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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녁 Sep 22. 2023

#10 맥주잡지에서 가까스로 일하게 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경리단길을 찾던 어느 주말이었다. 우리슈퍼에서 맥주를 구경하고 계산하고 나가려던 찰나에 못 보던 책이 쌓여있는 걸 보았다. 잡지인지, 책인지 깨알 같은 글씨들이 가득한데 분명 맥주와 관련된 것이었다. 제일 뒷장에는 이런 홍보문이 있었다.


한국 No.1 맥주잡지에서 객원기자를 모집합니다!

맥주라는 토픽을 주제로 월간지가 출간되었는데, 여기에 글을 쓸 객원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맥주잡지라니! 잡지에는 신상맥주, 맥주 스타일 연구, 이색적인 펍 소개 등 국내 크래프트 맥주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내용만 얼핏 보아도 무척 재밌어 보이고 설레는 업종에 채용 공고가 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덕업일치의 길인가.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덕력을 보여줄 때다 싶어 곧바로 페이스북으로 잡지사 페이지에 들어가 객원기자 모집 안내요건을 상세히 읽어보았다. 돈보다는 맥주와 관련된 일을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서 고민 없이 지원했다. 메일을 보내고 한동안 답장이 없어 서너번 더 보냈다.

글만 봐도 알겠다. 어, MZ청년 왔니?


하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시음기나 펍 방문기 등 맥주를 좋아하는 걸 증명할 레퍼런스로 그간의 포스팅을 모아 제출했는데, 아마 그게 한참 부족했던 모양이다. 사실 지원하면서도 ‘내가 객원기자가 되면 잡지가 엉망이 될 텐데’하며 노심초사했더랬다. 그 사람들이 사람 보는 눈이 좋은 거지 뭐. 실망은 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라 금방 추스를 수 있었다.


이듬해 4월, 잡지사에서 또 다른 공고가 올라왔다. 이번엔 파트타임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간단한 아르바이트가 없을까 찾아보던 찰나에 또 한 번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절대 떨어질 수 없지. 이때 인생 처음으로 ‘자기소개서’라는 걸 써보았다. 학교 수업 전부 다 제치고 며칠을 나를 포장하는 글을 쓰느라 소비했다. 그때 썼던 자기소개서를 다시 열어보았는데, 구구절절 혓바닥이 길어도 한참 길었다, 길었어. 마치 맥주를 잘 아는 것처럼 포장한 게 보이는 데다가, 이상한 의견과 비판의식까지 담아놓아서 자기 주관이 너무 뚜렷해 보였다. 이게 바로 MZ의 맛인가. 내가 채용 담당자라면 이런 지원자는 안 뽑았을 거다.

나는 대체 무얼 안다고 주제넘게 씨부렸던가


그래서 정말 귀신같이 또 탈락했다. 역량은 충분하나 다른 분과 함께 해보시기로 했단다. 이번엔 제대로 타격받았다. 그동안 맥주를 향한 나의 열정과, 애정과, 노력과, 정성과, 사랑을 듬뿍 담은 7장의 자기소개서가 먹히지 않자, 마치 ‘나’라는 인간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 대체 왜? 뭐가 부족하지? 다른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맥주를 좋아하길래? 나보다 얼마나 더 좋아하는 건데? 여기에 자기반성은 단 1%도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기고만장한가. 


더 절망적인 건 파트타임 하나도 못 뚫는 거라면 앞으로 취업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지금이라면 아쉽지만 다른 기회를 노렸을 텐데 당시의 나는 조금 달랐다. 어떻게든 여기서 일을 해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락 메일에 덧붙여 다른 자리라도 있으면 일하게 해 달라며 졸랐던 것이다. 돈도 필요 없으니 상시모집 건 있으면 다시 연락 달라는 식이었다. 아니, 돈이 왜 필요 없나? 돈이 제일 중요한 건데. 하지만 그만큼 간절했다. 그러고서 며칠을 술을 펐다. 입에 욕을 달며 지들이 뭔데 나를 탈락시키니 뭐니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를 때도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썼다는 자기소개서 다시 들춰보며 복기하지는 못할 망정, 투정이나 부리다니 밉상이 따로 없다.


며칠 뒤 갑자기 잡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메일 다시 보내준 것 보고 내부 논의 끝에 준혁 씨 면접을 보기로 했어요. 시간 언제 괜찮아요?’


그때 그 짜릿한 기분은 뭐랄까. 대학교 합격 소식을 듣고 난 이후 오래간만에 소름 돋는 기분이었다.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면접 볼 수 있다고 했다. 면접장소는 서래마을의 한 펍이었다. 낮맥 한 잔씩 들고는 지원동기와 평소 맥주에 대한 견해 등 솔직한 이야기가 오갔다. 면접이라기보다 새로운 사람과 맥주 한 잔 하며 내 이야기를 아낌없이 했던 자리로 기억한다. 그렇게 다음 날 합격 소식이 있었고, 나는 ‘매니저’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잡지 일에 동참할 수 있었다.


자칫 이것이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구시대적 발상처럼 보일까 우려된다. 결코 그런 불도저식 접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단지 수년이 지난 지금 혈기왕성했던 20대의 나를 돌아보며 이런 도전에 앞서 보다 겸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반성에서 비롯한 것이다. 나를 돌아보고, 좀 더 숙이는 법을 알았다면 앞으로 서술할 잡지사에서 일하며 벌어질 수많은 사건들을 좀 더 영리하게 풀어내고, 더 나아가 맥주에서 발을 떼는 최악의 선택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 다음 계속. 


이전 09화 #9 나의 요람, 나의 경리단. 그때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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