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을 통해 본 ‘여인 혜경궁’
엄마로서의 삶②
정조가 왕위에 올라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외가, 즉 작자의 친정을 벌한 것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작자의 숙부인 홍인한에 대해서는 영조 재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대리청정을 방해한 죄를 물어 사사했다. 작자가 자신의 아들만큼이나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친정을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직접 벌을 주었으니 그때의 작자의 심정이 어땠을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작자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 가슴을 치며 통곡했으나 아드님이신 정조에게 누가 될까 봐 죽지도 못했다고 한다.
작자는 남편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 남편이 비참하게 죽었을 때, 친정아버지가 죽었을 때 슬픔을 이기지 못해 ‘따라 죽고자 했으나’ 아들 때문에 죽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열에도 죄를 짓고 효에도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자처했다.
이렇게 오직 아들만을 위해 살아온 작자에게 직접 나서서 친정을 몰락시키는 아들의 행동은 매우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자는 한중록 어디에서도 우회적으로나마 아들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자에게도 아들의 눈은 두렵지 않았을까 한다. 아들이 친정을 몰락하게 만든 이유가 다름 아닌 작자의 남편이자 아들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11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아들의 한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이 자신의 친정을 향해 든 복수의 칼날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꿔 말해 자신의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음을 작자 자신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보위에 오른 정조가 제일 먼저 외가를 비롯하여 임오화변과 관련하여 죄를 지은 자들의 대한 처벌이었고 또한 비명에 죽은 아버지를 잊지 않고 즉위 열흘 만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이라 올리고 그의 묘를 영우원, 사당을 경모궁이라 높인다. 또한 이제껏 자신을 극진히 보살펴준 작자를 위해서는 여러 번 궁호를 올리고 49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극진히 섬긴다.
하지만 정조는 최소한 외가에 대해서만은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선 작자도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왕의 성심도 본디 외가에 불만이 계셨지마는 노모를 앉히고 외가를 망하게 하실 뜻이야 어찌 계시리오 (「한중록」, 혜원출판 p.108)
작자는 아들에게 설마 외가를 망하게 할 뜻이야 어찌 있었겠느냐고 하지만 정조가 한 처분을 보면 외가에 대한 감정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작자는 아들을 갖은 노력 끝에 보위에 오르게 하지만 그 아들에 의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친정이 몰락하고 만다. 자신을 도와 세손의 안위만을 평생 걱정하다 돌아가신 아버지(홍봉한)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숙부 홍인한을 비롯하여 자신의 동생까지 사사를 당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작자는 얼마나 자신의 가슴을 뜯고 뜯었을까.
그러나 작자는 아들에게 비판의 말 한마디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들의 가슴 깊숙이 맺혀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한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위에 앉히기까지 숨죽여 살아온 작자는 아들이 보위에 오르고 나서도 다른 이유에서 또다시 숨죽여 살아간다. 이러한 작자의 인고의 시절에 대해 감격했던지 정조는 작자의 회갑년을 맞아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고 작자의 세 동생과 두 삼촌에게 정 3품 이상의 벼슬을 내린다. 또한 작자의 많은 친정 식구들을 초대하는데 이는 정조가 자신의 외가를 용서하고 그 지위를 회복시켜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작자는 버려진 몸에 이 얼마나 고마운 은혜냐며 기뻐한다.
지난해에 내 나이가 육순이라 하여 세 동생과 두 삼촌에게 정 3품 이상의 벼슬을 주시니, 버려진 몸에 이 얼마나 고마운 은혜인가. 분수에 넘쳐 죄송스럽고 고맙기만 헤아릴 수 없고, 6월의 내 생일 때 두 삼촌을 뵈오니 기쁨이 세 동생 보던 때와 같았다. (「한중록」, p.171 )
9살에 나이에 궁에 들어온 후 회갑을 맞은 나이까지 살아남기 위해 숨죽이고 또 숨죽이며 살아온 작자에게 회갑을 맞고부터는 기쁨의 날들만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작자가 회갑을 맞은 해로부터 5년 뒤인 1800년, 하나밖에 없는 아들 정조는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을 먼저 보낸 작자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살다 천수를 다해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야말로 한 많은 여인의 굴곡진 인생이었다. 그녀를 같은 여인으로서 연민하고, 또 연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