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발낙지와 낙지 탕탕이
출근하던 길이었다. 회사에서 유연근무제를 하고 있어서 그 날은 출근 시간이 늦었다. 가는 길에 마포농수산물 시장을 지나쳐 가는데 개장하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항상 이른 아침에 지나치다 보니 닫혀 있을 때만 봤던 것이다. 문 너머로 보이는 시장의 모습, 앞치마를 두른 가게 주인이 물 호스로 앞마당을 닦는 모습 등 시장의 활기가 느껴졌다. 마치 얌전할 줄 알았던 사람의 새로운 면모를 본 것처럼 낯설었다. 당장 핸드폰으로 마포농수산물 시장을 검색해보니 꽤나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수산 시장하면 노량진 수산시장밖에 몰랐는데 (나 혼자) 새로운 핫플레이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좋다, 이번 주말에는 여기를 가야겠다.
재래시장은 다양한 채널을 가진 오프라인 텔레비전 같다. 점포도 작아서 채널 전환이 빠르고 오픈되어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부담도 적다. 거기다가 친근하고 푸근한 인상의 점포 주인들이 있어 놀러 가는 곳에 재래시장이 있으면 들르는 편이다. 이런 재래시장의 부푼 기대를 안고 2시간 전 식사 예약 완료, 드레스 코드까지 재래시장 콘셉트로 맞추고 입구로 들어서니 호객행위가 엄청났다. 천천히 둘러보며 생선 구경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려고 했는데 호객행위 뿌리치느라, 조금이라도 구경하려 하면 봉지 뜯고 다가오는 주인 분들에게서 벗어나느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일요일이라 그런지 닫은 점포도 꽤 됐다. 그래도 웬만한 동네 조그만 재래시장보다 크고 농수산에만 특화되어 있는 데다 안에 있는 마트는 식자재 전용 주방기기들이 많아서 볼거리가 쏠쏠했다.
구경을 마치고 식사시간이 되어 해당 가게로 들어가니 주인이 잠시 대기하라고 안내했다. 1층에서는 생선을 팔고 식사하는 사람들은 바로 뜬 회를 가지고 2층에서 식사를 하는 형식이었다. 이걸 보니 왜 식사 예약을 2시간이나 전에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준비된 횟감을 받아 이동하는 직원의 뒤를 쫓고 있노라니 마치 영화 속 미션을 전달받기 위해 이동하는 팀 같았다. 2층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자리 잡고 있었고 이른 저녁인데도 얼큰하게 취한 분들도 몇몇 보였다.
두툼하게 썰린 회 한 접시에 멍게, 낙지 탕탕이와 맥주 한 잔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매운탕도 시켜서 남은 회를 담가 먹으니 해산물 샤부샤부가 이런 건가 싶다.
마포 농수산물 시장의 또 하나의 장점은 바로 옆에 월드컵 경기장 공원이 있다는 점이다. 식사를 하고 소화시킬 겸 공원 산책하면 딱 좋다. 오프라인 텔레비전으로 수산물 채널도 보고 회로 입도 즐기고, 공원으로 몸까지 건강해지는 하루다.
1998년 여름방학
오늘은 엄마와 언니, 너 셋이 가락시장 앞에 모였어. 방학숙제로 체험학습을 하기 위해서야. 넌 방학숙제 같은 것은 모르겠고 그저 곧 먹을 회 생각에 신날 뿐이야. 오히려 숙제를 하느라 사진 찍기 바쁜 사람은 네 엄마뿐이지. 무엇을 먹을까. 오늘의 메뉴는 네 작은 손만 한 세발낙지야. 지금은 그렇게 작고 가는 낙지를 발견하기도 힘들지. 참기름 냄새가 고소한 세발 낙지 하나를 들어 입 속에 넣어. 혹시나 빨판이 네 식도에 달라붙진 않을까 네 입 속은 전쟁터로 바뀌지. 무서움은 잠시, 씹을수록 고소한 맛에 언니와 너는 정신없이 그릇을 비워내. 마치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네 머릿속에 그때의 맛이 고스란히 남아.
나중에 넌 그 기억을 떠올리고는 다시 수산시장을 찾아. 분명 같은 메뉴고 심지어 양도 많은데 그때의 맛이 나질 않아. 어릴 때의 조그맣고 여린 입이 단단해졌기 때문일까, 다른 음식들에 시시해져 버렸기 때문일까. 넌 또 새로운 맛을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맛을 찾고 싶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