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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녁 Sep 26. 2023

#11 겸손, 겸손은 힘들어

‘이어폰 껴야 업무 능률이 올라갑니다’


이른바 ‘MZ 신입사원’을 희화화한 코미디쇼의 콩트가 한창 유행이었다.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거나,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하거나, 이어폰을 끼거나 등등... 코미디쇼에서의 그들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진짜 회사에 저런 사람 한 명씩 꼭 있다며 악랄한 말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게 무슨 문제냐며 그들의 편에 선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참히 실패했다. 학교와 완전히 다른 사회생활에서의 적응을 실패했다는 점,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일로 삼는 ‘덕업일치’의 환상을 처참히 깨버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직 대학생 테도 벗지 못한 학생이 인턴도 뭣도 아닌 작은 조직에서 그저 파트타임으로 일해 본 경험을 과연 사회생활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아주 작은 경력일지라도, 내적으로는 단순 아르바이트를 넘어서는 상당한 의미가 부여되었던 업무였기 때문에 이는 쉬이 지워지지 않는 경험으로 남아있다.



정말 당연한 말이지만 학교와 사회는 자유와 책임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다르다. 첫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다룬 수많은 글들이 증명하듯이, 이유와 형태가 다를 뿐 누구도 처음부터 사회생활을 순탄하게 잘하기는 힘들다.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맥주잡지 조직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파트타임이었지만 철없는 열정으로 페이 없이라도 일하게 해 달라며 졸라서 얻어낸 성과였다. 세상에 내 손으로 열정페이를 받는다고 하다니, 그것만 봐도 요즘 MZ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어렵게 따낸 일은 ‘매니저’라는 직책으로, 에디터의 글들을 모아 편집팀에 전하고 N차 검수 때 오탈자나 디자인 오류를 함께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또, 에디터의 요청이나 요구사항을 취합해 전달하거나 혹은 디자인 편집 중의 애로사항, 예컨대 글이 너무 길거나 짧아서 생기는 문제를 에디터에 전달하여 원활하게 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에디터나 편집팀, 대표 모두 각자의 본업이 있는 분들이라 특정 사무실에 모여서 공동으로 작업하지는 못했다. 그렇다 보니 매니저도 원격으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에디터와 편집 사이의 원활한 소통이 될 수 있도록 중간자 역할을 잘하는 것이 중요했다. 


처음에 나는 일에 상당한 흥미를 가졌다. 일반적인 아르바이트와는 형태가 많이 달랐던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영구적으로 남을 미디어에 일조한다는 점에 상당한 자부심이 들었다. 모든 일원이 펍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다음 월간호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가 한 달에 한 번씩 있었다. 첫자리에서 새로 채용된 나와 동료 매니저는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며 다른 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에디터 분들은 맥주에 상당한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맥주로 파워블로거인 분들은 물론, 홈브루잉을 수차례 하며 양조를 기술적으로 파는 에디터, 기자이거나 해외에서 오래 생활하신 분 등 딱 봐도 나보다 대단한 분들이 많았다. 다들 맥주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쾌활한 성격인 것 같았고, 이렇게 대단한 분들 사이에서 조율하는 일을 하다 보면 크게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솔직해지자면, 사실 그렇게 낮은 자세로 업무에 임했던 건 아니었다. 나도 맥주 좋아하는 걸로는 절대 뒤지지 않는데, 무엇보다 나는 맥주가 좋아서 식품공학을 배우고 있지 않은가! 비록 파트타임이지만 정식으로 한 배에 탄만큼 나도 내 생각을 개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쯤에서 다시 통상적으로 말하는 ‘MZ’의 신입 마인드란 어떤 건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대략 아래와 같다


나는 한국에서 날고기는 인간들만 입학한다는 대단한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외활동도, 수상경력도, 자격증도, 인턴, 유학, 교환학생 등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청난 스펙이 있다.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이 회사에 입사했다. 나는 바로 현업에서 큰 프로젝트를 맡을 준비가 언제든 되어있다. 그런데 뭐? 복사해 오라고? 인쇄해 오라고? 나는 완벽한 인재로서 이 회사의 일원이 된 건데 정작 시키는 일은 허드렛일 뿐이네. 뭐지?


'나도 맥주 잘 아니까, 나도 전문가급이니까 나도 다른 에디터들처럼 기사도 써볼 수 있고, 글도 작성해 볼 수 있고, 의견도 낼 수 있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며 완벽히 오해했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아있다. 신입은 능력보다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 그것이 K-사회에서 중요한 미덕 1순위인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나는 업무적 위치와 고용형태가 공채와는 분명하게 달랐다. 그저 잡지가 잘 나올 수 있게 시간이 많이 드는 단순한 노동이나 편집장이나 에디터의 잡다한 요청을 수행하는 수준인 건 사전에 미리 잘 공지되어 있음에도 그런 욕심을 부렸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나는 자꾸 선을 넘고 싶어 했다. 나의 업무 영역을 넘어서는 일- 예를 들면, 글을 쓰거나 인터뷰를 하거나 탐방기, 방문기 등 현장 취재 을 하고 싶어 했다. 이것은 에디터의 영역이기 때문에, 나의 일이 아니었다. 혹자는 그런 의욕이 있었다면 좋게 보이지 않았냐고 묻는다. 처음에는 그랬다. 열정도, 의욕도 넘치니 내가 먼저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공식 계정을 만들어 운영하는 권한을 따냈다.


문제는 너무 과몰입한 나머지, 공식 계정을 내 계정처럼 생각해 버렸다는 점이다. 공식 계정일수록 상위의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어떤 콘텐츠를, 어떻게 개제할 것인지는 독단적으로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또한, 아무리 권한이 부여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전 공지 없이 마음대로 하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모두 ‘책임’의 영역에서 회사와 함께 해나가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어리디 어린양은 매우 독단적이었다. 계정과 올려나갈 콘텐츠에 관한 전반적인 아이디어나 콘셉트를 제안하고 모두의 동의 아래 진행했다면 좋았을 걸, 나는 너무나 내 의견만 고집하고 말았다. 여기에 뚱한 입과 표정은 덤이다. 누구도 모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존심만 가득한 나는 의견이 거절되고 권한이 줄어드는 기분이 들자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일종의 반항을 했던 것이다. 고슴도치처럼 바늘만 잔뜩 세운 말단직원과 함께 일하고 싶은 선배가 과연 어디 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찔했던 기억이다. 그때의 나를 한마디로 정의해 본다면 ‘눈치가 없다’라고 하고 싶다. 누가 나한테 한마디 따끔한 말이라도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그랬더라도 아마 나는 그 사람을 욕하며 절대 자존심을 구기지 않았을 것이다. 겸손할 줄 모른다는 건 그만큼 편협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일의 경중을 떠나, 소중하게 얻은 기회에서 보다 숙일 줄 알았더라면 아마 더 좋은 기회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코미디쇼의 콩트를 보고 악담을 퍼붓는 댓글들을 읽으며, 괜스레 마음 한켠이 아련하게 시려온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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