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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녁 Sep 16. 2023

#6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는 쭉정이였구나

이공학사 전공 취득을 위해 나름의 어려운 도전을 해나가고 있는 한편 점점 맥주 만드는 것의 본래 목적과는 소홀해지고 있음을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맥주를 만들고 싶은 건지, 식품공학 학사를 따고 싶은 건지. 점점 주객이 전도되고 있었다. 정말 맥주를 만들고 싶었다면 식품공학에서 배우는 내용을 양조에 연결하려고 노력이라도 했을 테다. 혹여라도 이 전공이 양조와 큰 연관이 없음을 한 학기 수업 동안 충분히 느꼈다면 다른 전문과정을 알아보거나 맥주 유학을 고민해 보는 등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알아보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 첫 번째 이유는 스스로 매우 특이한 이력을 밟아 나간다는 묘한 우월감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어문계열 학부생은 상경계열을 이중 전공으로 택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어문계열처럼 본 전공만을 살려 취업하는 길이 매우 좁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경영학부 전공수업에는 이미 타 전공 학생들로 득실거린다고 했다. 하지만 매번 그랬듯 정해진 길로 가는 일은 나에게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너무 뻔하게 보일까 하는 마음에 좀 더 튀는 이력을 남기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최초 하이브리드 인재로서 후배들의 모범이 되어달라는 본 전공 교수님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이상한 수식어구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는데, 그런 식으로 나를 포장한다면 분명 취업에 도움이 될 거라 믿었다.


결국 별 다른 계획이 없으니 '일단 껍데기라도 따 놓고 보자'는 데 중지를 모으고 말았다. 그 와중에 더욱 근사한 껍데기로 포장하려고 맥주를 화학조미료처럼 훌훌 뿌려댔다는 거다. 떨치지 못하는 관종 버릇이 최악의 타이밍에 기승해 버렸다. 예컨대, 진로계획을 어떻게 하고 있냐는 이야기에 나는 곧잘 당당하게 대답했다.


“어, 나 맥주가 좋아서 식품공학 복전해~”


말함과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맥주에 환장해서 식품까지 배워? 커리어패스가 확실한 것 '처럼' 보이게 만들기는 일단 성공이다. 그쪽 공부가 어렵지 않은지,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질문 세례 쏟아질 때면 마치 나는 승전보를 울리는 영웅이라도 된 양 기다렸다는 듯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과장하며 떠벌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부러움을 한껏 산 것 같은 우쭐함이 들었다. 누군가는 아직 진로의 방향조차 잡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진로가 확실히 정해졌다며 한참 부러워했다. 이미 취업은 마치 따 놓은 당상이 되어버렸다.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나는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는 빈 쭉정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는 ‘어떤 직무로 어디에 취업을 하고 싶으냐’조차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했다. 보통 식품공학을 학부 졸업하면 식품연구원이 되기 위해 절반 이상은 대학원을 들어간다. 학부에서 가장 관심이 높았던 과목의 교수의 연구실로 들어간다던지, 취업 아웃풋이 가장 높은 연구실로 들어간다던지 등 다양한 사유로 대학원생이 된다. 대학원 진학을 하지 않으면 QA나 생산관리 간혹 영업 직군으로 취업한다.


차라리 맥주 만드는 어디에서든 일하겠다고 굳건했으면 좋았을 걸. 솔직해지자면 나는 그런 자만 섞인 말을 통해 철저히 타자와의 차별성을 드러내고 싶었을 뿐, 정작 취업에 관해서는 매우 낙관적이었다. 남들 다 하는 대학 생활과는 다른, 나만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통해 성공적으로 취업을 해내는 과정을 증명하고 싶었던 거다. '아무렴 맥주를 안 만들면 어때. 이학사 졸업증도 있는데 기왕이면 양조가 하고 싶으니 가급적 맥주회사에서 양조사로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안되더라도 어차피 취업은 될거라며 낙관적으로 본 것이다. 그토록 바랐던 취미생활을 팔아 아무 데나 취업하는 데 쓰겠다니. 소중한 취미가 돈 앞에 무릎 꿇고 사라져 갈 참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언터쳐블한 '맥덕’이 되어 있으리라는 허영심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른 맥주 애호가들과 차별화를 두고자 했던 일종의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 취미든 하다 보면 분명 나보다 더 덕력이 높은 사람을 만나기 마련인데, 저마다 다른 강점으로 취미를 파고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맥주에 있어서는 맥주의 헤리티지를 인문학적으로 분석해 파고드는 이, 양조기술을 파고들어 자가양조 데이터를 쌓는 이, 시음기를 기가 막히게 쓰는 사람, 누구보다 빨리 신상을 마셔보는 사람 등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살려 보다 풍요로운 취미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마침 비교적 새로운 취미생활이었던 맥주는 수많은 집단 지성의 힘으로 이제 막 부흥해 가는 단계였다. 그 사이에 나는 숟가락을 얹든 풍악을 울리든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삐뚤게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이 덕력을 빛의 속도로 쌓아 나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지. 어떻게 생긴 내 취미인데. 이 취미가 뒤쳐지는 걸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초조해졌다. 그들의 공든 탑을 단번에 뛰어넘고 싶었다. 일종의 덕력 챌린지라고나 할까? 누군가 '맥주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해봤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늘 입이 떡 벌어지는 답변을 내어놓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유명해지고 압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기를 바랐다. 가끔씩 이런 상상도 했다.


'맥주를 좋아하는 한 인문대 학생이 이공학 전공을 가뿐히 이수해서 성공한 덕후가 되었답니다! 대단합니다. 맥주가 좋아서 그렇게까지 할 수가 있는 일인가요? 한 말씀해 주시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오산이다. 그 많은 애호가들의 순수한 맥주사랑을 고작 전공 하나 더 배웠다고 해서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느 머리에서 나온 건지. 취미를 가진 지 얼마 안 된 초보라 취미가 경쟁으로 불붙어가는 걸 인지하지 못해 나온 망상일 뿐이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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