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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당신의 모든 순간을 보고 있다

by 영업의신조이

12장.

이름의 탄생 — 불리는 소리에 깨어나는 자아


하얀 조명이 병실 벽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어둠과 빛의 경계가 흐릿해진 시간, 윤서는 품에 안은 아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분만의 거센 숨결과 온몸의 떨림은 서서히 가라앉았고, 태어남의 충격 속에서 아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은 말갛고 깊은 눈동자. 그 속에 윤서와 지훈의 얼굴이 작고 선명하게 비쳐 있었다. 그 거울 같은 눈을 바라보며, 윤서는 생각에 잠겼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기 직전,

윤서의 마음은 아주 먼 시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뱃속에 생명을 품은 그날부터, 그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고민하던 지훈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지훈은 아이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 연필을 꺼냈다.

클릭 펜도, 굴러다니는 볼펜도 아니었다. 짧고 단정하게 깎인 연필이었다. 책상 앞에 앉은 그는 하얀 종이를 삐딱하게 두지 않았고, 정확히 반듯한 각도로 놓았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연필을 사각이며 딸아이의 이름 후보를 하나씩 써 내려갔다. 사각사각. 조용한 방 안을 채우는 그 소리는, 마치 마음의 결을 따라가듯 조심스럽고 고요한 울림이었다.


최희망.

최율.

최마리.


지훈은 각 이름의 의미를 곱씹으며 며칠이고 혼자 글씨를 써보았다. ‘희망’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작은 등불 같았다. 누구보다 어렵고 약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줄 수 있는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율’은 흐름과 조화를 뜻했다. 인류와 함께 숨 쉬고, 나와 타인의 경계 없이 어우러질 수 있는 존재로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마리’는......

그 이름을 쓸 때, 그의 손이 가장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움직였다.


윤서는 조용히 물었다.


“왜 마리는 맨 마지막이야?”


지훈은 말없이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가장 어려운 이름이니까.”


‘마리’라는 이름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통을 지나 사랑에 이르러야만 닿을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는 마리아를 떠올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고통과 침묵, 용서와 사랑을 모두 견뎌낸 한 인간. 그는 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사랑의 형태를 온몸으로 살아낸 존재였다.


지훈은 조용히 말했다.


“‘마리’라는 이름에는 책임이 담겨 있어. 한 사람의 삶을 감당할 이름이고,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누군가의 모든 아픔과 기쁨을 함께 품겠다는 선언이기도 해. 내가 이 아이의 아빠라면, 그 무게를 피하지 않겠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도, 마리는… 끝내 사랑으로 존재할 아이니까.”


윤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반쯤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지인들에게 투표해 보자. 희망, 율, 마리. 셋 중에 어떤 이름이 가장 좋을지.”


기이하게도 결과는 동률이었다. 누구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자 윤서는 양손으로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긴 후, 양 손바닥으로 양쪽 볼을 감싸며 장난기 어린 얼굴 표정으지훈에게 말했다. 마치 일곱 살 아이처럼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고 지훈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장화 신은 고양이’의 밈 속 눈동자처럼, 초롱초롱하면서도 애타고 사랑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빠가 정해줘야지. 이건… 무거운 일이야. 아빠니까.”


지훈은 웃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마리’라는 이름을 종이에 다시 한번 적었다. 이번에는 훨씬 더 또렷하고 굳건한 필체로.


“최마리.”


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에는 온 생을 던진 듯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기억이 되돌아온 병실.


윤서는 여전히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이의 눈동자는 여전히 작고 투명한 거울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속엔 지훈과 윤서, 두 사람의 얼굴이 함께했고, 이름이 불려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윤서는 속삭이듯 말했다.


“마리야.”


그 말은 단지 이름의 발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를 세상에 부르는 언어였고, 정서였고, 약속이었다. 마리는 이제 단지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부름에 응답하는 자아, 사랑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윤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어서 와, 마리야.

엄마야.

아빠야.

너무 보고 싶었단다, 내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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