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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un 22. 2024

나와 대화를 나눈 1,248시간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한 편의 글을 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분량이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제가 매주 쓰는 에세이를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글자수 1,000자 ~ 1,500자 내외의 글을 쓸 때 3~4시간 정도 걸립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쓰고 싶은 글의 주제가 명확하고, 그날따라 글이 술술 풀릴 때에 한합니다. 저도 때로는 내가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모르겠고, 한줄한줄마다 턱턱 막힐 때가 있어요. 그럴 땐 평소보다 두 배의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시간만 놓고 보면 3시간 걸려 쓴 글보다 6시간 걸려 쓴 글이 더 완벽해야 할 텐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같은 분량, 같은 난도의 글이라는 가정하에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건, 그만큼 제가 글 안에서 헤매는 시간이 많았다는 뜻이거든요. 초보 시절에는 내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10시간 넘게 글을 붙잡고 있기도 했어요. 그러나 요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들 것 같으면 컴퓨터를 딱 끄고 다른 일을 하며 분위기를 전환해 줍니다. 


아무리 일류 작가라고 하더라도 글을 쓸 때마다 항상 술술 풀리지는 않을 겁니다. 글이 잘 써지는 날도 있고, 잘 써지지 않는 날도 있는 법이죠. 오죽하면 드라마 <시그널>, <악귀> 등을 쓴 김은희 작가도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 때가 글이 막혀서 안 써질 때라 했고, 그럴 땐 '엉덩이로 쓸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을까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일류가 될 수 있다고. 



지금까지 제가 글을 쓴 모든 시간을 합산하면 어느 정도가 될까요? 제가 매주 꾸준히 에세이를 쓴 지 약 6.5년 정도가 되었고, 평균적으로 매주 4시간의 글을 썼다고 가정했을 때 약 1,248시간 정도 에세이를 썼습니다. 이 시간이 조금도 헛되지 않았다는 걸 느낀 건 한 면접 자리에서였습니다. 경력직 면접을 보는데, 가는 곳마다 면접관 분들이 저에게 "수진님은 긴장이 안 되시나 봐요.", "수진님은 대답이 참 시원시원하시네요."라며, 제가 자신감 넘치는 사람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 그래 보여도 긴장 많이 하고 있어요"라고 했지만, 사실 저는 조금도 긴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에세이를 쓰기 전,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면접관에게 평가받는 것이 두려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면접장을 나서는 경우가 허다했거든요. 물론 경력직은 경험도 많고, 그동안 쌓아온 포트폴리오도 있으니 사회 초년생보다 면접을 잘 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진짜 자신감이 생길 수 있을까요? '경력직인데 이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주면 어쩌지?' 하며 사회 초년생 때와 다를 바 없이 초긴장 상태로 면접을 봤을 수도 있습니다. 제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에세이를 쓰면서 나라는 사람을 보다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에세이를 쓴 1,248시간은 곧 '나와 대화를 나눈 시간'입니다. 1,248시간 동안 저와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제가 무엇을 까무러치게 좋아하고, 무엇을 참을 수 없이 싫어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잘 알 때 우리에게 무엇이 생겨나던가요? 바로 자신감입니다. 나를 잘 알기에 면접에서 어떤 질문을 받아도 자신감 있게 대답할 수 있었고, 면접 자리가 평가를 받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나도 회사를 평가를 하는 곳이라는 생각으로 자신감 있게 임할 수 있었던 겁니다. 


비단 면접에서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유독 싫어하는 것에 대해 '싫다'라고 말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었는데요.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그것을 진짜로 싫어하는지 잘 몰라서인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분명하게 내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도 나와의 대화가 만들어낸 자산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글이 잘 써지는 날도, 잘 안 써지는 날도 에세이를 쓰며 저 자신과 대화를 나눌 거예요. 아직도 나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거든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일류가 되지 않을까요? 하하하.




이 콘텐츠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일글레'입니다. 일글레 구독 하시면 매주 수요일마다 이메일로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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