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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an 24. 2019

도벽이 있습니다

[다른 작가의 글 훔치기]


작가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다른 작가의 글 훔치기]


도벽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쓴 글을 보면 훔치고 싶어요. 때론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훔치기도 합니다. 혹시 지금 신고를 염두하고 계신다면 부디 멈춰주세요. 그대로 갖다쓰는 게 아니라 내 글을 쓰는 데 참고하는 정도니까요.


단순히 책을 읽는 것과 좋은 문장을 훔치겠다고 작정하고 읽는 것은 확연히 다릅니다. 후자의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 나에겐 포스트잇 하나가 남아요. 마음을 울린 문장의 페이지 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이요. 책을 읽던 도중에도 적어둔 페이지 번호로 여러 번 되돌아갑니다. 문장을 읽고 또 읽다보면 어느새 그 문장은 나의 것이 돼요. 감동은 기본이고 그 문장을 발판 삼아 새로운 글감까지 얻어냈다면, 성공적으로 훔친 것입니다.


최근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제목이 와닿아 읽기 시작했어요. 요즘은 타인의 감정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공부해야 하는 시대잖아요. 꼭 필요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우리가 감정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도 훔치고 싶은 문장이 여럿 있었는데요. 아래는 53페이지에서 훔친 부분입니다.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다툴 때 보통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너만 힘드냐? 나도 너만큼 힘들어'라고요. 결국 '말을 말자'로 마무리되지만 정말 그렇게 마무리된 걸까요?  나와 너의 상처는 완전히 똑같을 수 없어요. 내 상처가 3cm고, 상대방의 상처가 4cm라면 조금이라도 더 찢어진 상대방이 더 아픈 거예요. 나는 상대방이 나보다 더 아픔을 인정하고, 상대방은 나 역시 아프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그래야 비로소 서로의 상처에 약을 발라줄 수 있어요.


나는 위 구절을 다섯 번 정도 읽고 나서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은  

서로의 상처를 저울질 하지 말라고만 말했거든요. 그래서 위 책을 쓴 신형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내가 이해한 바가 맞는지 몇 번이나 의심이 들었어요. 여섯 번째 읽을 때 확신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상처를 저울질 하지 않음이 우리를 더 아프게 했구나, 라고요.


이 구절이 좋았던 이유는 두 가지예요. 첫째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에요. 이 구절은 내 다음 글의 재료가 될 예정입니다. 즉 이번 도둑질도 성공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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