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을 통해 본 ‘여인 혜경궁’
지난 5편과 6편에서는 한중록을 통해 아내로서의 혜경궁 홍 씨의 삶을 살펴보았다. 이번 편과 다음 편, 즉 7편과 8편에서는 엄마로서의 혜경궁 홍 씨의 삶을 따라가 보겠다.
한중록에서 작자, 혜경궁 홍 씨는 ‘내 남에 없는 정리로’ 아들을 키웠다면서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정성을 여러 번 언급한다. 임오화변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지아비의 죽음 앞에서 여러 번 자결하고자 했지만 작자는 세손을 위해 참았다고 한중록 곳곳에 언급하고 있다. 작자가 의도적으로 남편 대신 아들을 선택했든, 어쩔 수 없는 변 앞에 남은 아들이라도 지키려고 했든 간에 작자는 임오화변이 일어날 당시 11세이던 세손이 24세에 왕위에 오르기까지 오직 아들의 등극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 결과 혜경궁은 아들 정조와 손자 순조의 보호 하에 천수를 누리게 된다. 인간 혜경궁이 어머니로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이제부터 살펴보겠다.
엄마로서의 삶①
혜경궁 홍 씨에게 정조의 탄생은 하늘의 도우심이었다. 작자는 1750년 첫아들 의소를 낳았으나, 2년 후인 1752년 봄에 그만 잃고 말았다. 세자빈인 작자에게 세손은 그의 지위를 확고히 해줄 귀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의소의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소를 잃은 바로 그 해, 훗날 정조대왕이 된 둘째 아들 ‘산’이 태어난 것이다. 이로써 작자와 그녀의 친정의 지위는 더욱더 견고해지게된 것이다. 작자는 어린 정조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주상은 그 모습이 뛰어나게 위대하시고 골격이 기이하셔서 진실로 용과 봉황 같으며, 하늘의 해와 같은 모습이셨다. (「한중록」, 혜원출판 p.30)
주상께서 홍역 후에 잘 자라시고 돌 즈음에 글자를 능히 아셔서, 보통 아이와 달리 아주 숙성하였다. 계유년(癸酉年, 영조 29년, 1753) 초가을에 대제학 조관빈을 대왕께서 친히 심문하실 때, 궁중이 모두 두려워하자 당신도 손을 저어 소리 지르지 말라 하였으니, 두 살에 어찌 이런 지각이 있었으리오. (「한중록」, p.30)
세 살에 보양관을 정하고 네 살에 효경을 배우셨으나 어린아이 같지 않고 글을 좋아하시므로 가르치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다. (「한중록」, p.30)
일찍이 어른같이 머리를 빗고 낯을 씻었으며 글을 좋아하였다. 여섯 살에 유생을 불러 강의할 때 대왕께서 부르셔서 평상에서 글을 읽히셨는데, 글 읽는 소리가 맑으며 참으로 잘 읽으셨다. (「한중록」, p.31)
작자에게 첫아들을 허망하게 잃고 얻은 두 번째 아들 정조는 그 누구보다도 소중했을 것이다. 자식을 둔 여타의 어미처럼 작자는 어린 정조에 대해 칭찬하고 또 칭찬한다. 사실 자식을 둔 어미의 마음으로 보면 어느 자식이 안 뛰어나겠냐마는 어린 정조는 작자의 기대 이상으로 문과 무를 겸비하고 그림에도능하며, 훌륭한 성품을 지닌 성군의 모습으로 자라난다. 작자가 이런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날로 커져갔을 것이다.
정조의 나이 11살 되던 해,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사도세자의 갖가지 비행과 정신 이상 행동으로 인해 갈수록 나라의 상황이 어렵게 되자, 사도세자의 생모, 즉 작자의 시어머니인 선희궁이 영조에게 대처분을 요청하고 영조는 즉각 사도세자에게 처분을 내린 것이다. 작자는 어쩐 일인지 그날의 대처분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어린 정조에게 당부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 (「한중록」, p.127 )
남편의 대처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남편을 위해 작자가 일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아들이 많이 놀랄 것을 염려하여 마음을 굳건히 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는 동안 작자는 세손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머문다. 그곳에서 놀라고 망극해 있는 어린 정조를 보고 작자는 또 한 번 당부한다.
“망극하지만 다 하늘의 뜻이니 세손이 몸을 평안히하고 착해야 나라가 태평하고 성은을 갚을 것입니다. 설움 중이지만 마음을 상하지 마십시오.” (「한중록」, p.131 )
지아비가 뒤주 속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하는 말 치고는 너무 태연하고 상황 정리가 너무 빨리 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리 남편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나,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남편을 위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하늘의 뜻으로 여기며 아들의 마음만을 걱정하다니, 이것이 바로 혜경궁 홍 씨로 하여금 남편을 버리고 아들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의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작자는 임오화변 이후 정조가 재위하게 되기까지 그녀의 삶을 아들의 안위를 위해 살게 된다. 이는 대역죄인으로 몰려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세손의 안위는 늘 불안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를 궁지로 몰아넣어 죽인 당사자들에게 세손은 언젠가는 자신들의 목숨을 걷어갈 저승사자와 같이 보였을 것이다. 때문에 정조는 보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을 안 작자는 세손이 시아버지인 영조에게 점수를얻게 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작자는 7월에사도세자의 장례를 마치고 8월에 영조를 대하는데 서러운 마음을 전혀 보이지 않고 도리어 감사함을 전한다.
“모자(母子)를 보전함이 다 임금의 은혜 덕분입니다.”(「한중록」, p.137)
이 뿐 아니라 어린 세손을 영조에게 맡겨 두고 친정으로 떠난다. 세손을 영조의 곁에 두고 사랑을 얻게 할 작자의 발 빠른 행보였던 것이다.
“세손을 경희궁으로 데려가셔서 가르치시길 바랍니다.”
“세손이 떠나면 네가 견딜 수 있겠느냐?”
내가 눈물을 흘리며 다시 아뢰었다.
“세손이 떠나서 섭섭하기는 작은 일이요, 위를 모시고 배우기는 큰일입니다.”
(「한중록」, p.138 )
이러한 작자의 계획은 가히 성공적이어서 영조의 세손을 사랑하는 마음은 날로 더 해 가게 된다. 당시 작자의 생각엔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무참히 죽게 한 비정한 영조가 아들도 아닌 손자에게 그러지 못할 법이란 없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영조에게 자신의 아들이 사랑을 얻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 첫 번째 방법이 세손을 영조 곁에 두게 하는 것이었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 큰 원인 중에 하나가 처소가 멀었기 때문이라고 작자는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자가 영조와 세손의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갑신년(영조 40년, 1764) 2월에 일어난 갑신처분이다. 이것은 대역죄인의 아들인 세손을 영조의 첫째 아들로 아들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는 처분이었다. 작자는 갑신처분의 배후로 화완옹주를 지목한다. 작자의 말에 의하면 화완옹주는 남의 부부 사이는 물론 모자 사이까지 질투하고 방해하는 사람이어서 장차 세손이 즉위하면 자연히 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될 작자를 질투하여 영조를 충동질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완옹주의 흉심으로 갑신년의 그러한 처분을 받게 된 작자는 한중록에서 이때의 슬픔이 남편인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와 비교해서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고 했다.
갑신 이월 처분은 하도 천만 꿈 밖이니 위에서 하신 일을 아랫사람이 감히 이렇다 하리요마는, 내 그때 정사의 망극하기는 견주어 비할 곳이 없으니....(중략)...곧 죽고 싶되 목숨을 뜻대로 못하고 그 처분을 원하는 듯하여 스스로 굳이 참으나 그 망극비원하기 모년에 내리지 않고...(「한중록」, p.72)
임오화변은 남편이 뒤주에 갇혀 무참히 죽은 것이고 갑신처분은 아들의 호적이 그저 바뀐 것이니 객관적으로 일의 경중을 따지자면 비교할 대상도 못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작자가 갖는 남편과 아들에 대한 애정의 정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다. 작자가 남편을 의도적으로 버렸든, 타의에 의해 잃었든 작자에게 아들은 남편이요, 또 삶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갑신처분에 대한 작자의 슬픔은 임오화변 때와 비하여 조금도 덜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갑신처분으로 대비가 될 수는 없었지만 작자는 세손이 보위에 오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아들을 돕는다. 세손을 제거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세손이 영조의 신뢰와 사랑을 끝까지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작자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병신년(영조 52년) 3월 초닷샛날, 영조가 승하함에 따라 드디어 작자의 아들, ‘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자신의 아들이 무사히 보위에 오르는 것, 그것은 지난 13년 동안 이 악물고 살아온 작자의 삶의 목표이자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기쁨을 작자는 한중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주상을 간신히 길러 왕위에 오르시는 것을 보니, 어미의 정으로 어찌 귀하고 기쁘지 않겠는가!
(「한중록」, p.158~159)
선왕이 아니면 내 어찌 오늘날이 있으며 내가 없으면 선왕이 어찌 보전하여 계셨으리요
(「한중록」, p.127)
작자와 아들이 서로 의지하여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좋은 날을 맞이하게 된 그때의 그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자는 자신의 아들이 보위에 오른 이 날이 승리의 날이요, 한 많은 세월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날만은 그랬다. 하지만 이 감격이 미처 수그러지기도 전에 작자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정조는 복수의 칼을 높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