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녁 Sep 13. 2023

#1 10년이 지나서야 철없던 맥덕 인생을 돌아보다

2011년 1월 1일, 나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여기 맥주 두 병 계산해 주세요!"


앳된 목소리와 달리 다소 삭은 얼굴의 사내들이 편의점에서 당당하게 맥주 두 병과 주민등록증을 내비쳤다. 그동안의 남몰래했던 일탈을 이제는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첫날. 바깥 날씨 추운 줄도 모르고 맨손에 희여멀건한 맥주 댓 병을 병째로 들이키며 밤새 고성방가를 지르던 민폐는 덤이다. 그렇게 스무 살의 기쁨을 만끽하던 녀석은 어느새 철없던 어린 날의 추억을 보듬어보는 서른 줄을 훌쩍 넘어버렸다. 그렇게 음주의 세계로 발을 들인 나는 이제껏 세계의 다양한 술을 향해 추파를 던지고 있다.


올해로 맥주를 포함한 술을 취미로 붙인 지 10년이 되었다. 그렇게나 술을 좋아했으면 대단히 전문가이지 않느냐고?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는 순간에도 '전문가로서 다양한 술을 더욱 깊고 알찬 정보들로 구성하여 작성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아른거린다. 그러나 앞으로 연재할 글은 '성덕'이 되지 못한 미생인 내가 그동안의 연혁을 정리하며 다시금 입문자로서 새로이 시작해 보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시작한다. 나의 찬란했던 10년. 나는 그 10년을 청춘과 아픔,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이십대라는 캐스크에서 푹 익어가는, 마치 위스키가 숙성되어 가는 모습으로 이해하고 싶다. 찬란했던 나의 흑역사와 자기 성찰. 무엇이 아팠고, 무엇이 기뻤으며, 방법의 후회와 그럼에도 남아있는 희망이 어떤 것이 있는지. 10년 숙성된 나의 지난날을 한 모금 음미하며 앞으로의 밝은 날을 다시금 그려보고 싶다.




처음부터 다양한 술을 즐겼던 것은 아니다. 웬만한 동네 술집에서 소주, 맥주가 3,000원을 넘기지 않던 그 시절, 소맥 말고 다른 술들이 가난한 스무 살 청년의 머릿속에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저렴한 어묵탕 한 그릇에 소주만 진탕 먹던 그야말로 객기 어린 음주가 이어졌을 뿐, 이것이 마냥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보다 넓은 대학이라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마셨던 술은 무의식 속 나의 응어리나 답답함을 배출하는 매개가 되었고, 이는 그리 좋지 않은 버릇들로 번져나갔다. 왜, 그런 경험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마치 <건축학개론>의 이제훈처럼, 다 큰 성인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머리만 큰 사춘기 애들이나 다를 것 없는 그런 모습이 딱 그랬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열등감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이 나를 술로 인도했고, 그 결과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러다 평생 소주에 담겨 사는 녹색 주정뱅이가 되는가 싶었으나 나의 음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사건이 발생한다. 정말 우연히, 아주 우연히 어느 호프집에서 이상한 이름의 고급 맥주를 마셔볼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일반 생맥주보다 3배 비쌌던 그 맥주는 손잡이가 없는 이상한 잔에 가득 담겨 나왔다. 진득한 브라운 컬러에 불투명한 이미지가 뭔가 먹음직스럽다기보다는 의심부터 앞섰더랬다. 그러나 향을 맡아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연신코 몇 모금 내리 마셔재꼈다.


'맥주에서 왜 와우 풍선껌 냄새가 진동하는 거야?'


맥주가 어찌 이리도 달콤하고 향긋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맨날 먹던 그 껌에서 나는 냄샌데... 이게 뭐지? 자두? 파인애플? 체리? 풍성한 거품은 당최 꺼질 기미도 없이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마치 뚜껑처럼 슥- 열리며 아래에 소중히 보듬던 갈붉은 맥주를 내어주었다. 손잡이 없는 큰 잔을 한 손에 잡는 것이 마냥 어색했지만 마실 때마다 잔에 선명하게 남는 트레이스(엔젤링)를 지켜보며 묘한 행복까지 느꼈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 왜 맥주를 마시는 데, 마치 한우를 먹을 때 삼키기 아까워 계속 씹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까? 마시고 싶지만 마시기 아깝다. 그렇게 다 마시고 거품만 남은 잔에 그려진 인도풍의 로고를 한참 바라보며 그동안의 음주를 반추해 보았다. 


'나는 무얼 마셨던 걸까. 그 맥주는 뭐가 달랐을까. 내가 먹던 맥주들은 뭐였고, 그 이상한 뭐시기 그건 대체 뭐지?'


집에 오는 내내 그 맥주가 가시질 않았다. 이름도 모르고 마시기 바빴던 데다가 이름을 물어볼 생각을 못했다. 다시 알아내려면 그 맥주집을 다시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생맥주 3잔을 포기하고 그 맥주 한 잔을 마시러 다시 가기로 마음먹고 나섰을 때 평소처럼 술 마시러 가는 느낌과는 확연히 달랐다. 야자를 도망치고 일탈하는 철없는 고삐리였던 내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건 일탈이 아니었다. 칠흑같이 깜깜한 바다에 한 줄기 등대빛 같은 거였달까. 그래 그 술을 알아내면 또 그 술을 마셔볼 수 있어! 그렇게 알아낸 인도그림의 맥주. 그게 바로 '인디카 IPA'였다.



요즘은 잘 안보이는 인디카... 벌써 추억이 되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