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해보니까 어때?”
“지난번에 요가하고 다쳐서 한참 물리치료 다녔잖아.”
“왜 다쳤어? 집에서 혼자 연습하다가 구르기라도 한 거야?”
“아니, 딱 한번 수업 들었는데, 다음날 목이 안 움직여지더라고.”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문득, 저 통증이 다쳐서가 아니라 근육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강한 운동을 하고 나면 다음 날 근육이 당기는 경험 있지 않나. 이를테면 등산을 갔다 오면 종아리가 당겨서 걷기가 힘들다거나, 스쿼트를 많이 하면 걸을 때마다 엉덩이가 아프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나는 어깨서기 동작을 하며 뒷목 근육을 길게 늘이고 나면 다음날 목이 뻐근하다. 근육의 신장성 수축 때문이다. 통증이 느껴지면 전날 운동을 잘했다는 뿌듯함을 트로피처럼 여기는데, 친구는 통증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몸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것이고 본인이 불편하면 병원에 가는 게 맞기 때문에 병원에 잘 다녀왔다고 말했다.
최근에 나병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나병, 한센병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몸이 문드러지기 때문에 문둥병이라고 부른다는 것, 소록도라는 곳에 한센촌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이것은 몸이 썩는 병이 아니라 신경을 짓눌러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만드는 병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은 병 자체가 아니라 베이고, 찢어지고 화상을 입고 멍든 손과 발을 돌보지 않는 환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를 기술한 저자는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이들은 고통받지 않는 이들에 비해 형편이 좋지 못하다고 여겨지지만, 고통받는 이들도 스스로를 돌보고, 스스로를 지키고, 변화를 모색하고, 더 큰 상처를 방지하고, 회복해 낼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지나간 고통에 대해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무력한 것"이라고 말했다.
레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강한 수련을 자주 하지 않는 내가 가끔 하는 아쉬탕가 요가는 100% 확률의 통증 유발 프로그램이다. 그 고통을 알기에 두려운데도, 좋다. 내 꿈은 아쉬탕가 새벽 수련을 하는 것인데, 그것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수련에 진심이 될 나를 알기에 이 핑계, 저 핑계로 그 시작을 미루고 있다.
“프라이머리 시리즈는 치킷샤, 치유입니다.”
아쉬탕가 선생님은 이렇게 입을 떼셨다.
치킷샤는 우리말로 ‘치유’라 번역되고, 영어로는 therapy, treatment, cure 등으로 통용되는 산스크리트어 요가 용어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요가 용어 이전에 아유르베다에서 사용하던 용어였고, 요가에 들어온 것은 그다음이라고 한다. 아유르베다에서 치킷샤는 식이, 허브, 마사지, (젊음의) 회복, 요가, 명상까지를 아우르는, 그래서 의학적인 치료뿐 아니라 삶의 방식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아유르베다에서는 요가 자체를 야마, 니야마적으로 마음을 제어하기 위한 행동의 치유법이라고 일컫는다. 반면 요가에서 사용될 때의 치킷샤는 좀 더 영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긴 하다.
치유의 목적은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발란스를 맞추고, 독소를 배출하고,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쯤 될 것이다. 아쉬탕가 요가를 해보면, 프라이머리 시리즈가 ‘치유’인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쉼 없는 움직임이 일으키는 몸속의 불과 열이 혈액순환과 디톡스로 이어진다. 몸을 앞으로 접고 뒤로 꺾고 비틀어내는 동작들의 자극이 굳어있고 뭉쳐있던 근육들을 풀어준다. 집중을 통해 떠다니는 생각과 감정을 가라앉혀 마음의 정화도 이룰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한 수련으로 안 되던 동작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손으로 발가락 끝을 잡을 수 있다거나, 한 발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는 경험을 통해, 불가능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할 수 있다. 패턴에 갇혀 제한되어 있던 사고를 무한한 가능성으로 펼칠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쉬탕가가 치유인 이유는 땀과 근육통으로 대변되는 육체적 고통과,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는 내적 갈등과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통해 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치유는 돌보는데서 비롯된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나는 마리스>(2018)에는 거식증을 앓아 입원, 퇴원을 반복하던 15살의 소녀 마리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요가를 시작하고, 최연소 강사가 되어 새로운 삶을 찾고 누군가의 희망이 되는 스토리가 있다. 거식증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무기력해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식사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리스와 함께 요가 지도자 과정을 시작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은 요가를 시작한 계기가 비슷했어요. 바로 패배감 feeling of being broken 이죠.”
그녀들은 고작 10대의 나이에 패배감이라는 고통을 느꼈다. 그걸 정면으로 응시했기에 그들은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고통이 이들을 지켰다.
요가를 운동이 아닌 수련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리고 얼핏 괴이해 보이는 과도한 자세를 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려운 자세를 하며 맞닥뜨리게 되는 거부감, 고통, 피하고 싶은 마음을 직면하면서, 그 마음을 다스리면서 성장할 수 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연결시키는 거다.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고통에는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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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에디 https://instagram.com/edihealer
그림: 제시 https://instagram.com/jessiejihy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