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가언니 Apr 08. 2024

누드비치 또는 예술

니스 Nice

제게 누드비치 사진은 없습니다만….

누드 비치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이었다. 바다라고는 해운대에서 튜브 타고 놀던 경험밖에 없던 내가 첫 유럽 여행을 떠나 막 지중해에 도착했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살색.

“우오~~~”

라며 구경하고 가자는 친구의 손을 꼭 잡고 (내 친구 여자임) 이 유교걸은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해변이 모래가 아니라 자갈이라 발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당황해서 허둥지둥. 그게 나의 첫 니스이다. 20살 때의 일이다.


10여 년이 흐른 후 30살 즈음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니스에 한 번 더 갔었는데, 와인을 사랑하는 내게 보르도나, 문화의 중심지 파리, 역사책에서 배운 아비뇽 유수의 그 아비뇽에 밀려 니스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 후로 10여 년, 다시 니스다. 칸 영화제가 열리는 칸과 그레이스 켈리의 나라 모나코를 가기 위한 경유지 정도로만 여겼던 니스였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 여행의 중심은 니스이다.


니스해변. 오전에 비가 오고 막 그친 날이라 바다 색이 쨍하지 않네요.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해변에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숙소를 잡았다. 더블침대 방 두 개에 소파와 6인용 테이블, 큰 아일랜드가 놓인 거실이 있는 집을 빌렸다. 세탁기와 건조기까지 구비되어 있는 에어비앤비인데 이 가격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저렴했다. 3월은 남프랑스 여행의 비수기인 덕분이다.   


니스가 접한 바다 지중해. 지중해는 여름에는 거의 비가 오지 않고 겨울은 따뜻해서 유럽인들의 휴가지로 환영을 받아왔다고 한다. 우중충한 날씨가 지속되는 영국인들에게 특히나. 오죽하면 니스에 ‘영국인 산책로 Promenade des Anglais’가 다 있겠나. 니스를 사랑한 영국인 사업가의 기부로 산책로가 조성되었단다. 가이드북을 보면 어떤 해변은 전망이 아름답고, 어떤 해변은 주변에 맛있는 레스토랑이, 어떤 곳은 조용하다며 크기가 그리 크지도 않은 해변마다 이렇게 이름과 특징을 열거해 놓았는데, 니스 비치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비치마디 이름이 붙어있음/ 니스해변의 상징 파란의자

지금은 3월 중순, 아침부터 비가 내린 터라 날씨가 쌀쌀하다. 나는 오늘도 경량패딩에 코트를 겹쳐 입고 나왔다. 당연히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이 난 강아지들만 첨벙첨벙 바닷물에 발을 담글 뿐. 니스 해변의 상징인 파란 의자 chaises bleues에 앉아 생각해 보니 이렇게 탁 트이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 누드비치일리 없다. 보통 그런 곳들은 ‘Naturist Beach’라 부르며 엄격하게 접근을 제한하고 관리한다. 그러니까 20여 년 전에 내가 봤다고 믿는 그 장면은 아무래도 왜곡된 기억 같다. 누드가 아니라 탑리스 정도가 아니었을까? 막 대학생이 된 나에게 탑리스도 처음이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니스에서 바다만큼 중요한 키워드는 예술이다. 니스는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한 도시이다. 온화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광 때문이겠지, 아무렴. 앙리 마티스는 1917년부터 1954년까지 40년 가까이 니스에 살았고, 이곳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사후에 작품을 니스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러니 니스에 도착하고 첫 목적지는 당연히 마티스 미술관이다!  


그림같은 마티스 미술관과 휴관 공지문   (출처: https://www.musee-matisse-nice.org)

마티스 미술관 휴관.  


이런 것이 인생의 법칙인 것인가. 비수기라 숙소를 저렴하게 예약한 우리는 비수기라 리노베이션에 들어간 마티스 미술관에 갈 수 없었다. 작품들은 지금 도쿄에 대여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 프랑스까지 왔는데 마티스의 작품들은 서울과 가까운 도쿄에 가있다니……


샤갈미술관. 오른쪽은 2023년에 추가된 새로운 컬렉션 중 하나인 <Le Cavalier mexicain en rouge et son cheval violet>(1943)

다행히 니스 미술관의 양대산맥인 샤갈 미술관은 개관 중이었기에 지체 없이 목적지를 변경했다. 샤갈이 프랑스 정부에 기증한 작품을 포함한 450여 점의 규모로 샤갈의 단일 컬렉션 중 최대인 미술관이라 한다. 지금은 ‘마크 샤갈 국립 박물관 Marc Chagall national Museum‘ 이지만(2008년 명칭 변경) 개관 당시에는 ‘마르크 샤갈 국립 성서 메시지 박물관 Marc Chagall national Museum of the Biblical Message ’ 이라 불렀다. 그만큼 성서 관련 컬렉션이 알차다.


미술관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것은 남녀노소 만국공통인 듯

미술관에 들어가면 대형 작품 12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대작들이 착착착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누구라도 공간이 작품에 맞추어 설계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듯하다. 그만큼 군더더기 하나 없이 완벽하게 아름답다. 디테일마저 어찌나 섬세한지, 작품마다 QR코드를 찍으면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내가 원하는 언어의 작품해설을 들을 수 있다. 불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까지 지원이 된다(한국어는 없음). 심지어 성인용 해설과 어린이용 해설이 별도로 준비되어 있는데, 영어 해설을 듣다 지친 나는 슬쩍 어린이 해설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내 수준이 아닌가! 언어 실력은 물론이고, 종교와 관련된 상식이 딱 앙팡 enfant 수준인 것이다.     


The Hall of the Song of Songs. 5점의 장미빛 작품들

성서에 대한 이해도, 신앙심도 깊으신 엄마가 와보시면 좋을 것 같아 작품 사진을 찍어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로부터 “니스 샤갈 미술관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인데.”라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래서 다른 아름다운 사진도 더 보내드렸다.


 (좌) 복도 한 가운데서 빛을 발하고 있는. (우) <춤 La danse>(1950)

전시장은 전반적으로 밝은 느낌이었는데, 창문을 적절히 활용해 채광을 극대화시켰다. 이를테면 통창 좌측 벽면에 걸려있는 <춤 La danse>(1950) 은 환하게 내리쬐는 태양광과 선명한 색채들의 조화에 그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절로 ‘우와’ 라는 감탄사가 나왔다. 말 혹은 소의 형상을 하고 있는 빨간 무용수와 녹색 여인이 노란색 바탕위에 존재하는 색채의 배치만으로도 강렬하다. 여기에 하단의 춤추는 여인들과 상단의 리드미컬한 선이 역동성을 더한다.


공간이 작품에 딱 맞게 설계된 것이 감탄스러웠던 다른 하나는 <예언자 엘리야 The Prophet Elijah >(1970) 모자이크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방이다. 방에 들어서니 관람객들이 통유리를 향해 앉아있다. 그곳에 함께 앉아 창밖을 내다보니 딱 내 눈 높이에서 기가막힌 모자이크가 펼쳐지는 것이다. ‘불의 선지자’라 불리는 엘리야가 불의 전차 위에 서있고 12 별자리 상징에 둘러싸여 있다. 생명의 순환을 상징한다고도 읽기도 하고 성경과 별자리의 조합에 대해 지중해식 혼합주의라 일컫기도 한다.


<이삭과 레베카의 만남 La rencontre d'Isaac et de Rebbecca au puits>(1970)

반면 전시장 반대편의 어두운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환상적인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 깊은 오디토리움이 있다. 눈으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을 하나하나 따라가다가 시선이 무대에 이르니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보인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모양은 연주회장에서 보던 그랜드피아노 모양인데 아담하고 특별하다. 홀린 듯 무대를 향해 나아가 보니, 그랜드피아노가 아니라 하프시코드였다. 16-18세기에 많이 사용되었던 피아노의 전신 격인 건반악기이다. 하프시코드 뚜껑 안쪽에 <이삭과 레베카의 만남 Meeting of Isaac and Rebecca> 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하프시코드는 현재까지도 연주된다던데…..샤갈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듣는 음악이라니, 얼마나 멋질까.


마티스 미술관이 문을 닫은 덕분에 샤갈 미술관을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었으니 다시 한번 새옹지마이다.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


샤갈미술관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나는 아쉬운 마음에 예술의 도시 니스에 있는 다른 미술관을 찾아본다. 니스에는 MAMAC(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이라는 현대미술관이 있다. 1960년대 이후 아방가르드미술을 위주로 전시를 하는데 니스 태생으로 파란색 모노크롬 작품으로 잘 알려진 이브 클라인 Yves Klein 과 프랑스의 대표적 현대 조각가 니키 드 생팔 Niki de Saint Phalle의 컬렉션이 알차다고 한다.


출처: https://www.mamac-nice.org

흐음... MAMAC도 리노베이션 중이란다. 다가오는 여름휴가철을 준비하는 관광도시의 모습은 이런 것이구나. 참으로 프로페셔널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선택한 곳은 뮤제데보자르 Musée des Beaux-Arts de Nice. 언덕을 올라 아름다운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는 미술관이었다. 올라가는 내내 한남동 고급 주택가를 걸어 올라가는 리움미술관이 떠올랐다. 지금은 <Vivre pour l'art - Les collections Trachel et Rothschild à Nice >라는 전시로 트라첼 가문과 로스차일드 가문이 니스시에 기증한 작품을 마세나 박물관과 공동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마세나 박물관은 주로 니스 역사에 관한 전시가 진행되는 곳으로, 나폴레옹과 조세핀 거주했던 장소라고 한다. 내부를 보지는 않았지만 건축물 자체가 굉장히 멋지다.  


Musée des Beaux-Arts de Nice. 전시보다는 미술관 자체가 더 예뻤다는!


오히려 별 기대 없이 지나가다가 보석을 발견한 곳은 마세나 광장이었다. 숙소를 시내 중심부에 잡은 덕에 매일 마세나 광장 앞을 지나다녔다. 갤러리아 라파예트 같은 백화점과 각종 레스토랑이 위치한 번화한 중심인데 자동차는 다닐 수 없는 대신 트램이 운행하는 곳이라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블랙 앤 화이트 타일과 빨간색 벽면의 건물과 민트색 창틀의 조화가 너무 아름다워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찍다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음? 이게 뭐지? 사람들이 높은 데에 올라가 있잖아?”  


하우메 플렌사 Jaume Plensa의 작품이다. 하우메 플렌사는 조각가이자 미디어를 활용하는 시각예술가로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전시된 공공미술인 <크라운 분수 Crown Fountain>(2004)로 잘 알려져 있다. 분수에 세워진 15m 높이의 LED에 꽉 찬 사람 얼굴, 그 입에서 분수가 나오는 인터렉티브 작품으로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Crown Fountain>(2004) 출처: https://jaumeplensa.com/


마세나 광장에 세워진 기둥 위에 7명의 사람이 앉아있는데 그 자세가 무릎을 꿇은 명상 자세이기도 하고, 몸을 웅크린 자세이기도 하다. <Conversation à Nice> (2007)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7이라는 숫자는 일곱 대륙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작품은 해가 지고 다양한 색상의 조명이 비쳐야 비로소 진가를 나타내는데 서서히 빛의 색깔이 변한다. 색깔의 변화는 그들 사이의 대화를 상징한다는데, 이렇게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방식의 의사소통이라니. 그래서일까, 이 작품을 공동체 간의 소통을 의미하는 작품으로 읽기도 한다.


야간의 모습/ 우표로도 출시되었답니다. 출처: https://jaumeplensa.com/

아름다움이라는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시각으로 니스를 돌아본 하루였다. 이제야 니스는 누드비치의 도시라는 오해를 풀고 예술의 도시로 거듭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