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하다
"이레나…"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이상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서 좀 쉬어." 다시 말을 꺼냈다. "나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너도 그렇잖아?"
아내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내니, ‘물’과 ‘흙’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유체역학, 수리 수문학, 토질역학… 모두 자연의 근본적인 힘을 다루는 학문이다. 물은 흐르고 흙은 가라앉고, 그것이 세상의 법칙이지만 아내가 예전에 한 말이 다시금 귓가에 맴돌았다. "물과 흙은 데이터 패킷에 불과해." 시뮬레이션 안에서, 물리 법칙조차도 그저 코드로 짜인 일련의 정보라는 말.
만약, 물과 흙이라는 기초적인 자연의 요소가 단순한 데이터 패킷처럼 다뤄진다면, 이 세상은 대체 무엇인가? 내 눈앞에 흐르는 강물, 우리가 밟고 있는 흙이 정말 자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혔다. ‘단지 누군가가 설계한 프로그램 일부라면… 아내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잖아.’
자연에 해당하는 요소들과 인공구조물들이 얽혀 들어가는 그 복잡한 경계, 그 안에서 내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미지의 무언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과학이 아직 설명하지 못한 현상, 내가 이해하지 못한 어떤 메커니즘이 그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아니면, 아내의 변신에 대한 기억이 왜곡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 뇌가 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일까?
그녀도 분명, 비가 온 날 자신이 문어로 변신했다고 했었다. 그리고 내가 본 아내의 모습 또한 문어와 비슷했다.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
불길한 감정이 솟구쳤다. 손끝이 저릿저릿해지며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두 손을 꼭 쥐고 있다가, 어느새 왼손은 소파의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를 반복했다. "문어…. 문어라고?" 손으로 이마를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갈라지고 있는 것처럼. 몸이 떨리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 사실을 애써 부정했다.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소파에 고개를 떨군 채 온몸이 굳어갔다.
“재동아, 괜찮아?” 갑자기 아내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익숙하고, 따뜻했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소파 위에 앉았다. 가슴속 불안감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아내를 마주해야 했다. 문이 살며시 열리자, 아내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나를 살피고 있다.
"아직 집에 안 갔어?" 나는 힘겹게 물었다. 내 목소리는 자신이 없고, 떨렸다. 그녀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걱정돼서… 집에 못 갔어. 네가 쓰러진 걸 보고 혼자 집에 갈 수가 없었거든." 그 진심이 담긴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본 그 기이한 형체… 그 두려운 변신의 순간도 모두 착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너무 과민했나 봐."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다. "괜찮아, 재동아."
나는 다시 한번 아내를 믿어보기로 했다. 비록 그 기억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를 믿고 싶었다. 그녀는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변신이니 뭐니, 모든 것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사실, 나는 그냥 그녀를 믿고 싶었다. 그 사랑스러웠던 일상으로 너무나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동시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관찰하기로 다짐했다. 우리가 연구실에서 실험을 기록하듯, 하루하루의 작은 순간들, 아내의 행동, 표정, 그리고 그녀의 말투까지 세세하게.
만약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이 일기가 유일한 증거가 될 테니.
갑자기 문이 또 열리더니, 두 그림자가 문턱 너머로 천천히 들어왔다. 안상국 교수님과 김연수 교수님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나와 아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동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떻게 된 거야?" 김연수 교수님은 놀란 듯이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재동이가 실험 중에 쓰러졌어요, 그래서 제가 교수님 방으로 바로 옮겼어요."
안상국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잘했어, 이레나. 몸이 회복되면 천천히 집에 가서 쉬게 해."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아내가 도출한 그 종이를 꺼내 들었다. "교수님… 여기, 이레나가… 이런 공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두 교수님은 검은 글자가 나뒹구는 A4 종이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 종이에 적힌 수식은 그들의 눈에조차 낯설어 보였다.
두 교수님은 종이를 받아들고 한참을 응시하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냉소적이지도, 허탈함도 아닌, 기이한 꿈속에서 빠져나오려는 사람의 반응 같았다. “이게… 뭐지?” 김연수 교수님은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겼지만, 속내는 말하지 않았고, 안상국 교수님도 옆에서 종이를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공식은 본 적이 없어."
그리고, 아내는 자신이 그 공식을 적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저는 그냥 실험에 집중하고 있었어요. 재동이가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졌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담담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평소에 거짓말하는 법이 없었던 아내였기에.
내 시선은 그 종이로 다시 돌아갔다. ‘그 공식은 지구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일 텐데….’ 교수들이 그 공식을 어떻게 평가할지, 어떻게 결론이 날지는 뻔했다. 현실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과학적 해석이 불가능한 그 공식은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 머리에서는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이따금 대화 소리가 귓가를 스치듯 살며시 울렸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반면, 아내는 두 교수님과 활발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공식을 이해해보려 애쓰고, 교수님들은 해석해보려고 노력했다.
“아무튼, 그래요. 그럼 이건… 누가 적은 거죠?” 안상국 교수님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김연수 교수님 역시 시선을 종이에 고정한 채 대답을 기다렸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질 만큼 정적이 감돌았다.
‘설마, 내가? 내가 저걸 적은 건가?… 환각에 빠져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정신이상 상태였을까? 아니면 그 순간, 무언가가 나를 지배해 이 공식을 적게 한 것일까? 그 순간을 떠올리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기억의 조각들은 흐릿했고, 무엇이 현실이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종이 위에 적혀 있는 그 공식.
내 정신 상태가 어떻든 간에, 그 공식은 분명 물증으로 남아있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그것이 말이다.
하루의 소란스러움은 가슴속 깊이 접어둔 채,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차창 밖으로는 저녁 어스름이 스쳐 가고, 내부는 고요함이 감돌았다. 갑작스레 그 고요함을 깨뜨린 사람은 무하였다. 핸드폰 벨 소리를 듣고 차량의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한 후, 아내와 함께 그 목소리를 들었다.
“나 미래건설에 취업했어!”
아내는 놀라면서 외쳤다. “오, 거기 연봉 꽤 높은 곳 아닌가? 정말 잘 됐다, 무하야!”
그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어서 말했다. “이레나, 잘 지냈어? 너희 둘 다 같이 토목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잖아. 3개월 뒤에 현장으로 오지 않을래? 너희 전문성을 좀 발휘해보면 어떨까.”
아내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잉, 우리가 거길 왜 가? 직원도 아닌데 말이야," 아내도 내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 너머로 피식 소리가 들리더니, “사실은 말이야, 회식 자리에서 소장님과 얘기하다가, 술김에 내뱉은 거 같아. 내 친구들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니, 어떤 도움이라도 되지 않겠냐고 쓸데없는 소리를 했거든. 그런데 소장님이 듣더니, 너희 둘 다 현장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시더라.”
그 초대받은 현장은 강원도의 험준한 산을 뚫고 터널을 시공하는 프로젝트였다. 시공사 소장님은 대기업의 부장급이었고, 나름의 전문성을 지닌 아내와 나를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조수석에 있던 아내는 등받이에서 몸을 곧추세우더니, “그래, 뭐 잠깐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흥미로울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나는 그 날 이후로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지만, 미묘한 변화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