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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환 Oct 03. 2024

제5화 구조적 변형  

‘가정’하다 (2)

 일상은 시간이 무뎌진 나침반처럼, 변함없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며 흘러갔고, 어느새 3개월이 흘러, 무하의 현장에 도착했다. 강원도의 거친 바람이 산을 타고 불어왔고, 먼지와 섞인 공기가 터널 건설 현장의 열기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막 내려 무하를 마주했을 때,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이레나, 재동! 와줘서 고마워!” 그는 우리가 와준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하는 눈치였다. 손을 맞잡으며 짧은 인사를 건넸고, 아내도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터널 시공 현장은 거대한 거인의 입처럼 활짝 열려있었다. 수십 명의 작업자가 분주하게 움직였고, 중장비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땅을 갈라냈다. 아내와 나란히 서서 그 현장을 바라보았다. 터널은 자연을 뚫고 지나가는 구조물이다. 이곳, 강원도의 산을 관통하는 터널은 그 자체로 자연과 인공이 만나는 경계였다. 터널 입구에 서자, 차가운 콘크리트 벽과 그 뒤에 숨겨진 거대한 공간을 보며 자연과의 이질감이 느껴진다. 나 못지않게 아내의 눈도 섬세하게 움직였고, 모든 구조물과 사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고, 얼굴을 바라봤다. ‘이레나는 그날의 기억과 연결된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걸까?’

 때마침, 무하가 터널 입구에서 부장님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기, 오셨네. 이쪽으로 오시죠, 소장님!” 그의 말에 따라 우리는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중년의 남자를 쳐다봤다. 시공사의 로고가 박힌 회색 작업복과 헬멧, 손에는 지휘봉 비스름한 것을 들고 있었다. "소장님, 그때 말한 제 친구들이에요. 오늘 현장 견학 좀 시켜주려고요."

 소장님은 다가와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무하가 말하던 그분들이군요. 현장을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악수를 청한 후, 고개를 돌려 터널 안쪽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 보시죠. 지금 한창 중요한 공정 중이니까, 설명하면서 보여드릴게요."

콘크리트로 단단히 다져진 바닥을 따라 한참을 걷자, 벽면에는 철근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곳이 철근 콘크리트 보강 구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철근을 규격에 맞게 배치하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지하수나 산사태 위험이 크기 때문에, 특별히 설계된 구조로 안정성을 강화했어요."

 그는 바닥에 깔린 콘크리트와 철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어 설명했다. “이게 터널의 안전을 좌우하는 핵심 구조죠. 물리적으로도 굉장한 압력을 받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계산에 어긋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사 내내 긴장감을 놓을 수 없어요. 특히, 이런 산악 터널은 자연 상태와 맞물리는 부분이 많아 불안정한 요소가 많습니다."

 아내는 그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저희도 학문으로는 구조의 안전성에 대해 배웠지만,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또 다른 느낌이네요. 자연의 변수들이 콘크리트와 만나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항상 주의해야겠어요.”

 소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습니다. 인공구조물들은 항상 자연을 이겨내야 하는 법이죠. 터널이 완성되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영향을 미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 작은 부분까지도 자세히 관찰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소장님은 벽면에 설치된 계측기를 가리켰다. "이건 변위 측정 장비입니다. 터널 내벽이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변형되면 즉시 알 수 있어요. 사소한 변형이라도 무시하면 나중에 큰 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모니터링하고 있죠."

 나는 그 계측기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터널 내부를 둘러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과 변형이 이곳을 잠식해 가고 있는 것일까? 이 거대한 구조물이 어떻게 자연의 힘과 충돌하며 살아남을지, 그리고 그 충돌이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궁금했다.

 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소장님! 여기 배근이 잘되었는지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직원 하나가 작업 중인 구역에서 소장님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급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다른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지막 점검을 서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강원도청에서 감독관들이 이따가 나올 예정입니다! 상태 확인을 꼭 부탁드려요!" 또 다른 직원이 곧 도착할 감독관들을 언급하며 소장님을 재촉했다. 직원들의 긴장된 목소리에 소장님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소장님은 무하에게 눈짓을 주며 말했다. “무하 씨, 대신 친구분들 안내 좀 부탁하겠네.”

 "네, 소장님. 제가 잘 안내할게요."

 소장님이 급히 직원들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소장님, 얼른 일 보세요. 저희는 괜찮아요. 일 끝나고 다시 뵈면 되죠."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럼요,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셔야죠.” 소장님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안내는 무하가 잘할 거니까, 나중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무하가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제가 소장님 대신 안내를 맡을게요.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우리는 그를 따라 더 깊숙이 걸음을 옮겼다. 무하는 현장 곳곳을 소개하며 시공 세부 사항을 설명했다. “여기, 철근을 배치한 후 콘크리트를 붓고, 다시 굳히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게 그린북의 표준 규격을 따르는 거야. 보통 이런 터널은 압력을 견디기 위해 설계 단계에서부터 엄청난 계산이 들어가지. 모든 것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으면, 작은 균열 하나가 커다란 붕괴로 이어질 수 있거든.”

 "여기 보강재는 충분해?" 아내가 물었다. 무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이 터널은 100년은 거뜬할 거야."

 하지만 그 순간, 터널 내부 어딘가에서 미세한 균열 소리가 들렸다. 콘크리트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듯한? 무하는 아무렇지 않게 설명을 이어갔지만, 나는 그 소리가 계속 신경 쓰였다. ‘혹시 터널 내부가 미세하게라도 변형된 것은 아닐까?’ 

 그동안 공부했던 토목공학의 이론들이 떠올렸다. 철근 콘크리트는 물과 흙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물은 유동성이 있고, 흙은 변형을 수용한다. 그리고 콘크리트는 강도와 견고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완벽해 보이는 구조에도 약점은 있다. 자연과 다른 인공의 성질에서 오는 미세한 균열, 그 작은 틈새가 거대한 변형의 서막이다.

 아내도 터널의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이런 구조물들이 자연의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인공과 자연의 모순이 바로 이런 곳에서 나타나는 걸 거야.” 

 그 비명을 뒤로한 채, 무하와의 작별 인사는 아쉬웠다. 우리는 서로 고개를 숙이며 현장 입구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그가 뒤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추억을 되새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적막했다. 차 안에 흐르는 음악도 어느새 사라지고, 그저 도로 위에서의 작은 소음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운전하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집에 앞에 다다랐을 때, 밤은 그 어둠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짙었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평소와 다른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꺼림칙한 느낌에 살며시 눈을 떴다. 침대 옆에는 아내가 서 있었다. 그녀의 금발은 이전보다 훨씬 길고 윤기 있었다. 그 긴 머리는 금빛 실처럼 빛나며 사방으로 흩날렸고, 얼굴은 차가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피부는 이전보다 더 하얗고 투명해 보였다. 그리고 등 쪽에서는 문어의 촉수처럼 뻗어 나온 팔다리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이 기괴한 변신. 숨을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건 분명 두 번째 변신이지만, 그녀에게는 세 번째 변신이었다.

 그 순간, 아내는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듯, 책상으로 걸어가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한참 동안 펜을 잡고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나는 숨죽이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적은 것은 글이 아니었다. 수식이었다. 현장에서 본 터널의 구조적 변형과 관련된 수식이 그대로 종이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공식은 복잡하고 난해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곧 최면에 걸린 듯 책상 쪽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이어서 그녀 옆에 앉더니, 펜을 들고 무언가를 더하기 시작했다. 

 If로 시작되는 가정. 그리고 그 가정에서 파생되는 공식들이 하나둘 노트에 나타났다.


 "If 모든 물질의 흐름이 시뮬레이션이라면, 수리적 법칙은 단순한 패턴일 뿐이다."

 "If 흙의 분자 구조가 인위적이라면, 그 강도와 성질은 가변적일 수 있다."

 "If 중력조차 가상이라면, 모든 유체의 움직임은 그저 데이터의 전송에 불과하다."


 우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적어나갔다. 그 공식들은 자연과 인공, 그리고 시뮬레이션이 하나로 합쳐진 가설. 물리 법칙과 유체역학, 토질역학, 심지어 양자역학까지 엮인 난해한 공식.

 긴 풀이 끝에, 마지막 공식은 이렇게 적혔다.


 "If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이 허상이라면, 그 허상을 유지하는 법칙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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