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1화.
손 _ 세대를 건너 다시 돌아오는 사랑
시집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중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 속
내 손을 감싸 쥔 당신의 손을 바라봅니다
그 손이 하루를 견딘 울음이었다는 걸
그땐 정말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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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앨범을 꺼낸 어느 겨울 저녁,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사진 한 장이 손끝에서 천천히 미끄러지듯 잡혔습니다. 빛바랜 사진의 냄새가 방 안에 잔잔하게 퍼지고, 그 속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기억 하나가 조용히 깨어났습니다.
사진 속에는 작고 마른 소녀의 손이 있었고, 그 손을 감싸 쥔 어머니의 손이 유독 또렷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흐릿한 배경과 달리,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듯한 그 손끝의 온기가 지금의 공기 위로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 시는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낸 다 커버린 딸의 후회를 빌려 써 내려간 글이지만, 그 정서의 깊은 자리에는 제 어린 시절의 마음이 함께 겹쳐져 있습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어머니는 늘 바쁘게 일하셨고, 지친 기색을 감춘 채 언제나 저를 웃게 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아이였던 저는 그 모습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엄마는 강한 사람이니까, 어떤 고단함도 견딜 수 있는 어른이니까. 그 당시의 저는 그렇게 단순하게 그냥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이가 마흔을 훌쩍 넘어가고, 세상살이의 무게가 얼마나 버거운지 몸으로 배운 뒤에야... 그 사진을 다시 보는데 가슴이 이상하게 저려왔습니다.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은 겨우 스무 살 언저리, 많아야 스물일곱을 넘기지 않은 어린 여자의 얼굴이었습니다. 지금의 저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나이에 어른이라는 이름을 감당해야 했고, 사랑받고 싶고 상처받기 싫은 나이에 누군가의 삶을 대신 짊어져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오래된 사진 속 그 작은 손이 갑자기 너무 무겁게 그리고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잊고 지냈던 장면들이 하나둘 떠올랐습니다.
눈이 매섭게 내리던 겨울밤, 가로등 밑에서 자신이 쓰던 목도리를 풀어 제 목에 감싸주던 따뜻한 손.
여름의 뜨거운 바람을 막아주려고 주위의 박스 조각이나 광고지 종이로 만든 부채, 뭐라도 찾아내 시원한 바람 한숨을 보내주던 손.
반찬이 부족한 날이면 소시지 부침 하나라도 더 제 입에 넣어주던 손.
본인도 충분히 지쳤을 텐데, 제가 울면 업히라고 등을 내어주던 조용한 넓은 손.
학교 등록비를 마련하려고 추운 날 식당 부엌일, 아파트 청소며 전단지 아르바이트까지 마다하지 않고 밤늦도록 일하시던 거칠지만 따뜻한 손.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 뒤편에...
제가 평생 알지 못했던 고요한 공간에서 그녀 혼자 눈물을 훔치던 손...
그 침묵의 파동이 지금에서야 마음에 닿습니다.
“빛바랜 사진 한 장 속
내 손을 감싸 쥔 당신의 손을 바라봅니다
그 손이 하루를 견딘 울음이었다는 걸
그땐 정말 몰랐습니다”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습니다, 손 일부...>
시간은 잔인하게 흘렀지만,
사진 속 손은 한 번도 제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살아보니 알게 된 것들...
사람은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버티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른이어서 강한 것이 아니라,
그 어린 나이에 저를 지키기 위해 억지로 강해져야 했던 것이라는 진실을...
그리고 어느 날,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다가 문득 제 손이 아이의 손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중학교에 올라가는 아이는 그 손길을 아무 의미 없이 받아들이겠지만,
저는 그 순간마다 오래된 사진 속 어머니의 마음이 조용히 제 손끝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 손끝에 스며 있던 체온이, 한 세대를 넘어 제가 아이에게 건네는 온기로 변하는 느낌.
아마도 그 사진 속 순간에도 어머니는 이런 마음으로 제 손을 감싸 쥐고 있었겠지요.
사랑은 때로 시간이 흘러야만 제대로 읽히는 언어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몰랐던 그 촉감이
내가 누군가의 부모가 된 뒤에야 온전히 이해되며,
그제야 우리는 사랑의 진심에 도착하게 됩니다.
사진 속 손은 더 이상 만질 수 없지만,
그 손끝의 따스함은 지금도 제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그 온기를 이어 줄 차례입니다.
세대를 건너 돌아온 사랑이, 오늘도 제 손끝에서 천천히 피어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