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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쿡 Sep 02. 2024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S대 입학 전 10년 간의 방황 (4)



학군단 졸업 전, 후보생들은 본인이 갈 부대를 배정받게 되는데, 병사들처럼 무작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고려된다. 성적 / 학과 / 격오지 희망 여부 등이 포함되며, 그 조건을 맞춘 후 부대 자체는 뺑뺑이(?)를 돌려 추첨한다.


나는 칼과 같은 전역을 원했기 때문에 격오지에는 갈 생각도 없었고, 경영학과에 맞추어 병참 병과로 지원을 했다. 나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는 체대 출신이라 이왕 갈 거면 힘들게 가자고 특전사에 지원했다.


그리고 나는 친구의 집에서 거주하면서 공장에서 일을 했다. 임관 전 돈을 벌어서 각자의 부모님들께 무언가 해드리고 싶어서였다.*


*나는 그때 받은 돈으로 LG UHD TV를 사드렸다. 친구는 부모님께 현금으로 드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아직도 그 TV를 쓰고 있다.


이 경험은 돈의 가치를 알게 해 주었고, 힘든 군 생활에도 도움이 되었다.


둘 다 술을 좋아했기에 일을 마치면 허름한 가게에서 소주 한 잔을 마시면서 고단함을 날리기도 했고, 다음날 숙취로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용돈 벌이 생활을 하던 중 부대 발표가 있는 날이 다가왔다. 나와 친구는 자주 가던 술집에서 소주를 각 두 병을 마시고 있었고, 이윽고 발표 문자가 도착했다.


“000 후보생은 3 군수지원사령부 소속입니다.”


진짜로 병참 병과에 붙은 것이었다. 


나는 바로 인터넷에 3 군수지원사령부가 어디 있는지 검색했고, 부대의 위치가 인천 부평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인천 부평이라니… 새롭게 펼쳐질 꿀 같은 군생활을 상상하니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내 군생활은 이런 꽃 길일 것이라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었다.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 녀석은 대구에 있는 50사단으로 배치를 받았다.  특전사가 아니면 후방 조용한 부대에서 군생활을 하고 싶어 했는데,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리 둘은 “이래서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며 더 열심히 일하자.”라고 말하며 술잔을 부딪혔다.


그때, 다시 한번 문자가 왔다.


“가 군번 오류로 부대 배치 결과가 다시 한번 있을 예정입니다. 착오를 드려 죄송합니다.”*


*장교들은 성적에 따라 군번을 부여받게 되어 있다. 만약 군번이 13-10010이면 13년도에 임관하는 전체 후보생 중 10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가 군번이란 아직 확정이 되지 않은 군번을 뜻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기 카톡방은 난리가 났다. 특전사로 배치받은 친구는 안도의 한숨을, 나와 친구처럼 좋은 부대를 배치받은 친구들은 욕을 했다.


알고 보니 부대를 추첨하는 시스템에 등록된 전체 후보생 중 학군단을 그만둔 학생 8명이 포함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들로 인해서 다시 한번 추첨을 돌리게 된 것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아까운 내 3 군수지원사령부…


삼일천하라고 했던가, 나는 십 분 천하였다. 천하를 가진 기분은 채 10분을 가지 못했다.


나는 개혁을 시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날아든 문자.


“000 후보생님은 12사단 소속입니다.”


뭔가 불길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12사단을 검색하자마자 나온 첫 키워드는 이것이었다.


‘산악전 전문부대’


강원도 인제, 원통에 위치한 최전방 사단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군생활을 하셨던 곳이었다. 인천 부평에서 강원도 인제까지 가다니, 최악이었다.


내 부대 선배인 故 노무현 대통령님


친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전사에 가고자 했던 친구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특공대로 가게 되었다. 훈련은 훈련대로 받으면서 병사 관리는 또 병사 관리대로 해야 하는 어려운 자리였다.


그때 알았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문장이 강원도 '인제'와 '원통'을 뜻한다는 것을.


이 표지판을 실제로 목격했을 때 섬찟함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서 한참 유행했던 짤이 있었는데, 한 대대장님이 새로 들어온 신병들과 함께 눈 덮인 최전방에 서서 “2%만이 이런 데서 근무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하며 북한을 바라보는 짤이었다.


대학교 시절 그 짤을 보면서 한참 웃었던 생각이 났다. 이윽고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내가 갈 곳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소주 각자 소주 두 병을 더 마셨고, 4병을 마신 나는 다음날 공장에서 구토를 해가며 일을 해야만 했다.


설경이 정말 아릅다운 곳이다...


내 군생활은 초급 장교 훈련반에서부터 아이러니했다.


장교로 임관하기 위해서는 군사학교에서 4개월간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전남 장성에 있는 보병학교로 갔다.


처음 보병학교로 가면 생활하는 건물 앞에 각자의 반 (특전반, 화기반 등)과 생활관이 적힌 안내판이 있었다. 자격증 시험을 치러 가면 붙어 있는 벽보 같은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도 내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안내판 옆에 있는 병사에게 이름이 없다고 이야기했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 특전반이나 화기반은 이름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특전반은 저기고, 화기반은 저기니 가셔서 이름을 확인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특전반이라니. 나는 칼과 같이 전역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특전반. 하지만 그곳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로 화기반으로 이동했고, 다행히 내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허나, 나는 화기반이 무엇인지 몰랐다. 뭔가 무기를 다루는 것 같기는 한데, 군대가 처음이다 보니 무슨 화기를 다룬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이름 옆에는 81mm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이런 모습은 보지도 않고, 꿀보직이라는 단어에만 꽂혔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리고 N사 포털에서 4대 꿀보직에 81mm 박격포가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인천에서 인제로 부대가 변경된 슬픔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 보직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이 부분까지 읽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을 알 것이며,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불쌍했는지 공감하거나 아니면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사실 4대 꿀보직이란 병과 중 가장 힘들다는 보직 4개를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중 하나가 81mm 박격포였던 것이다.


포를 분해해서 나누어 이고 다녀야 한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81mm 박격포는 대한민국 모든 부대에서 사람이 메고 다닐 수 있는 가장 무거운 화기였다. 무게는 자그마치 42kg에 달했다. 마라톤도 아니고 42kg이라니, 40kg 쌀가마니를 업고서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4개월간 나는 4.2인치 박격포 보직을 받은 친구들이 그 화기를 레토나라고 불리는 차량에 실고서 아침마다 웃으며 지나가는 꼬락서니를 매일 봐야 했다. 물론 나는 81mm 박격포를 등에 업은 채였다.*


*4.2인치 박격포는 81mm 바로 다음으로 무거운 화기였다. 깻잎 한 장 차이로 그 보직을 받은 친구들은 화기를 차량에 실었고, 우리는 등에 둘러메고 다녔다. 아래는 내 심정을 짤툰으로 완벽히 표현해 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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