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녁 Sep 15. 2023

#5 아는건 쥐뿔도 없지만 자존심만 높아가지곤

오리엔테이션을 간단히 마치고 지체 없이 첫 단원부터 돌입했다. 국제단위법에 따라 단위를 자유롭게 변환할 줄 아는 것부터 기본이라나. 주변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공학용 계산기를 들고 있었다. 언제 숫자를 봤더라. 왜 국제사회는 하나의 단위로 통일해서 쓰지 않고 여러 단위를 혼용해서 쓰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걸까. 계산기도 없고, 교재를 어디서 사는 건지 나만 빈 공책으로 공부하나? 곧바로 이해도 되지 않는 데다가 수업 템포는 어찌나 빠르던지. 다들 정말 다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그렇게 두 시간이 넘는 수업은 의문과 의심으로 가득한 채 우여곡절 끝이 났다. 깐깐하신 교수님은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수업마다 미니 퀴즈가 있을 예정이고 이는 성적에 반영될 예정이니 철저히 준비하라며 엄포를 놓았다. 본 전공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던 퀴즈라니- 그래서 이 수업이 까다롭다고 했던 거였구나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맥주를 만들어 보고 싶어 시작한 이중 전공이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한 모양새였다.


그렇게 다음 수업 퀴즈를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 갔다. 퀴즈는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10분간 실시되었는데, 문제를 본 나는 정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우두커니 시험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 정말 하나도 모르겠네. 이건 분명 수업에서 안 다루었던 건데 어떻게 시험에 나온 거지? 잘 모르더라도 대충 아는 것처럼 이리저리 형용하고 꾸며내서 뚝딱 내놓으면 되는 문과식 답안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전형적인 수리 문제들이었다. 끙끙거리며 머리를 싸매고 이리찍고 저리찍어 겨우 답안을 작성해 제출했다. 퀴즈 결과는 이다음 수업 아침에 답안지를 줄 테니 확인하면 된다고 했다. 어떻게든 풀어서 답안지를 냈고, 나는 문과에서 온 학생이니 조금 편의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감에 휩싸였다.


아무렴 첫 퀴즈부터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랬을까? 생전 처음 보는 과목에 나는 아주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데 어쩌자고 점수를 잘 받겠다고 욕심을 부렸을까? 차라리 시원하게 말아먹고 교수님이든 주변 학우에게든 도움을 청해 보는 게 보다 합리적이었을 테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멋지게 해내서 보란 듯이 나타나고 싶은 욕심이 들어서다. 사실 나의 이색행보를 향한 주변의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예컨대 본 전공 교수님은 ‘너는 인문학과 과학을 융합한 진정한 하이브리드형 인재’로서 후배들의 아주 좋은 교본이 될 것이라며 기뻐하셨다. 누군가는 뒤늦게 이과 공부가 되겠냐며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부끄럽지만 나는 무슨 순정만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대단한 결정을 했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나를 둘러싼 수많은 기대와 호기심, 의심들을 이겨내고 좋은 결과만 내려면 스스로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고 말았다. 인문학도, 과학도 쥐뿔도 모르면서 말이다. 애석하게도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함이었는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자기 객관화의 부재는 실로 무서운 시지프스의 바위가 되어 나를 옥죄 가고 있었다.


역시나 처참한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00점 만점에 20점이라니. 내 인생에서 이렇게 낮은 점수는 받아 본 경험이 없는데.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시험에 임했는데 이렇게 허망한 결과가 나오니 그야말로 멘탈이 붕괴되는 심정이었다. 교수님은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시무룩하게 있던 내가 가여웠는지 좀 더 분발해야겠다며 스터디 그룹을 짜는 다른 학생들에게 이 불쌍한 학생을 누구든 데려가 좀 도와주라고 했다. 다행히 몇몇 학우들이 와서는 스터디 일정을 알려주고 생각 있으면 와서 같이 공부하자고 제안해 주었다.


그러고는 어디 후미진 곳에 가서 아이같이 펑펑 울었다.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맥주가 좋아서 이중 전공을 선택했을 뿐인데 이게 정녕 맞나 싶었다. 이 과정을 밟으면 언젠가 맥주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형편없이 곤두박질친 학점으로 인해 취업이 어려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맥주 한 번 만들어 보자고 앞으로의 미래를 스스로 불투명하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하는 후회가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고작 퀴즈 한 번 망쳤다고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내 포부가 이 정도밖에 안되었던가.


앞으로 더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낯선 이에게 먼저 손을 내민 식품공학과 학우들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스터디를 들어가서 식품공학부 생활에 필요한 여러 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끈끈한 선후배 관계를 통해 이미 전공필수 과목과 관련된 수많은 족보들을 주고받고 있었고, 이 족보에는 문제은행 교재처럼 그동안의 기출문제며 교수 대응법, 과제 리스트 등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이 귀한 자료들만 먼저 잘 공부하고 연습한다면 적어도 퀴즈까지는 문제없을 것 같아 보였다. 괜히 신세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분명 신세를 지었음에도 내 힘으로 해내지 못했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들었다. ‘첫 수업 때 맥주 좋아해서 이 전공 배운다고 했던 그 사람이에요!’ 라며 내가 먼저 웃으며 손 내밀어 도움을 청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내가 만든 맥주를 직접 들고 가 나눠주며 분위기 메이커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이미 나는 근심으로 가득한 무뚝뚝한 표정 일색의 자존심만 높은 허울 좋은 낯선 이방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음 계속.

이전 04화 #4 무식하면 용감하다던 문과생이 바로 접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