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식(臥息)의 역사
나는 누워서 모든 걸 다 한다. 누워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유튜브를 보고 카톡을 하고 인스타그램을 하는 건 예사, 누워서 책을 읽고 누워서 글씨를 쓰며 누워서 메이크업을 지우고 심지어는 누워서 밥도 먹는다.
나는 어쩌다 누워서 모든 걸 다 하는 사람이 됐나.
모든 게 바뀐 건 열여덟의 여름이었다.
노는 게 바빴던 중학생 시절을 거쳐 고등학생이 되니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그 시절을 견뎠나 싶은데, 내가 다니던 사립고등학교는 우열반으로 반이 나뉘어져 있었고 ‘특수반’이라 불리는 성적 우수반 아이들은 자정까지 별도의 열람실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야자가 끝나면 독서실에 가 새벽 세 시까지 공부를 했고, 그러고서야 집에 가 잘 수 있었다.
알고 봤더니 선천적으로 약했던 나의 척추뼈는, 너무 오래 앉아 있던 그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던지 자꾸만 앞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 보면 다리가 저렸다. 처음에는 다들 앉아 있으니 다른 애들 모두 다리가 저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만 그랬다.
엄마 손을 잡고 가게 된 병원 세 곳에서는 모두 수술을 권했다. 아이가 아직 어린데, 대학 가고 나서 수술하면 안 될까요. 엄마의 떨리는 질문에 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이미 배쪽으로 반 이상 전진한 척추뼈가 신경을 눌러 하반신이 마비됩니다.
‘척추전방전위증’이었다. 간혹 이름도 어려워 말을 해도 다들 고개를 갸웃하는 ‘이 병’에 걸렸다는 연예인의 기사를 접할 때도 있었다. 기사마다 ‘희귀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아직 내 주위에서 이런 병에 걸렸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열여덟의 그 여름. 자꾸만 배쪽으로 나가는 척추뼈를 고정하기 위해 나사못들을 박는 수술을 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네 개인지 여덟 개인지를 박았다. 3개월이면 걸어서 학교에 갈 수 있다는 의사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나는 예후가 좋지 않아 1년 동안 병원에서 살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대학도 아닌 고등학교를 휴학했고 대소변도 혼자 가릴 수 없어 엄마에게 의지했다. 걷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라 1년 동안 그야말로 누워 지냈다. 엄마가 빨대를 물려주면 누워서 물을 마셨고 엄마가 떠먹여주는 밥을 먹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 욕창을 달고 살았고, 수술만 하면 잘못돼 일곱 번의 수술 끝에 결국 박은 나사못을 다 다시 빼기에 이르렀다.
한동안은 매일 밤 울었다. 곁에 엄마가 있으니 엄마한테 상처가 될까 봐 밤마다 흐느꼈다. 간호하는 엄마에게도 그 1년은 너무나 힘든 시간이어서 차라리 네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고 말한 적도 있었다(이 말은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픔으로 남아서 엄마는 끝끝내 그 말을 털어내지 못하고 가셨다. 나는 괜찮은데, 나는 정말 괜찮은데).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잤고 먹지 못했다. 배변조차 내 맘대로 되질 않으니 싸는 것도 못해서 우울증에 걸렸다. 소변계를 꽂아본 사람들은 알 거다. 시원하게 소변을 보는 기쁨을. 아파본 사람들은 알 거다. 내 힘으로 화장실에 걸어가 끙끙거린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친구들이 문병 오면 씻지 못해 떡진 머리를 감추기에 바빴다. 믿지도 않던 신을 찾으며 제발 병원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시절의 나는 두 가지 방법으로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병원에서의 시간을 견뎠는데, 하나는 계속 반복해서 듣던 씨디플레이어 속 음악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GO』였다. DJ뽀스는 말한다. "혼자서 묵묵히 소설을 읽는 인간은 집회에 모인 백 명의 인간에 필적하는 힘을 갖고 있어."
주인공 스기하라는 조총련계 중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으로 국적을 옮기고, 나중엔 일본학교에 진학하는 고등학생이다. 이 책은 연애담을 표방하지만 나에게는 이쪽과 저쪽, 양쪽 모두에 속하지 못하는 재외교포의 성장담으로 읽혔다. 친구들이 수능을 준비하는 고3이 되었을 때까지 누워 있던 내가 한 살 어린 동생들과 학교에 다닐 결심을 하고, 스무 살에도 계속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데에는 스기하라가, DJ뽀스가 큰 힘이 되었다. 혼자서 묵묵히 소설을 읽는 인간은 제 아무리 무수한 시간이라도 견딜 수 있음을, 그때 알았다.
병원에 입원해 걷지 못하던 1년, 그저 누워서 병원 천장만 보던 1년은 나를, 나의 삶을 바꿔 버렸다. 나는 공부 따위 하지 않기로 했다. 모름지기 건강이 최고이니 그저 누워서 책을 읽을 뿐.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다빈치 코드』 , 『연금술사』, 『미쳐야 미친다』, 『그 남자 그 여자』, 『칼의 노래』, 『11분』 같은 그해의 베스트셀러는 모조리 읽었고 서점 주인이 사정을 듣고 엄마에게 권해준 건강서, 판타지소설들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어쩌면 그때 읽은 책들이 나를 출판계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도 책을 읽어서인지 공부를 안 해도 언어 점수는 상위권이었다. 모의고사에서 언어로 전국 2등을 한 적도 있었다. 선생님들이 놀라 비결이 뭐냐고 물으셨다. 숨겨둔 공부법은 없었다. 그저 누워 무수한 책장을 넘긴 것 외엔. 그게 당시 내가 삶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성격도 완전히 달라져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무뚝뚝하고 내성적이던 나는 어느새 주위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늘 입원할지, 내일 입원할지 알 수 없고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으니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에게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의 인생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로만 채우며 살자고 다짐했다(고등학교에 복학하고 나서 졸업할 때까지 나는 다시는 야자에 참여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1년은 내게서 남자친구를 앗아갔고, 장애등급을 안겨 주었다. 오랜 친구들과 같은 시간을 보내며 나눌 추억을 앗아갔고, 간이침대에 누워 병간호하던 엄마에게 척추협착증을 안겨 주었다. 가계는 기울었고 동생은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공부 대신 집안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낫지 못했다. 아직도 나의 척추뼈는 배쪽으로 60% 전진해 있는 상태 그대로이며 이제 나는 전처럼 반듯하게 눕지 못한다.
그러나 걷지 못한 그 1년의 시간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건 분명하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는 영화를 만든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은 25세까지 3000만 원의 빚이 있었다고 한다. “정말 나쁜 일이 발생하거나, 슬픈 상황에서도 그게 모두 나에게 재료가 될 거라 생각했죠. 그러니 나쁜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수 없는 거죠. ‘아이고 실패했네. 그럼 이걸 블로그에 써보자’ 하는 식이었어요. 25세까지 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에 30대가 된 때에는 그때의 실패에 이자가 붙어서 돌아온 기분입니다. 저는 노숙자가 되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25세까지는 실패를 모으는 기분으로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실패를 모은다는 기분이면 실패해도 너무 크게 낙담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또 저에게는 ‘실패’를 엔터테인먼트로 만든다는 게 좋았습니다. 그건 곧 코미디의 근간이니까요.”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의 말처럼 지나온 그 시간이 있었으니 나 역시 이런 글도 쓸 수 있다. 어쩌면 나는 대책 없이 낙천적인 걸까? 그러나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이것이 나의 와식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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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