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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아이와 거울 — 처음 나를 만나는 시간
마리의 세 살 생일 아침,
창밖에는 봄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녹지 않은 겨울의 흔적 위로 가느다란 빗방울이 내려앉았다. 창틀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부드럽고 낮게 울렸고, 그 아래에서 마리는 한 손에 작은 고양이 인형 ‘키티’를 쥔 채,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어딘가 몽환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자기처럼 하얀 살결 위에 보드라운 잔솜털이 보송보송 내려앉았고, 마치 투명한 빛을 품은 듯한 검은 눈동자는 밝게 반사되고 있었다.
긴 속눈썹 아래,
아직 말이 서툰 어린아이의 맑은 시선과 비언어적 표현은 부족했지만, 아빠 지훈의 의지적인 빛을 꼭 닮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밤하늘을 닮은 갈색빛이었고, 굵은 웨이브가 어깨를 어루만지듯 흘러내렸다. 귀 뒤로 살짝 말려 들어간 곡선은 조용한 성품을 은연중에 엄마 윤서와 닮아 있었다. 마리는 그 거울 속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는 아이의 것이라기엔 믿기 어려운 감정의 깊이가 담겨 있었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묘한 관조와도 같은, 낯선 사물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에 대한 인식이었다.
마리는 자신을 부를 때 꼭
“마리는…”
을 먼저 말하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 물었을 때에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마리는 초콜릿을 좋아해요.”
“마리는 아빠랑 놀고 싶어요.”
마리의 말은 언제나 3인칭이었다.
그녀는 아직 엄마와 아빠라는 바다에 깊이 연결된 채였다. ‘마리’라는 자아의 섬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무의식의 바다에서 부유하는, 분리 직전의 물방울처럼, 자신이 ‘나’라는 것을 완전히 인지하지 못한 채, ‘마리’라는 이름을 빌려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마리에게 거울은 하나의 문이었다.
투명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자신과 세상을 나누는 도구이자, 동시에 하나로 합쳐주는 연결선. 거울 속에서 마리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함께 보았고, 그것이 자신과 섞여 있다고 느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아직 햇살이 창을 비추지 않았지만, 마리는 어느새 홀로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눈동자는 거울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안엔 선명하지는 않지만, 투명한 바다가 있었다. 잔물결조차 가라앉지 않은, 깊은 무의식의 파도처럼 보였다. 그 안에서 마리는 아직 분리되지 않은 채로 떠 있었다.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흐릿한 세계. 이름은 있었지만, 아직 정체는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다.
윤서가 ‘너는 마리야’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도, 마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되묻곤 했다.
“마리가… 마리야?”
그러다 마리는 거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리는 아빠 좋아해.”
윤서는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정말? 아빠 좋아해?”
마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순간,
햇살 한 줄기가 창을 뚫고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빛은 마리와 거울을 동시에 비추기 시작했다. 마리의 전신이 환히 빛나자, 거울 속 바다도 함께 마리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간의 고요가 흘렀다.
마리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 코를 지그시 눌러보았다. 거울 속 비친 자신의 모습과 손끝에서 느껴지는 촉감 사이의 미묘한 일치감이 퍼졌다. 그 촉각적 인식은 공유된 진동을 일으켰고, 거울 속 고요의 침묵을 깨웠다.
그 고요한 진동은 무언가 깊은 세계로 마리를 인도했고, 그 침묵은 가라앉는 물방울의 고요 속에서 거대한 충격으로 전환되었다.
마리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도록.
그러곤 어느 순간,
무언가에 크게 놀란 듯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고, 동시에 작은 눈을 크게 떴다.
그 눈 속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바다에서 작은 물방울 하나가, 끝없이 펼쳐진 파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순간처럼.
그때, 마리는 입을 열었다.
“나는… 엄마 좋아해.”
그 말은 이전의 문장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마리’라는 이름을 외부로부터 부여받은 존재가 아닌, 스스로 ‘나’로 인식한 하나의 자아가 세상과 맺은 첫 언어였다. 처음으로, 완전히, 하나의 자아가 바다 위로 솟아올라 빛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마리는 연이어 언어를 쏟아냈다.
“나는 아빠를 좋아해.”
“나는 초콜릿을 좋아해.”
“나는 키티를 좋아해.”
“나는 아빠랑 엄마랑 노는 걸 좋아해.”
그 순간,
전체 무의식의 바다에서 마리라는 새로운 객체의 물방울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나왔다. 세상의 파도와 부딪히며, 조용하지만 분명히 그녀는 하나의 자아로 떠올랐다.
윤서와 지훈은 그 장면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 너머로 비치는 햇살과 빗소리가 교차하던, 이상하고 모순적인 날씨였다. 그 모순은 방 안 전체를 감쌌고, 마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세상의 복잡한 질서도 이제 비로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엄마 아빠의 눈에는 거울 위 한 포스터가 들어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특별전 — 인간, 빛을 보다》
4월 15일.
세상은 그렇게,
조용히 모든 것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각, 세상은 그 아이의 조용한 선언을 부드럽게 받아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