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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집왕 Apr 03. 2023

이게 다 ○○○ 때문이다!!

[21화] 디지털 사회의 확장된 자아 '프로필성'에 대하여


지난 20화 연재에서는 우리 사회의 '무한 비교 문화'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단순히 '과도하게 남과 나를 비교한다'라는 강도의 개념을 넘어서, 비교의 범위 자체가 단순히 내 주변 사람들이 아닌 '세상 모두와 비교'를 하고, 심지어 그 비교의 대상도 일반인이 아닌 셀럽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비교의 범위가 무한대로 넓어졌다는 말은 딱히 달가운 말은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금의 디지털 사회와 생애주기를 같이한 젊은 세대들이 이 '무한 비교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재 우리 사회의 '무한 비교 문화'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걸까요? 수년 전부터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SNS' 때문일까요? 오늘은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코리언(Korean)이라는 특수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 세계에 없는 우리나라만의 문화가 하나 있죠. 그것은 바로 유독 나이를 따지는 '서열 문화'입니다.

tvN ≪나의 첫 사회생활≫에서 묘사한 것과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꼭 나이가 든 사람만이 아니라 아이들 사시에서도 분명한 나이 기준의 서열 문화가 존재합니다. 꼭 TV프로그램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아이들이 처음 만나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너 몇 살이야?"라는 것을 알고 있죠. (*사실 저는 오늘 하루에도 몇 번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나이를 기준으로 한 서열문화 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가끔 사회생활 속에서 상대방의 나이에 따라 명확하게 선을 긋고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단순하고 편하게 만들어 준다고 느낍니다. 누군가와의 처음 관계를 가지고 이를 발전시키는 상황에서, 서로 나이 서열에 따라 말을 편하게 나누기로 합의한 이후에 '보이지 않는 벽' 하나가 사라지는 경험은 모두가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아무나 말을 놓지는 않지만, 신뢰가 쌓인 관계에서는 말을 편하게 나누는 것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아마도 진짜 문제는 서열 문화 그 자체가 아니라, <잘못된 서열 문화>일 것입니다. 가령, 누군가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회사 안에서 나보다 직급이 높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사회적 계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종종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어린 사람을 쉽게 하대하고, 직급이 높은 사람이 하급자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당연스럽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주어진 서열 혹은 위계 안에서 관계를 이어가더라도 서로의 위치를 존중해 주는 것이 필수적이데 이를 마치 사회적 계급으로 인식하는 것이죠.


지금 우리 한국사회가 서열과 위계를 유독 따지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곤 합니다.

먼저, 한국 사회의 나이 문화의 유래를 일제 식민지 시대의 관행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초대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가 군대 제도를 사범 학교에 도입하기 위해서 1886년 <사범학교령>을 시행했는데, 이 사범학교에서는 상급생과 교사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사범형 인간을 기르기 위해 나이와 위계를 철저하게 따지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죠. 이러한 문화가 식민지 시대에 우리 사회에 그대로 복제됐고 해방 이후에도 정부의 교육 정책에 반영됐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나이 기반 서열 문화가 일종의 일제의 잔재라는 것이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높은 지위의식이 일제 강점기 이전인 전근대로부터 이어져온 전통과 근대 전환기에 그 전통을 수정하는 가운데 형성된 한국 사회 고유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재미 역사학자인 황경문 호주 캔버라대학교 교수는 2004년 자신의 저작 ≪출생을 넘어서(Beyond Birth)≫에서 '출생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세습적 신분 제도는 전극대 시기 한국에서도 오랜 관행이었다. 물론 19~20세기 근대화를 겪으며 이러한 세습적 신분제가 붕괴되었고, 그 자리를 중인, 향리, 서열과 같은 '제2의 신분 집단'이 메꾸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생성된 대한민국 사회의 지위의식이라는 집합적인 의식은 결국 조선시대 신분제와 작동원리가 같다'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 지위의식은 '지위'는 엘리트 계급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지위란 나이와 조직 내 위계에서도 존재하는 것이죠.


좋습니다.

나이를 따지는 서열문화 혹은 지위의식이 우리 사회 특유의 문화라고 치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수성이 지금의 '무한 비교 문화'를 만들어 낸 유일한 이유라고 볼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서 서열과 지위를 따지는 문화가 어제오늘 일이 아님을 아는 상황에서, 오히려 지금의 세대와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변화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게 다 SNS, 특히 인스타그램 때문이야"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전 세계 인플루언서들이 활동을 하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실시간으로 포착되고 공유되며,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의 핫하고 멋진 장소와 모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당장이라도 이 인증 열풍에 속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셜 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바로 인스타그램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스타는 과거의 싸이월드와 같이 친구(일촌) 중심으로 이뤄지는 폐쇄형 SNS가 아닌 개방형 SNS이기에 그 비교 범위가 전 세계적으로 넓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내 주위의 엄친아(엄마친구아들)이 아닌, 더 넓은 범위의 금수저들의 삶을 마치 내 주위의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 특징도 포함되어 있죠.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반론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인스타를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반론입니다.  실제로 인스타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SNS 사용을 거부하는 부류가 지금도 상당수 존재하죠. 국내에도 이처럼 인스타를 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비교 문화가 꼭 인스타그램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인스타그램 이전에도 다수의 개방형 SNS가 존재했는걸요?


저는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현대사회의 '무한 비교 지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틱톡과 같은 SNS를 이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우리 모두는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카카오톡 입니다. (이하 카톡)


“누구나 사용하는 카톡이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민 모바일 메신저 앱인 카카오톡 서비스 그 자체가 문제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2009년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 '모바일 메신저 앱'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2010년 아이폰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무선 인터넷 환경이 변한 것입니다. 국내 통신 3사가 자사 와이파이존을 빠르게 확충했고, 기존의 요금 폭탄을 걱정했던 인터넷 요금제를 변경하여 급기야 무선 인터넷 무제한 요금제가 출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Nate버튼으로 대표되던 기존 ‘인터넷 접속 시 이용료 폭탄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에서 자유로워지면서, 휴대폰 사용의 양대 축이었던 SMS(단문메시지) 서비스는 사용이 간편한 무료 서비스인 카카오톡으로 빠르게 대체되었습니다.

  

카톡과 SNS은 차이점은 기본적으로 메시지 전송을 유/무료로 전송하는 것에 있었지만, 카톡 서비스에 가입한 많은 이들이 기존에 하지 않았던 하나의 단계를 추가적으로 거쳐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프로필 설정’ 이죠. 카톡에 가입한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누군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프로필 사진(프사)’을 올리고, ‘상태 메시지(상메)’를 작성해야 하는 의미를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프사나 상메를 반드시 설정해야지 해당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아무런 설정을 하지 않은 자는 아시다시피 아래와 같은 달걀과 같은 ‘기본 프로필’ 이미지를 선사받게 되죠.



카톡이 생기기 전에, 사람들이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했을 때 상대방에 전달하는 정보는 오로지 하나 ‘전화번호’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카톡이 국민 메신저로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전화번호를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기본 하나의 전화번호에 속한 '나'라는 사람의 프로필을 설정해야 하는 불필요한 의무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프사나 상메를 설정할 강제적인 의무는 없다고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프로필 상태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자연스럽게 자신과 비교를 하는 '공개 시장'에 입장하게 된 것이죠.  



한스 게오로크 묄러와 폴 J. 담브로시오는 저서 ≪프로필 사회: 진정성에서 프로필성으로≫ (원제: You and Your Profile: Identity After Authenticity)에서 우리 삶에 어느덧 자연스럽게 일상화된 ‘프로필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펼칩니다.


저자들이 만들어낸  ‘프로필성(Profilicity)’은 개인의 홍보, 인정, 평판 관리를 통해 특정한 기술, 특히 소셜 미디어를 매개로 형성되고 표현하는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는 온라인 프로필로 나타나는 일종의 확장된 자아(The Extended Self)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프로필이 반드시 우리 자신의 신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인스타그램에서 개인이 자의적으로 꾸민 프로필들이 진실이 아니다’라고 비판하곤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제시한 프로필의 내용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한 포인트가 아닙니다. 누군가 올려놓은 프로필이 100% 진실에 부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애초에 없습니다. 모두의 프사가 의도에 따라 구성된 것이라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남이 보는 형상대로 자신 역시 ‘진짜인 척’ 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간혹 개인을 진실하게 그리는 프로필이 요구되는 게 아니라, 반대로 프로필에서 보이는 것처럼, 존재하고 처신하는 개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죠. 저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여행을 찍은 사진을 프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프사를 만들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저자들은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표현을 빌려, 세상을 '1차 질서'와 '2차 질서'로 나눕니다. 여기서 '1차 질서'란 직관적으로 말해 '현실'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2차 질서'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보여지는 프로필'을 의미하죠. 가령, 이를 요 브런치를 빗대서 설명하면 '1차 질서'는 <책 한 권을 쓸 때마다, 죽을힘을 다해서 꾸역꾸역 한 줄씩을 겨우 써 내려가는 임홍택>이란 현실 인간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2차 질서'는 <그저 취미로 작가 생활을 하면서, 아주 손쉽게 베스트셀러를 써내는 것처럼 쿨한 척을 오지게 하는 편집왕>이라는 프로필 상의 가상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진실일까요? 또, 저는 어떤 모습을 보이기 위해 지금 오지게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조금 어려운 개념일 수 있기에, 아래의 사진을 예로 설명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위 사진은 2015년 미국에서 열린 영화 '블랙 매스' 시사회에서 촬영된 사진입니다. 레드카펫 주위에서 사람들 대다수는 조니 뎁과 같은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들을 찍기 위해 모두 자신의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있죠. 하지만 그 중간에 오직 한 할머니만이 사진 촬영 없이 이 장면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습니다. 당시 인터넷의 많은 사람들은 이 할머니야 말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감탄을 했습니다. 많은 수의 바이럴이 일어난 것은 덤이고요.


바로, 1차 질서가 이 할머니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2차 질서가 대다수의 사람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예시를 꺼내든 이유가 '우리도 저 할머니처럼 진정성이 넘치는 현실을 살자'와 같은 교훈적인 담화를 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한스 게오로크 묄러와 폴 J. 담브로시오는 '중요한 장면 그 자체를 즐기기보다 스마트폰을 들고 장면을 찍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단순히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러한 사람들이 모습이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세상을 진보적으로 지각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우리가 무한한 비교의 문화에서 살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과거에 비해서 우리는 이중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점 하나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가족, 친구, 회사의 동료가 존재하는 '현실 세계'에 여전히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소위 진정성 혹은 신실함이 필요합니다.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과거에는 이 역할 하나만을 충실하게 이행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디지털 소셜 사회에 사는 우리는 온라인상의 우리의 프로필을 만들고, 이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하는 과제를 추가로 받게 되었습니다.


온라인상에서 우리의 프로필은 단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단순하게 상황에 따라서 가면을 갈아 끼는 수준이면 상관없겠지만, 우리는 다수의 괜찮은 페르소나를 유지해야 하며, 각자의 페르소나에 맞는 정체성의 기교를 길러야 하며, 이를 끊임없이 수정되고, 갱신해야 하죠.


이제 우리는 현실 속의 동료뿐만이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나의 프로필만을 보고 나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을 익숙해하는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절대로 여행지에서 사진을 남기지 않는 교만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 살면서 현실에만 집중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아. 쓰다 보니깐 저 스스로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은 대체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걸까요?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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