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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이 Mar 16. 2024

사람에 대해 기대는 낮추고 기회는 주자

어색함의 기회는 줍시다.

사람을 사귀고 어울리고 하는 과정에서 서로 상처도 받고 행복도 주고받고 하면서 어느덧 혼자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들이 꽤 많이 있다.

하지만 혼자서 잘 살아가는 타입이어도 사람이란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는 해야 자신의 삶의 가치나 의미를 더욱 생각해 볼 수 있는 존재라서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많은 노력도 하고, 스스로를 어필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건 어느 나라나 공통된 현상이다.


미국 같은 개인주의여도 사실상 이들도 사무치게 사람에 대한 정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고,

한국도 혼자가 편하다 해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소망하기도 한다.


타인과 함께 잘 지내려면 자신을 어느 정도 양보도 할 줄 알아야 하고, 타인도 비슷한 매너를 취하기도 해야 하지만,

사실상 어떻게 양보하고, 어떤 게 타인을 위하는 건지, 어떤 것이 옳은 건지 이것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해하고 인지한다 해도 사람마다 수용하는 가치와 의미가

다르다면 이 다름으로 인해 간격이 생기는 것을 좁히는 건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하는 것에 맞춰주고 배려하고 이런 과정 자체에 피로감을 느끼는 경우가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이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내가 참고 배려하는 것은 타인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괜찮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기준”에서는 나름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 “자신만의 노력”이 모두에게 적용되고 수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수용이 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어서


“자신만의 기준과 노력”을 더 이상 시도를 할 것인지 아닌 지를 고민하고 또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려고 하는지”를 생각해 보며 잠시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아무리 노력하고 대화도 시도하고 해도 매너를 모르고 아무 노력도 안 하려는 타인과는 적당히 “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아는 사람“정도로 지내면 된다.

그냥 아는 사람 정도로, 친해지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 본인은 노력은 한다 하는데 그게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나 상대가 몰라줄 경우


“대화를 해볼 수 있는 용기”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대화를 해서 관계가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여태껏 아슬아슬했지만 잘 버텨온 우정 같은 게 다 사라질 까봐, 서로 꾹꾹 참고 넘어가는 경우들도 있는데 이럴 땐 “대화를 어떻게 하는 가”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사람은 ‘말을 할 줄 안 다해서 대화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대화는 서로 오고 가는 과정에서 경청하는 태도도 굉장히 중요하고, 자신이 해야 하는 말은 상황과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여 단호할 때는 단호하고, 친절할 때는 친절하게,

아닌 건 아닌 거고, 옳은 건 옳다는 “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개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스스로가 생각해 보면서 이에 대한

표현도 적절하게 할 줄 아는 동시에 타인에게도 충분히 말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어느 정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대화의 가치를 알기는 알고 인식은 하고는 있지만, 막상 정말 서로 대화다운 대화가 잘 오고 가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가 않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것도 필요하다” 서로 가치나 대화다운 대화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몰라서 오는 실수는 당연히 존재하므로 “상대방이 바로 개선이 될 것이라는 기대 자체를 최저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대가 낮으면 상처를 덜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대화에 대해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사실상 개인이 타인의 대화 습관을 고친다는 건 굉장히 어렵고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사소한 일상의 습관 하나마저도 고치기 어려운 게 사람이다. 하물며, 자신이 대화에 대한 피드백을 잘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거나 피드백을 받아도 쓴소리니 잔소리로만 듣고

고칠 생각은 안 하고 피드백 준 사람에게 뭐라고 하는 경우들이 훨씬 더 많아서


자신이 잘 지내고 싶은 타인으로부터 원하는 대화의 태도 같은 걸 바라거나 고쳐지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본인이 우선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많이 연습하고 피드백도 받아보고, 머릿속에서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 보는 그런 습관을 조금이라도 길러보는 게 더 효율적이다.


그럼 자신은 이렇게 노력하는 데 타인은 왜 안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는 데,


사람은 “자신의 변화된 것이나 성장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대화”이다.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는 쉽게 감지는 못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 대화 속에서 어느 정도 알아채는 게 가능하다.

개인에 대한 건 타인이 더 잘 알아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자신은 거울을 보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을 해야 어떻게 대화하는지 볼 수 있지만, 타인은 본인을 직접 마주하며 보면서 바로 듣고 있기 때문에 변화된 부분이 있다면 알 수밖에 없다.


이때 타인의 표정이나 반응을 조금 살펴봐야 한다. 자신의 변화를 감지한 타인이 살짝 어색해할 수도 있는데 그 어색함도 지속되다 보면 자연스러움이 되고

그 어색함 덕분에 타인도 본인처럼 성장을 보일 확률이 조금이라도 생기게 되며 시간이 지나서 그 타인조차도 자신과 비슷한 대화 방식을 추구하게 된다.


서로 좀 더 나은 관계를 위해서 시도하는 “대화”에서 변화가 있어야 하는 건 필요하다. 그 변화에서 서로가 인지 되는 순간부터 약간의 낯설고 어색함을

누군가는 견딜 수가 없어서 포기하는 일도 있고, 그 어색함이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줄 수도 있다.


여기서 반응을 보며,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본인”과 “타인도 그 본인을 어색하게 인지하고 그 후에도 계속 어색함을 느낀다면 그건 개선의 여지가 충분한 신호”이며,

그 타인과는 오랜 관계를 맺어도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변화는 원래 어색한 것이고 낯선 것이다. 어색함을 느끼는 타인에게 비난한다면 옳은 것이 아니다.

그 낯선 걸 낯설 게 못 느끼는 타인이 있다면 한 번쯤은 “같이 대화하는 연습”을 해보자는 말을 해볼 필요도 있다.

말을 안 하면 정말 모르는 사람도 존재하기 때문에 같이 시도해 보는 노력을 제안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들이 충분히 있었는 데도 변화가 없거나 어색함 조차 못 느끼는 타인이라면 “그저 그런 지인”으로 간간히만 연락하고 살면 된다.

본인도 타인의 변화로부터 ‘어색함’을 못 느낀다면 본인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변화의 어색함 감지를 못하는 사람에겐 “기대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관계에 대한 기대, 배려에 대한 기대, 상호작용에 대한 기대 등 여러 가지의 기대를

생각하지 말고 악의는 없는 사람인 경우엔 그저 그런 아는 사람으로 지내고,


본인만 노력한다는 생각만 계속 들게 하는 타인과는 단호히 그 관계를  끊어낼 수도 있어야 한다.


기대치를 낮추면 관계 끊어내는 것도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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