에서의 압밀 계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변동량이 상당히 커서 정확한 예측이 쉽지 않거든. 네가 수리학 실험 경험도 많으니, 물의 침투와 흙의 압축 거동을 동시에 다룰 수 있을 거야. 도와줄 수 있겠니?”
아내는 교수님이 건네준 서류를 한 번 훑어보더니, 가볍게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흙이 어떻게 물과 상호작용하며 압밀되는지, 이론은 알지만, 복합 지반에서의 실험은 복잡하겠네요. 흙의 간극 수압이 압밀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측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겠어요."
안상국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아. 이번 실험은 학부 때 해본 단순한 실험이 아니야. 지반의 여러 층을 해석해야 하고, 지하수 흐름이 미세하게라도 잘못되면 설계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지. 특히, 고층 건물 기초가 연약 지반 위에 설계된 경우라서 실수가 치명적일 수 있어.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야."
아내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서류를 살펴보며 말했다고 한다. "재밌겠네요. 배울 게 많을 것 같아요."
그녀는 수리·수문학만큼이나 토질역학에도 흥미가 많았기에, 그 부탁을 기쁘게 받아들인 듯했다. 학부 시절부터 흙의 특성을 분석하고, 구조물의 안정성을 풀어내는 지식도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 물론 안상국 교수님은 김연수 교수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실험실에 들어선 아내는 특유의 집중력으로 무언가에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흙의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며 각종 실험 장비를 다루는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고 예리했다.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가 정말 흙과 같은 세밀한 구조에 관심이 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날, 우리는 침하 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흙이 얼마나 균일하게 압축되는지, 수분 함량에 따라 어느 정도의 변형이 일어나는지를 측정하는 중요한 실험이었다.
"이 흙…. 이상해. 일반적이지가 않아."
“응, 뭐가?”
매끄러운 철제 테이블 위에 흙 시료가 넓게 펼쳐져 있던 것 중 하나의 입자를 고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녀는 계속, 작은 입자들을 손으로 집으며, 숨겨진 비밀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작은 것들이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배열될 수 있지?"
그때, 내 장기는 불편한 신호를 보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잠깐 나갔다 올게." 아내를 두고 화장실로 향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내가 없는 동안, 흙의 입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것이 깨지고, 그 구조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흙이 스스로 숨을 쉬며, 흐물흐물하게 변형되는 것처럼 보였다는 그녀의 설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흙일뿐인데, 무엇이 그렇게 달라졌다는 것인가? 아내는 곧장 나에게 말했다. "세상이 나를 속이고 있다니까? 이 흙도 마찬가지야. 자연적이지가 않다고!"
다시, 배는 '꾸르륵' 소리가 나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어제 먹은 치킨 때문인가? 꽤 기름지던데’ 일단, 아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화장실로 달렸다. 그 사이, 아내는 혼자서 실험을 계속 진행했고, 그 순간, 흙마저도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누군가 시뮬레이션으로 만든 데이터라고 판단했다. 프로젝트는 사면 붕괴를 예측하는 것이었고, 특히, 축대벽의 전도 현상이나 붕괴 가능성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 실험이었다. 이론적으로는 흙의 마찰각, 밀도, 전단 강도를 바탕으로 안정성을 계산해야 했지만, 아내는 기이한 결괏값을 도출해냈다. 다음은 아내가 그때 기록한 계산과 공식이다.
여기서, σ는 흙의 수직 응력, γ는 흙의 단위 중량, h는 사면의 높이, θ는 사면 기울기
이 공식이 아내가 풀어낸 해답이었으나, 결과는 터무니없이 이질적이었다. 분명, 안전도 Fs는 1.5 이상이어야 했는데, 그 값은 1.5를 훨씬 초과하여 상상할 수 없는 값인 8.6이 도출되었다. 이리저리 계산을 다시 해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Qt 는 전단 파괴로 인한 에너지 손실, Pe는 옹벽의 수직 하중, h는 사면의 높이, t는 흘러내리는 시간, κ는 기이한 상숫값으로 실험 중 처음으로 나타난 값이었다. 이 수식은 토목공학, 아니 토질역학에서 존재할 수 없는 공식이었고, 현실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아는 수학적 규칙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수많은 실험과 연구를 거치며, 익숙해진 물리 법칙들이 허상처럼 무너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동안 들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기괴한 수식만이 눈앞에 나타났다. 현실을 넘어선 다른 차원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지배하려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나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바로 내 앞에 서 있던 아내 ‘이레나’였다.
10분쯤 지났을까. 용변을 본 뒤, 실험실 바깥문을 열자마자, 눈앞의 풍경이 왜곡된 것처럼 흔들렸고, 찬 공기가 피부를 찔렀다. 불길한 예감에 한 걸음, 한 걸음 아내가 있는 내부로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 순간, 아내의 새로운 모습을 목격했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로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 종이 위에는 아까 말한 수식들이 얽혀 있었고, 아내의 모습이…. 달라졌다.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형체로 변해 있었다. 머리카락은 알 수 없는 빛으로 덮였고, 가느다란 전류가 튀듯 온몸에서 스파크가 퍼져나갔다. 그 빛줄기는 눈앞에서 미묘하게 꿈틀거리며, 공기 중에서 사라지지 않고 떠돌았다. 피부는 전혀 다른 질감을 띠고 있었고, 문어의 촉수처럼 팔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그 표면은 물결치듯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었다. 눈동자 또한 인간의 시선이 아니었다. 정면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내가 아는 아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그 안에 있었다.
"변신이… 사실이었어…" 그 말을 중얼거리며, 몸은 굳은 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졌다.
깨어나 보니, 지도교수님 방의 소파에 누워있었다. 온갓 두통이 스며들었음에도 머리를 짓누르며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었다. 옆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의 아내, 이레나가 앉아있다. 그녀는 차가운 손수건을 내 이마 위에 올려주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의 따스한 손길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 번져오는 섬뜩한 감정은 가시지 않았다. 그 변신에 대한 기억이 왜곡되지 않았다면,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변신. 내 눈앞에서 펼쳐졌던 그 기괴한 모습. ‘내가 괴물과 함께 사는 건가…?’ 한때는 내 전부였던 사람이, 이제는 알 수 없는 존재로 다가오는 이 괴리감….
"이레나… 집에 가서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속에서는 혼란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난… 지금 혼자 있고 싶어. 너무 어지러워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슨 일이야, 재동아?"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왜?"
차마 그 모습을 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녀에게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본 그 장면을, 그 끔찍한 변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까… 너…" 나는 말을 꺼내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까… 넌 기억 안 나?"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크게 떴다. "뭐가 기억 안 난다는 거야?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 내가 뭘 잘못했어?"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 나를 걱정하는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