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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사랑과 외면 —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투쟁
마리는 19세. 고3이 되었다.
더 이상 아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모르게 성숙한 기운이 마리의 외모와 말투, 이미 키는 엄마 키를 넘어 170센티가 되었다. 하지만 매일 활동량이 많은 마리는 아직 마른 체격이었다. 하지만 이미 성숙한 한 여성의 분위기는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아침은 조용하고 단정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부드러운 햇살이 커튼 틈으로 흘러들고, 손끝을 따라 흐르듯 퍼졌다. 마리는 천천히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복숭아 같았다.
단단하게 여문 듯하면서도 여전히 솜털이 몸 전체를 감싸고 있었고, 어디선가 꿀향기가 스며 나오는 듯한 존재감이 있었다. 매끄러운 이마 아래 눈빛은 깊고도 조용했다. 긴 속눈썹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잘 다듬어진 코선과 입술은 어린 시절의 앳됨과는 다른, 여성스러운 균형을 품고 있었다.
아침에 거울을 보며 그녀는 이마를 짚었다.
전날보다 조금 더 진해진 여드름, 약간은 처진 눈매, 그리고 어딘가 아직도 어른스럽지 못한 부족한 턱선. 자신은 이미 성인이라 믿었고, 감정과 사유는 또래보다 훨씬 깊은 세계로 향해 있었지만, 거울은 여전히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한 소녀를 비추고 있었다. 세상은 아직 자신을 아이로 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서도 마리는 다소 외로운 존재였다.
성적은 늘 상위권을 유지했고,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원만했지만,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어딘가 혼자 떨어져 있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다. 모두가 아이돌 이야기나 유행하는 예능, 시험의 부담에 대해 가볍게 수다를 떠들었지만, 마리는 그 안에서 자주 침묵을 지키곤 했다. 그녀가 머무는 정신의 깊이는 때로 또래와의 사이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가슴 떨리는 설렘은 존재했다.
같은 반 민우였다. 민우는 학교 야구부 투수였고, 건강한 체격에 잘 정리된 이마와 시원한 인상이 돋보이는 착한 아이였다. 말수는 적은 편이었고 그의 하루는 언제나 단정하고 성실했다. 하지만, 마리를 향한 그의 시선은 언제나 따뜻했고 진지했다.
민우는 자주 마리 곁에 다가왔고,
때로는 의미 없는 질문을 핑계 삼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야구부 연습이 끝난 늦은 오후, 흠뻑 땀에 젖은 운동복 차림으로 나에게 다가와 오래 참은 그의 진심을 고백했다.
"나, 너 좋아해. 진짜 오래됐어. 그냥, 네가 날 쳐다볼 때마다 숨이 막혀."
마리는 그 고백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민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혹시... 나한테 기회 한 번만 줄 수 있어? 그냥, 시험 끝나고 나면 같이 밥이라도 먹자."
마리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대답했다.
"미안해.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그 말은 정중하지만 단호했다.
마리는 민우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진심이, 그 정중한 고백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고백을, 그 사랑을 지금 받아줄 수 없었다. 많은 기대가 그 공간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고, 엄마, 아빠, 그리고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아니, 지금은 사랑의 감정적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반대급부적으로 마리의 마음속에는 더 강력한 에너지로 누군가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건 바로, 한 공연 영상 속에서 처음 만난 K-팝 아티스트 하린이다.
하린은 마리에게 단순한 연예인을 넘어 하나의 철학과 같았다. 지적인 눈빛과 예술적인 감각, 직접 작곡 작사한 노래 그리고 시 같은 가사 속에 스며든 고독과 깊이는 마리의 내면에 강한 울림을 남겼다. 하린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들, “예술은 고통을 아름답게 재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은 마리의 감수성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녀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마치 자신이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 마리는 그를 사랑했다. 직접 만날 수도 없고, 현실적으로 닿을 수도 없는 존재였지만, 마리는 하린이라는 이름 속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고 있었다.
민우와 하린 사이에서 마리는 혼란스러웠다.
현실의 따뜻함과 이상 속의 동경. 그녀는 민우의 진심을 외면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이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자주 밤마다 민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고, 자신이 그에게 건넨 냉정한 말들을 되씹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고3이라는 시간은 어떤 감정도 허락하지 않는 잔혹한 계절이었다. 모의고사, 수시, 자소서, 면접, 그리고 미래라는 이름의 압박은 그녀를 점점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마리는 책상 앞에서 하루에 14시간 이상을 공부했고, 엄마는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시지만, 마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하루에 마시는 커피가 세 잔을 넘겼다. 카페인으로 버티는 감정은 무뎌져 갔고, 소셜미디어 속 사람들의 일상은 점점 그녀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거울 앞에 설 때면, 그녀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넌 약하지 않아. 넌 울면 안 돼. 넌 이겨내야 해.'
하지만 밤이 깊어지고, 방 안이 정적에 잠기면 마리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 말이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오자,
마리는 심장에 극심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향해 왜 사는지, 그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자기 안에 자기가 아닌 내가 너무도 많이 자리하고, 본인의 삶인 마냥 자리를 차지하고, 내 인생의 시간을 무례하게 써버리고 있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마리 본인이 자기 자신이 사랑받기 위해 타인의 기대에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고, 그것이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나를 위함이 아닌 남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그 가식적인 가면을 벗어버리려고 아무리 애를 쓰고 떼어내려고 노력해도, 세상이라는 강력한 접착제가 기대라는 자물쇠의 형태로 견고한 모습으로 마리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마리 본인의 진실한 자아의 깊은 본질과 그 단단히 붙어 떨어지지 않는 가면 사이의 간극의 크기와 폭 그리고 견고함은, 19살 여자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지금의 마리에게 너무도 크고 깊은 심리적 감정적 균열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감정들이, 마리를 진짜 자신에게로 이끌고 있었다. 그것은 외면의 시절을 통과하는 통증이었고, 그 통증은 언젠가 진짜 사랑으로 이어지기 위한 진통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지금은 외면하더라도, 언젠가는 지금 내려놓은 나의 모든 조각들을 다시 주워 올려 안아주고 맞출 것이다. 그리고 날개를 달고, 나 ‘마리’라는 진정한 한 사람으로 날고 싶다.”
그 글씨는 또박또박하면서도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첫걸음이었다. 진짜 사랑을 향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위대한 투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엄마 윤서는 마리가 깜빡 잠이 든 책상 위에서 그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검은 잉크는 번져 있었고, 종이의 결은 이미 오래전부터 울어 있었다. 글자 사이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마다, 작은 물결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물결은 한밤의 침묵 속에서 흘러내린 눈물의 기록이었다.
한 장의 종이 위에서,
한 사람의 마음이 파도 되어 밤새도록 울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그 싸움은, 그렇게 조용히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