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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머무는 자리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by 영업의신조이

2화.

멈춰 선 우산 _ 젖은 어깨에서 시작된 시



"

몇 번이나 누군가의 젖은 어깨를 막아냈을까?

남편의 젖은 와이셔츠가 투명하게 비친다

어린아이의 눈 속에 사랑이 빛난다

어머니의 블라우스엔 빗방울이 내려앉는다.

"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시 멈춰 선 우산 중에서...>

.

.

.


이사를 준비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베란다 창고 깊숙한 곳에서 꺼낸 상자 하나가

바람 빠진 시간처럼 조용히 바닥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물건들이

천천히 세상으로 다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느 한켠 아래에서,

어린 시절, 비 오는 날마다 함께 걸어주던 검은 우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미 천은 해져 있었고,

부러진 살들은 우산의 형태를 간신히 버티고 있었습니다.


손에 들리자마자,

아주 오래된 한 장면이 영화되어 스며들었습니다.


그 장면 속에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지금의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을 그때의 어머니는

늘 하얀 블라우스를 단정히 차려입고 비가 오면 교문 앞까지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퍼붓던 소나기 속에서,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우산을 제 쪽으로 깊게 기울여 주셨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의 오른쪽 어깨가 천천히 젖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흰 블라우스에 번진 물기는, 새하얀 천 위에서 조용히 퍼져나갔고, 소매 끝의 빗방울은 금속처럼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엄마가 지켜줄게’라는 말없는 체온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에서 어떤 문장이 조용히 태동하듯 움직였습니다. 그 문장이 바로 이 시의 첫 씨앗이 되었습니다.


“찢어진 너의 천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를 감싸 안아주던 엄마의 품이 그립다.”


이 문장은 오래전 어머니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바로 그날 상자에서 우산을 꺼내 들고 어머니의 젖어 가던 어깨를 떠올린 순간, 제 안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말이었습니다. 사랑을 뒤늦게 이해한 사람이 말없이 울 때 나오는 문장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기억은 또 하나의 장면을 불러왔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어린 저.

우산 하나를 셋이서 나란히 쓰고 걸어가던 어느 비 오는 날.


좁은 우산 아래에서

세 사람의 어깨가 서로 닿아 흔들리던 장면,

그때 어머니가 먼저 저를 향해 우산을 밀어주자

아버지가 말없이 우산을 다시 어머니 쪽으로 살짝 밀던 장면,


그리고 조용히 비에 젖어가던...

아버지의 왼쪽 어깨가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비가 스며든 와이셔츠는 살결처럼 비쳐 보였고, 그 젖어가는 어깨를 보며 어린 저는 그저 아빠가 비를 맞는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그 젖은 어깨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내어준 자리였다는 것을...


그때 또 한 줄이 마음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빗방울에게 양보한 남편의 왼쪽 어깨가 그립다.”


이 문장 역시,

예전에 써둔 것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을 떠올린 바로 그날 저의 가슴에서 새로 만들어진 문장이었습니다.


사랑은 늘

젖는 사람의 자리에서 피어나더군요.



"

몇 번이나 누군가의 젖은 어깨를 막아냈을까? 남편의 젖은 와이셔츠가 투명하게 비친다 어린아이의 눈 속에 사랑이 빛난다 어머니의 블라우스엔 빗방울이 내려앉는다.

"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시 멈춰 선 우산 중에서...>




그래서 헤어진 우산을 버리려다가 손끝이 멈췄습니다.

우산의 천 위에는 오른쪽 어깨를 젖게 하던 어머니와

왼쪽 어깨를 젖게 하던 아버지의 체온이 아직도 조용히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세 사람의 젖은 어깨에서 흘러나온

서늘하고도 뜨거운 기억들에서.


중학생이 된 제 아들과 함께 우산을 들고 걸을 때면

저 역시 모르게 우산을 아들 쪽으로 더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작은 기울임 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겨주신 사랑의 흔적을 뒤늦게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행히도 제 부모님은 아직 곁에 계십니다.

언제든 차를 몰고 달려가 어머니의 어깨와 아버지의 어깨를 다시 두 손으로 감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 속 주인공은 그럴 수 있는 시간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우산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은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 아니라 뒤늦게 깨달은 사랑이 흘려보내는 뜨거운 비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헤어진 검은 우산을 그날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우산이 바로 이 시가 머무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

남루하게 남겨진 너의 모습은

어쩌면 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떠나보내고 나서야만

사랑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인가?


우산 속 뜨거운 비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시 멈춰 선 우산 중에서...>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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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