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신이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넬 무렵은 마침 맥주시장이 두 갈래로 양분하던 때였다. 10-15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옹기종기 앉아서 5,000원짜리 큼직한 감자튀김과 맥주 한 잔을 즐기는 이른바 ‘스몰비어’가 한창 인기였다. 만 원 한 장이면 둘이서 충분히 배부르게 즐길 수 있는 스몰비어는 서울 시내나 학교 근처 어디든 항상 젊은 사람들로 붐볐다. 감자튀김도 싼데 맥주까지 저렴하지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런 스몰비어에는 ‘칵테일맥주’라는 이름의 커피맥주나 과일맥주 따위를 취급했는데 그때는 그런 게 유행이었다. 어린 녀석이 무슨 술맛을 알았겠느냐만은, 한 번 인디카를 맛본 나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인공적인 맛으로 점철된 그런 맥주였다. 그래서 그런 곳에서는 오로지 생맥주만 주문했다.
한편 이 때는 수입맥주 시장이 막 부흥하던 때이기도 했다. 조용히 주류매대 한편을 우두커니 지키던 수입맥주였지만, 굵직한 수입맥주를 대기업이 점점 더 많이 수입하면서 대형마트에 왕창 유통되기 시작했다. '국산 맥주 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는 둥의 자극적인 기사들이 연신 쏟아졌고, 그 해 여름은 그야말로 수입맥주 부흥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은 흔하게 볼 수 있던 수입맥주들도 당시에는 신상인 것들이 많았다. 맥주라고는 딱 두세 종류 밖에 몰랐던 나의 메모리에 새로운 맥주들이 물밀차게 밀려오던 낭만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할 때였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대형마트에 맥주를 구경하러 들르곤 했다. 누가 보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 마트에 가서 맥주나 구경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겠지만 나는 그게 참 재밌었다. 뭐라고 발음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상한 영어가 적힌 레이블, 형형색색 컬러풀한 디자인이며, 참신한 로고들까지. 더군다나 대형마트 간의 ‘수입맥주 4캔 만원 행사’ 경쟁이 아주 치열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적인 세일즈마케팅에 그저 넋 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대학생이 얼마나 돈이 있었을까. 스몰비어에 쓸 돈 아껴서 대형마트에 가서 맥주를 몽땅 사 와서 자취방에서 마시곤 했다. 가끔씩 행사품목에 포함되지 않은 비싼 병맥주를 살 때면 빈병도 버리지 않고 자취방 한 구석에 전시해 놓으며 감상했다. 병뚜껑은 버리지 않고 빈 유리컵에 담아 모아두었고, 어디선가 코스터를 구할 수 있으면 한 장씩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감상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 맥주에 ‘집착’했었다.
오- 그래. 나도 무언가에 집착해 보는 감정이 있을 수도 있구나. 집착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일 수 있지만 사실 이는 조금 감격스러운 표현이다. 이때의 나는 이전까지 살면서 집착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러했다. 나에게 취미는 ‘전문성’의 다른 표현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 집요하게 파고들어 전문의 영역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취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고등학교 동창 중 한 명은 '오타쿠'라며 꾸준히 괄시받아 왔지만 그 이력으로 대학까지 가며 이른바 '성덕'의 길을 걷고 있었다. 또 다른 대학 동창은 밀리터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름만 대면 술술 나올 정도로 그쪽 분야에서는 꿰고 있었다. 그 밖에도 노래며, 악기, 운동, 언어, 공부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잘 알고 잘하나 싶을 정도로 신기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처럼 주변에 취미가 뚜렷한 사람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나 또한 전문성을 갖춘 명확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겠다며 이들의 취미활동에서 많은 귀감을 받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나의 취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어떤 귀감을 얻었으면 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무얼 취미로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유독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는 마치 ‘넌 뭐 잘하는 게 있냐?’처럼 들렸다. 기껏해야 축구하는 거였는데, 하는 건 좋아했지만 이 마저도 실력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어디에 떳떳하게 축구가 취미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거 말고는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게 없었는데... 왜 이렇게 대학교에는 대단한 아이들이 많은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빨리 취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온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던 찰나에 마침 인디카를 접하게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점차 맥주에 집착하기 시작했으니 스스로 이 얼마나 좋은 징조라고 여겼겠는가! 나는 마치 신이라도 영접한 것처럼 맥주를 칭송하고 추종했다. 내 취미는 맥주야! 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면, 전용잔을 모으는 행태를 그러한 집착의 한 종류로 말할 수 있다. 이때만 해도 전용잔행사가 그렇게 잦지 않았다. 당시에 자주 이용하던 네이버 맥주 대표카페가 있었는데, 여기에 일명 행사 ‘좌표’가 뜨는지 여부를 계속 지켜보는 게 일상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맥주로, ‘허니 브라운’이라는 이름의 달큰해 보이는 로고가 그려진 미국 맥주가 있다. 이 맥주가 아주 멋들어진 디자인의 전용잔을 아주 소량 풀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미친 듯이 재고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시흥 어느 대형마트에 재고가 풀렸다는 소식을 발견하고는 차도 없이 대중교통으로만 서울에서 시흥까지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가서 사 온 적이 있었다. 처음엔 다 그런 식으로 인증하지 않던가. 그런 식으로 좌표가 뜨면 후다닥 가서 패키지를 사 오는 식으로 전용잔을 하나둘씩 모았다. 그렇게 사온 전용잔에 전용 맥주를 따라 마시면 그 쾌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주변에 누구도 아직 나처럼 맥주를 취미라고 시작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비록 전문성을 아직 가지지는 못했지만 나름 희귀한 취미를 가졌다는 점에서 나름 뽕에 차올라 이를 바탕으로 점점 더 다양한 수입맥주부터 크래프트 맥주, 이른바 ‘수제맥주’까지 그 영역을 넓혀 마셔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놈의 ‘전문성’이 문제였다.
-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