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수경 유고집
(전략)
중독자의 봄 오후
버린 자의 봄 오후
버림받은 자의 봄 오후
…… 참고로 말한다면,
이렇게 오래 엎드려 있다가 일어날 수도 없는 봄 오후
하지만 나의 것인 봄 오후
당신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봄 오후
하지만 내가 이렇게 뜨거워서
실제 당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나와 당신만이 겨우 존재할 수 있는 봄 오후
온몸의 피가 불귀를 사랑하는 봄 오후
…… 참고로 말한다면
사실은 겨울이었던 이 무시무시한 봄 오후
섬득섬득 사라지는 빛의 봄 오후
북풍의 봄 오후
정말, 당신 때문일까,
이렇게 저녁을 준비할 자격이 있을까, 햇살아?
당신에게 부치지 못하는 편지들을 곱게 접는 봄 오후
- 2011년 4월 26일 「봄 오후」 중에서
너무 매달려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 첼란과 바흐만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너무나 서늘해진다. 아무리 뛰어난 모든 심장의 순간도 그렇게 가고 또 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 2011년 4월 28일, p. 14
나의 시가 자신의 시간을 사는 동안 나는 나의 시간을 살아간다.
- 2011년 5월 5일, p. 18
시간을 정확하게 해체할 수 없는 순간에 시는 온다. 어떤 시간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그 망설임의 순간에 시는 오는 것이다.
- 2011년 5월 8일, p. 20
시가 널널해져야 한다. 실험의 시간은 지나가고 언어와 언어가 표현해내는 세계와의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벼려야 한다. 이제 언어와 대결하는 일, 세계를 사랑하는 일만 남았다.
- 2011년 5월 14일, p. 24
연필을 깎다가 나무 향이 맡아져 연필을 내려놓고 마당으로 가서 미치도록 붉은 일본산 벚나무 아래에 서 있다. 꽃은 이미 졌는데 붉은 잎은 저녁 빛과 바람 속에 흔들린다. 저 풍경이 너무 도저해서 결국 포기한다. 당신 생각하는 걸, 저 나무가 당신이라는 걸 내가 까맣게 잊고 연필을 깎았구나. 미안.
삼각자를 모눈종이 위에 올려놓고 제도를 할 때면 온 영혼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1:50으로 축소되는 사물은 이 자의 반듯함을 사랑할까? 모눈의 작은 칸 하나 1밀리미터, 그 모눈 마다마다에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오랫동안 당신이 들어 있을 것이다.
: 오늘도 아프지 않고 글을 쓰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 분열이 글에서 보이지 않으니 나도 늙어가나봐. 그런데 분열이 보여서 어떡하겠니, 분열이 아니라 분열의 뒤가 보여야지. 분열과 갈망의 뒤가 보이는 글을 써야 한다. 너의 모습이 아니라 너의 뒷모습이 보이는 시를 써야 한다.
- 2011년 5월 17일
몸은 살아남을 것 같지 않고 죽음은 아직 먼 이 봄. 나의 시는 암울해서 끔찍하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하지. 왜 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시를 쓰지 못했던 걸까.
치열하지 않으면 죽는다. 독자 없이 사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울지 말아야 하며 많이 흔들려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지혜로운 것의 윤리성은 삶을 지루하게 하는가 아니면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예술가인 내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그건 예술가의 독이다. 상처와 전면전을 벌이는 인간에게 지혜를 요구하는 것은 윤리적이지만 그것은 예술가에게는 예술을 집어치우라는 말과 같다.
언젠가 어느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쓰면서 삶은 삶에 먹히고 결국 남는 것은 시라고 했더니 정말 그렇다.
- 2011년 5월 23일 p. 34
어떤 언어들이 마음속에서 나올 길을 찾지 못하고 울고 있다.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이 언어들이 나올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어떻게? 쓰면 풀릴 것이다. 어떻게? 돌아다니지 않으면 풀릴 것이다.
- 2011년 7월 8일
나는 포르투갈어를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쓴다. (페소아)
- 2011년 7월 30일
: 문학에 대한 절박함은 예술에 대한 절박함인지 말에 대한 절박함인지를 묻는다.
: 다만 삶에 대한 절박함인데 그 절박함을 인식하는 주체가 말을 통해서만 자신을 형성했다고 착각을 하는 동안 언어 예술의 긴장은 유지된다. 거의 죽음에 맞먹는 긴장 속에서 생겨난 말과 리듬만이 남고 한 인간이 죽음으로 들어갈 때.
이 세상의 많은 좋은 시는 완벽한 모놀로그를 다이알로그로 만들 때 탄생한다고 나는 믿는다.
- p. 58
결국 이 매캐한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둘러쌀 때 우리가 가을이라는 것을 우리 속에 안아들일 때 가을의 가장 미세한 날개에서 스러져가는 빛이 나올 때.
- 2011년 8월 22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을 좋아하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방. 그 방이 관이라는 걸 알겠네. 죽음이 목표인 이 삶은 너무 거대하구나.
: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마신 술의 농도를 생각한다. 잠이 들기 위해서 마시는 술. 새벽에 깨어 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마시는 술. 왜 깨어 있는 것이 고통스러운지 진정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시간까지 살아버린 것이다.
: 평생 시를 쓰는 일에 종사하면서 얻은 것은 병이고 잃은 것은 나다. 이 말을 어떤 직업에다 대고 해도 맞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일은 일이다.
- 2011년 11월 24일
우리처럼 기억을 사랑했던 인간이 그 순간 다섯 살 때 배웠던 자전거 타는 법을 잊어버려 다친 팔을 치료할 때 그때,
나는 나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나는 나를 버릴 수도 없어서 오늘 죽어도 아무 여한 없는 얼굴을 숙이며 무수한 이국을 지나쳤지. 제 그림자를 아세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할 수는 없는데 곧 떠날 거라서 그렇게 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도저히 친절해질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신실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자꾸 받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 오해일 수도 있을 테니.
- 2011년 12월 4일
구름 눈 바람 이 많은 것을 시에 집어넣으며 살았다. 철저한 나에 대한 부인이 나를 이끌고 나갔다. 아직 잘 모르겠다. 무엇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내 언어의 가장 선명한 곳에는 쓸쓸함이 있다.
- 2011년 12월 20일
당신이 나를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떠날 수 있었다. 갈 길이 먼 사람처럼 나는 서둘러 떠났다.
하루에도 몇 번은 절망한다. 하루에도 몇 번은 희망한다. 그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 p. 97
좋아하는 시들이 달라져야 한다. 옛날에 좋아했던 시들에 붙잡혀 있으면 안 된다. 그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쇄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옛 시들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버려야 한다. 그래야 헌 길이라고 생각한 길들이 새로 보이기 시작한다.
- 2011년 12월 29일, p. 119
: ㄹ의 시들은 잘 읽히지 않는다. 왜? 너무 시인 척하는 시를 쓰기 때문은 아닐까? ㄱ의 시처럼 시 아냐, 시 아냐, 하면서 쓰는 시들을 많이 만나고 싶은데…… 그의 시적 감각은 늙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건 그냥 느낌일까?
: 나에게 네가 부재할 때 어쩔 수 없이 부르는 것이 노래인가? 어쩔 수 없이 의식하는 것이 죽음인가? 절대적인 나는 없는 것. 네가 있음으로써 나는 정의된다. 불만이 아니다. 물만이 아니다. 다만 네가 있어서.
- 2012년 1월 8일, p. 131
어느 철학자가 쓴 『병원의 고고학』이라는 책을 읽은 적 있어요. 그곳에서는 죽어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아서 발굴을 하면 장갑만이 나온대요. 뼈만 남은 손을 가난하게 감싸고 있던 세월요.
꿈을 적기로 마음을 먹었다. 꿈에 대한 모든 것을 문서로 작성하기로. 글도 그림도 음악도 삶도 일종의 꿈이 작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이 글이 시라는 형태로 나타날지 아니면 에세이라는 형태로 나타날지 아니면 그 두 개가 결합될 것인지는 모르겠다. 텍스트의 형식에서 자유로워지면 그 안에서 노는 것이다. 그뿐이다. 글이 멈추어지면 그만이다. 글이 쓰이면 그것도 그만이다. 이제 읽고 쓰는 것 말고 나에게 남은 것은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외국어도 그 표정도 이 글 속에 들어와야 한다.
- 2012년 1월 17일
누군가가 전화를 했다. 오겠다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알아듣는 척했다. 그 사람은 자주 불쾌한 말을 하거나 신경질을 내는 사람이었는데(참 그것도 그런 게 나는 그 사람을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몰랐다는 말. 조금 더 알게 되면서 그 사람의 가식이나 신경질에 대단히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는 느낌이 든 순간,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뭐라고 하면 그냥 듣는 척하자.)
- 2012년 1월 20일
어제 꾼 꿈. 어제 읽은 책들을 마저 읽으며 하루를 보내면 그 글 안에 들어 있던 수많은 꿈이 오늘밤에 나를 덮쳐오겠지.
- 2012년 1월 21일
뭐가 그렇게 사무치고 쓸쓸했나.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과거였고 오늘이었고 미래라서 그랬을 것이다. 나를 고독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것은 나라는 세계밖에 없다.
- p. 125 시작 메모 중에서
아, 아직 나는 쓰지 못하겠다, 너무 아파서. 나는 일어나서 컴퓨터 앞으로 매일매일 오지만 결코 무언가를 쓸 수 없었다. 다만 쓸 수 없었다. 너무 아팠다. 뭔가가 내 속을 건드리고 가면 너무나 아려서 숨쉬기조차 곤란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또 졌다. 시를 쓰면서 졌고 살면서도 졌다. 죽음을 준비하는 언어로 시를 쓰는 걸 보니 말이다.
- 2012년 1월 16일, p. 141
왜 나는 어떤 사람의 글에서 위선만을 읽는가. 더이상 읽지 않아야겠다. 위선만 보이는 글들이 너무 싫다. 과장이 심하고 너무나 잘 보이려고 하고
- p. 147 시작 메모 중에서
반면 그 불편한 시들이 가진 가식의 냄새. 어느 시인의 시들은 그렇다. 너무 시를 쓰려고 하는 것. 그것이 시인을 자꾸 불편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 나는 그를 경멸하는구나! 하는 수 없는 일, 아닌가. 인식이라는 것을 내버려두고 감성에만 의존하는 값싼 글들에 내 눈은 아프다. 그것이 진짜 아픈 거다.
그는 갔다. 거름 빛이 남았다. 간 자리를 그는 잘 익은 술 한잔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 자리의 뚜껑을 열었을 때 빛의 고요가 그 안에 검게 자물려 있었다. 너의 말이 남긴 말은 검고도 아파서 나는 그 거름 빛을 선뜻 내 마음 밭의 잎들에게 줄 수는 없었다. 아린 자리를 어루만지는 빛 속으로 나는 내 생애의 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사랑한다, 이러헥 고여서 고약이 될 만큼 거름은 검고도 진득하다.
여름 정원에서 보고 냄새 맡고 느낀 것들을 쓰고 싶다. 다시 과일과 채소를 노래하는 시로 들어가고 싶다. 오이 호박 가지 자두 과일 오렌지 복숭아 귤 매실 등등. 매실청이 익어갈 때 한 인간은 그 병 안에 든 작은 매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매실이 제 향과 맛을 설탕에게 내어주면서 매실청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시간에게 무엇일까. 오이, 아직 길은 제대로 나지 않아서 오이 덩굴의 손은 하늘을 더듬다가 노란 꽃을 투둑 피우기 시작했다. 오이 향이 나는 저녁에 바다로 산책을 나간 새들은 바다 향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왔다. 자두, 붉은 것들은 그냥 붉은 것이 아니다. 푸른 울음이 붉게 변한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 돌아오리라고 생각한 수많은 순간에 나는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여름 정원은 눈부시다. 자두에 대해서 꿈을 꾸었다. 자두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속살에 설탕 분이 꿈을 꾼다.
- 2012년 7월 2일, p. 164
아픔 속에 맑은 물처럼 고여 드는 말. 그것은 작년에 내가 쓴 수박의 말이었다는 걸 알겠다.
- 2012년 7월 3일
집중이 되지 않는 날, 나는 나를 위협한다. 곧 일을 못할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플 때이다. 정말 몸이 아플 때, 그때 말은 정말로 힘겹고 무겁다. 머리는 그렇지 않다. 너무나 많은 것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 지나감의 충격이 말을 무겁게 하는지도 모른다.
- 2012년 7월 5일
꿈을 자주 꾸어서 꿈을 주제로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꿈 아니면 다른 길이 없어서? 아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꿈속이라는 느낌 때문
- p. 173
오늘 나의 일은 초록이 얼마나 무성한지, 그 무성함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참혹한 시간을 살게 하는지 생각하는 것. 가을이 오면 그 시간들 앞에서 나는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언어의 욕망에 시달릴 것인가.
- p. 175
당신, 시간이라고 말했나? 나는 그 말을 영원히 고쳐 쓰고 싶다. 순간이라고……
걸으면서 사는 것.
- 2012년 10월 16일
또한 삶이라는 것은 헌 모자 같아서 장롱 구석에 넣어두고 잊어버리는 것.
어제 한 메모. 그 가운데 시라는 것은 사물과 세계를 온전히 해석할 수 없음의 불가능에 대한 운문이다.
: 겨울 시간의 시작. 한 시간을 얻었다. 그 시간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 홍옥이라는 말, 참 좋다.
- 2012년 10월 28일
아닌 것을 아닌 것처럼 말하기는 쉽지 않다.
- 2012년 11월 1일
한 줄도 못 쓰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렇다. 하루종일 앉아서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다. 방청소를 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너무 싫었다. 밥하기도 설거지하기도 너무 싫다. 저녁빛이 깃든다. 오늘이 저문다. 울고 싶은 심정이다.
- 2012년 11월 14일
그들이 꽉 잡고 있는 시라는 것이 무섭다. 그들에게 시는 과거에 존재했던 그 무엇을 계속 답습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들은 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과 닮은 것만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타자의 것들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 타자의 것을 나쁘다고 말한다. 그것이 나는 무섭다. 2012년 무력한 나날. 악몽들, 그리고 대통령 선거. 악몽 곁에서 또 악몽을 꾸었던 순간들.
- 2012년 11월 19일
독서 일기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읽은 것을 다시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 책은 코넬리아 푼케의 『틴텐벨트 트릴로지』다.
이성복 : 그것은 허구이지요. '마치 ~처럼'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허구로서의 진실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고 삶을 기획하게 합니다. 시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삶 자체가 허구라면, 시는 허구 속의 허구입니다. 그런데 이 허구 속의 허구를 만들어서 삶이라는 허구를 뒤집거나 혹은 무화시키는 것, 그런 것이 시겠지요.(<문학동네> 2013년 여름호, 46쪽)
음악가를 질투한다. 음악은 눈을 감아도 들을 수 있다. 글은 눈을 뜨고 읽어야 한다. 눈을 감고도 생각나는 글귀들만이 아마도 음악처럼 살아가지 않을까. 그래서 시에 잠재하는 노래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지 않을까?
어제의 산책. 숲과 함께한 산책. 느끼고 본 것이 쓸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설 때가 많다. 글을 쓰는 연습이 부족했던 탓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말들. 말똥들. 마당을 가로질러 달리던 개들. 숲에서 만났던 작은 길들. 말들이 지나간 자국.
- 2014년 3월 23일, p. 208
하루종일 기다린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종일 기다린다.
감기 없는 세상을
독재자 없는 세상을
몸 없는 세상을
약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
나른한 신경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
저녁이 오느 것을
밤이 오는 것을
밤에 창밖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라일락 곁에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그들은 포옹을 기다리고 있거나
입맞춤을 기다리고 있거나
- p. 211, 시작 메모 중에서
상투적인 상태, 시적인 것만 같은 착각의 그 상태를 벗어나는 시를 쓰고 싶다. 이것이 이 계절의 질문일 것이다. 가벼이 무거움을 드러내는 것. 꽃이 핀 풍경에서 순이 나오는 풍경에서 벗어나는 것. 쉬듯 싸우는 것. 그 모든 것이 이 시간을 걸어가는 힘이다.
- p. 213, 시작 메모 중에서
이 마을의 소음은 아주 단조롭다. 바깥엔 햇빛만 들끓는다.
우리 모두는 실패할 것이라는 악몽에 시달린다. 악몽에 시달리든 시달리지 않든 우리는 실패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패하는, 실패하는 존재다. 죽음은 모든 실패의 어머니이다. 몸의 실패.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패의 근원이다.
글을 참 맛깔나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옆에서 조곤조곤 말하듯 쓰는 사람들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담스럽지 않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부럽다는 생각. 허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자신이 다치지도 타인을 다치게 하지도 않는 글. 그런데…… 글은 그것뿐인가?
- pp. 230-231
창가에 가득찬 저녁, 창을 서쪽에 두었던 까닭은 저녁을 보기 위해. 밥을 하다가 뒤돌아보면 창으로는 저녁이 가득차 있다. 무슨 후회의 느낌이 있는 것도 아니다만 찬물에 손을 씻다가 창가에 가득한 저녁을 눈동자에 담는다.
- p. 234
여름 저녁은 천천히 오지. 저녁이 오는 걸 잊어버렸다 싶을 때 오지.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밥물 위에 올려놓은 조기는 익어가고. 아,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네. 아, 아직 오이 따러 가도 되겠네. 하지만 순간 새의 깃털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싶을 때 후두둑 저녁은 떨어지지. 어설픈 가슴속으로.
- pp. 234-235
: 내일은 사월이다. 그게 뭔가. 나는 모레를 기다린다. 내일이 아닌 모레를.
: 정말 아름다운 건 반전이다!
- p. 235
7시 30분쯤 하늘은 맑아진다. 나는 불을 껐다. 글쎄, 오늘 나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벅차다. 또 오늘을 사는 것.
: 젊은 예술가를 만나는 계절은 어떤 날씨이든 어느 계절이든 특별하다. 가장 혼자이고 가장 독특한 한 개인을 만나는 날. 그리고 너의 작업들.
: 네 작업 속에는 글과 산수와 유리라는 한 예술가가 겹치고 겹치다가 스러지면서 한 편의 세계가 되는 풍경이 들어 있다. 그리고 너의 불안. 예술가의 불안은 예술을 완성할 터이지만 그 불안이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일 때, 그리고 그 불안을 나도 잘 아는 터라 다만 나는 네가 이 길을 천천히 잘 걸었으면 했다.
- 2015년 5월 30일
시를 쓸 때마다 이 시를 쓰고 나면 끝일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를 쓰는 것인데 그 생각이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존재라는 단어 속에 들어 있는 무거움과 시간이라는 휘발하는 가벼움 사이에서 글은 둔탁해지고 마음은 급해진다. 이 난국 속을 사는 것이 시쓰기의 어려움일 텐데 그걸 자꾸 비껴가려니 비겁한 것이다. 뼈가 아프다.
- 2016년 1월 27일
한 시대의 시스템을 지탱시키는 것이 사이비 종교와 유사한 심리 저층이었다면 우리는 그 심리 저층을 혐오해야 하는가?
- 2016년 12월 5일, p. 270
간절한 한 사람의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 그 시간을 공감하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마음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곤 한다. 사람의 시간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린 수국 한 그루를 마당에 심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기 새들이 종일 지저귀던, 늙은 전나무에 있는 새집을 바라보던 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절한 어느 순간이 가지는 사랑을 향한 강렬한 힘. 그것이 시를 쓰는 시간일 것이다. 시를 쓰는 순간 그 자체가 가진 힘이 시인을 시인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 2017년 11월 12일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민정이 보내준 난다 노트 한 권을 꺼내들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몇 편의 시가 나에게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가기 전에 쓸 시가 있다면 쓸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내일 가더라도.
그리고 가야겠다. 나에게 그 많은 것을 준 세계로.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에게로.
꽃무늬 바지를 입고 노인은 절집으로 향하는 수유꽃 노란 길을 걸으신다 뼈가 가벼운 새들이 나무 위에서 잠에 겨운 꽃잎을 한 장씩 개키고 있다 절집에는 소풍을 가지 못한 얼굴들이 고기반찬 없는 상을 차리다가 멍든 자목련을 바라본다 극락까지 가서 밥을 먹고 지옥으로 돌아오면 마을의 몇 안 되는 염소들은 심개울 곁에 앉아 간첩이 내려왔다는 뉴스가 박힌 신문을 우물거리고 있다 근처 큰 도시에 있는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 셋이 개여울에서 변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는 이미 염소의 위장 안에 있다
- 「봄꿈」 , p. 310
그때 지진이 났을 때
그때 폭염이 왔을 때
그때 가뭄이 들었을 때
그때 홍수가 났을 때
그때 사랑이 왔을 때
그때 사랑이 미움으로 왔을 때
뭘 하고 있었나,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땅에 떠나간 이름만 쓰던 여름아
내가 나를 잊어버리지 못해
키우던 붉은 재앙의 얼굴
- 「지난 여름아」 중에서
나는 쓴다, 마치 우는 아이처럼 :
아이는 눈물이 쏟아지는 이유를
포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 조르주 바타유
1.
나는 1980년대 후반에 등단했다. 등단한 지 일 년이 조금 지나 첫 시집이 나오고 난 뒤 어느 술자리에서 처음 뵙게 된 선배 시인이 나에게 말했다.
"허수경씨, 시는 우리 입장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진짜 우리 편은 아닌 것 같아요."
그 당시 스물 중반이었던 나는 까마득한 선배들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구석자리에서 잘 마시지 못하던 소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얼굴이 빨개졌다. 술자리에 있던 분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지만 나는 계속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침묵이 길어지자 어떤 분이 끼어들었다.
"이제 첫 시집인데 뭐. 다음엔 잘하겠지."
모두 하하 웃었고 술자리의 대화는 다른 화제로 옮겨갔다.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나는 무엇인지 정의하기 힘든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편'이라니. '다음엔 잘하겠지'라니. 편가르기를 더 잘하겠지인가, 뭔가! 물론 그 나이, 화도 잘 내고 삐치기도 잘했던 내가 문제였겠지만 서울의 밤거리를 걸어도 걸어도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선배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다만 그때 그 분위기 때문이었다. 어떤 편이라는 것이 문학에 있다는 그 분위기 때문이었다. 아현동에서 봉천동까지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때 내가 결심한 것은 시인으로 살면서어떤 편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 「시인이라는 고아」 중에서, pp. 351-354
모든 순간은 우연과 우연으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매일 걷는 거리에서 어제는 보지 못했던 난민을 오늘 볼 때, 운전을 하고 가다가 갑자기 비둘기가 사이드미러를 때리고 지나가서 갓길에 차를 급정거해야 할 때…… 등등의 수많은 우연의 순간에서 시는 나온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알 수 없기에 한시라도 시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균열의 순간에 군열을 경험하지 못한다. 순간을 재구성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비슷한 순간을 시 언어로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비슷하지 그 순간이 아니다. 균열을 감지할 때 온전히 경험을 해야 한다. 이것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몸을 정확하게 통과하지 않는 범상한 시를 나 역시 많이 쓰고 살았다. 내가 쓴 범상한 시들은 나를 괴롭힌다. 아무리 퇴고를 하고 또 해도 그 범상함은 숨겨지지 않는다. 나의 게으름이 나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24시간 불을 밝혀놓고 시라는 물건을 제조하는 기계가 아니지 않은가? 시라는 물건을 파는 24시간 문이 열린 편의점은 더더욱 아니다.
- 「시인이라는 고아」 중에서
가는 이들의 시간을 함께 견뎌내야 하지 않겠는가. 시는 나에게 아무런 답을 하지 않지만 시를 쓰는 시간, 그것 자체가 다만 답이다. 시를 쓸 때마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너의 고아를 혹은 고아성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부모가 언제나 나를 파먹었다는 슬픔이 있다. 아마도 나의 근원적인 삶의 불구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며 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나는 인간의 결핍에 관심이 있다. 결핍이 빚어내는 내면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시쓰기의 시작일 것이다.
1.
(전략)
시를 많이 쓰는 나날이 네게 오기를 바란다.
날카로운 혀를 늘 심장에 지니고 다니렴.
사랑하는 민정에게
수경 씀
3.
(전략)
몸이 이렇게 아플 수도 있는 거니 미칠 것 같다던 가을날, 언니 많이 아파? 당연한 말 말고는 할말을 못 찾던 2018년 9월 12일, 목소리가 점점 젖어들고 잦아들어 졸려서 그런 걸 거라고 바라는 대로 믿고만 싶었던 그때 시인이 했던 말. “멀지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그렇게 쉽기야 하겠니. 오늘이 좀 안 좋아. 내가 좀 좋아지면 내가 전화를 다시 할게. 컴퓨터에 글들 보고는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내 글이 책이 좀 되기는 할까.”
4.
2018년 10월 27일 독일에서 시인의 수목장을 치렀습니다. 침엽수림처럼 키가 큰 시인의 독일 지인들이 둘러서서 그 높은 코끝이 빨개지도록 울며 코를 푸는데 나는 눈물이 하나도 안 났습니다. 말기암 소식을 전해온 시인과 처음 통화를 하게 되었을 때 훌쩍훌쩍 우는 내게 시인은 말했습니다. 이 일이 울 일은 아니라고. 그렇다면 대체 울 일은 어떤 일이냐는 물음에 시인은 생각해보면 참 많을 거라고, 그런데 내 일은 그럴 만한 일이 결코 아니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세상살이 속 울만한 일은 대체 뭘까, 울어도 될 일은 뭘까, 지난 1년 동안 울음을 잃어버린 나는 그 울음을 찾기 위해 꽤나 자주 곤궁해져보았던 것도 같습니다. 그 덕분에 울음을 잊고 살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게 생긴 단 하나의 어떤 ‘있음’. 식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장례지도사가 날 불렀습니다. 시인의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라며 그걸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릴까 손에 꼭 쥐었습니다. 깨질까봐 꼭 쥔 손에서 힘을 살짝 풀었습니다. 길쭉하고 단단한, 그러나 아직 어린 도토리. 유독 다람쥐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던 시인. 그 천진함의 눈을 엽서에 담아 내게 실어보내기도 했던 시인. “여기는 장미가 봉오리를 열기 시작한다. 마당에 나갔다가 토끼랑 다람쥐랑 잠깐 놀다가 문득 바라보니 저 아름다운 꽃이라니.” “세상에나 다람쥐들이 벌써 겨우살이 준비를 한다. 오늘 집 마당에 아직도 푸른 호두를 물고 재게 달리는 다람쥐를 본다.”
(하략)
- 출판사 리뷰 편집자의 책 소개 '시인을 대신하여 이 책을 완성하며'
이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김뭉치의 브런치를 구독해주세요.
이 글을 읽고 김뭉치가 궁금해졌다면 김뭉치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해주세요.
https://www.instagram.com/edit_or_h/?hl=ko
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